담마의 거울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초기경전에서 본 상구보리하화중생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30. 21:01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초기경전에서 본 상구보리하화중생

 

 

상구보리하화중생의 모티브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는 말이 있다. 대승불교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는 동시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말이다. 때로 소승비하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이 말의 모티브가 되는 말이 초기경전에 보인다. 맛지마니까야 버리고 없애는 삶의 경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So vata, cunda, attanā palipapalipanno para palipapalipanna uddharissatīti neta hāna vijjati. So vata, cunda, attanā apalipapalipanno para palipapalipanna uddharissatīti hānameta vijjati. So vata, cunda, attanā adanto avinīto aparinibbuto para damessati vinessati parinibbāpessatīti neta hāna vijjati. So vata, cunda, attanā danto vinīto parinibbuto para damessati vinessati parinibbāpessatīti hānameta vijjati.

 

[세존]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지 않고 수련시키지 않고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

 

(Sallekhasutta- 버리고 없애는 삶의 경, 맛지마니까야 M8, 전재성님역)

 

 

물에 빠져 있는 자가 물에 빠져 있는 자를 구할 수 없다. 수영이 능숙하다면 모를까 물에 빠진 자를 구하기 위하여 물에 들어간다면 함께 물귀신 되기 쉽다. 경에서는 물 대신 진흙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 하였다.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attanā palipapalipanno)’이란 무엇을 말할까? 여기서 진흙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palipa’이다. Palipaa marsh(습지, 늪지대)를 말한다. 탐진치의 세간에 사는 일반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라 하였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은 attanā의 번역어이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atta‘self, ego, personality’의 뜻으로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attanā palipapalipanno)’이라는 말은 유아견을 가진자라 볼 수 있다.

 

오온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자는 구원의 대상이지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스스로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라 하였다. 가르침을 실천한 자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쭌다여, 자아에 대한 이론과 관련되거나 세계에 대한 이론과 관련하여 수많은 견해가 세상에 생겨났다. 이러한 견해가 생겨날 때, 이러한 견해가 잠재할 때, 이러한 견해가 돌아다닐 때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면, 이와 같은 견해는 버려지고 이와 같은 견해는 폐기된다.(M8)”라 하였다.

 

경에 따르면 자아론과 관련하여 생겨남과 잠재, 그리고 돌아다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자아관념이 생겨난다(uppajjanti)’라는 것에 대해서는 예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견해가 일어남을 말한다. 잠재한다(anusenti)’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들에 자꾸만 탐닉하여 견고해지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돌아다닌다(samudacāranti)’라는 것은 신체적 또는 언어적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유아론자가 선정에 들면

 

자아관념의 대상은 오온 즉,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말한다.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는 견해를 말한다. 그렇다면 유아론자가 선정에 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hāna kho paneta, cunda, vijjati ya idhekacco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 savicāra vivekaja pītisukha pahama jhāna upasampajja vihareyya. Tassa evamassa – ‘ sallekhena viharāmī ’ ti. Na kho panete, cunda, ariyassa vinaye sallekhā vuccanti. Diṭṭhadhammasukhavihārā ete ariyassa vinaye vuccanti.

 

[세존]

쭌다여, 어떤 수행승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하는 경우가 있다. 그는 ‘나는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쭌다여, 고귀한 님의 계율에서는 이것들을 버리고 없애는 삶이라고 부르지 않고 고귀한 자의 계율에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한 삶이라고 부른다.”

 

(Sallekhasutta- 버리고 없애는 삶의 경, 맛지마니까야 M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일까? 이는 마지막 구절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한 삶이라고 부른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가르침을 실천한 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유아론자의 선정삼매에 대하여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유아론자가 선정삼매를 즐기는 것에 대하여 버리고 없애는 삶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Pps.I.186에 따르면, 부처님은 장로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다른 과대평가자의 유형, 팔선정을 성취하고 자신들을 진정한 고행으로서 버리고 없애는 삶(sallekha)을 닦았다고 믿는 자들에 관해 말한다고 설명한다. 원래 그 삶은 금욕적 또는 고행적인 수행을 말하는데 부처님은 그 말을 더러움에 대한 근본적인 삭제 또는 제거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팔선정의 성취는 불교적 수행에 포함되지만, 이것들을 성취한 수행승들은 MN.52, MN.64에서 예로서 묘사된 경우처럼, 이것들을 통찰의 기초로서 사용하지 않고, 단지 행복과 평정을 누리는 수단으로써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167번 각주, 전재성님)

 

 

유아론자가 선정삼매를 성취하였을 때 단지 행복과 평정을 누리는 수단으로써 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현법열반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서 설명되어 있다. 그런 현법열반론은 62가지 사견에 속한다. 그렇다면 현법열반론이란 무엇인가?

 

현법열반론이란 무엇인가?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을 완벽하게 누릴 시간은 바로 이 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으로서, 디가 니까야, <계온품(戒蘊品)〉의「범망경(梵網經 Brahmājala Sutta)(D1)에서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62가지 사견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하였다. 현법열반론은 결국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법열반론의 정형구는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D1)”로 설명된다. 현법열반론이 자아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법열반론자들은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선정삼매에 들었을 때 희열, 행복, 평정 등을 즐기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현법열반론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라고 주장한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을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현법열반론은 유사열반 또는 가짜열반론과 같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붓다가 출현하기 전에도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감각적 쾌락은 지고의 행복이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쾌락은 지금 이 생에서 향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내생의 지복을 기다리며 즐거움을 누릴 귀중한 현재의 순간을 지나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을 완벽하게 누릴 시간은 바로 이 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으로서, 디가 니까야 <계온품(戒蘊品)〉의「범망경(梵網經 Brahmājala Sutta)(D1)에서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62가지 사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세속 사람들이 열중하는 문제이지 수행자와 비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비구에게 있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비난했던 세속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비구가 세속의 번잡스러움이나 이성(異性)의 유혹에 교란 받지 않고 출세간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매우 공경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이 아니라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필요한 것까지도 희생해가면서 수행자들에게 제일 좋은 음식과 가사를 바칩니다. 비구가 사람들의 보시로 생활하면서 재가자와 똑같이 세속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매우 부적절 합니다.

 

더구나 비구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세상을 버립니다. 만약 비구가 재가자처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고귀한 이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자는 즐거운 감각적 쾌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집)

 

 

현법열반론은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을 때 이 생에서 완벽한 쾌락을 향유하자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상은 부처님 당시도 있었고 현시대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도 자아론에 기반하여 말한다면 현법열반론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을 말한다면 내생은 의미가 없다. 이는 마하시사야도가 존재하지 않는 내생의 지복을 기다리며 즐거움을 누릴 귀중한 현재의 순간을 지나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라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현법열반론은 철저하게 자아론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선정을 성취하였을 때 머물고 만다. 선정에 대하여 통찰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행복과 평정을 누리려는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선을 증득한 뒤에 그것에서 출정하여 형성된 것을 명상하지 않음을 말한다. 선정수행만 할 뿐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음을 말한다.

 

선정삼매는 의도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MN52를 열어 보라고 하였다. 맛지마니까야 앗타까나가라의 경에서 아난다는 첫 번째 선정도 형성되고 의도된 것이다.(M52)”라 하였다.  선정삼매가 마음의 의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에서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아난다는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무상하고 소멸하는 것이다.(M52)”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광명을 보고 즐기며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청정도론에 십경계가 있다. 수행중에 열 가지 경계가 일어남을 말한다. 그 열가지는 ①광명 ②희열 ③경안 ④결심 ⑤분발 ⑥행복 ⑦지혜 ⑧확립 ⑨평온 ⑩욕구를 말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는 비법이다. 법처럼 보이지만 자세하게 보면 법이 아닌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수행중에 빛을 보았을 때 “아, 내가 드디어 깨달았구나!”라는 착각이 일어 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광명을 즐기면서 앉아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광명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따라서 바른 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나에게 이런 광명이 일어났구나. 그러나 이것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따라 일어났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고,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고,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하였다. 통찰수행이 뒤따라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바른 수행이라 하였다.

 

선정삼매는 의도된 것이다. 의도된 것에 안주하여 행복과 평온을 즐기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니고 바른 법도 아니다. 의도되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버리고 없애는 삶(sallekha) 44가지

 

부처님은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유아론에 빠진 자는 괴로움에 빠져 있는 세상사람을 구원할 수 없음을 말한다. 탐욕으로 사는 자가 탐욕으로 사는 사람을 탐욕탐욕부터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누가 진흙에 빠진 자를 구해 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44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이에 대하여 버리고 없애는 삶(sallekha)’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다른 사람들이 잔인하더라도 우리는 잔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살해하더라도 우리는 생명을 살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 ‘다른 사람들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빼앗더라도 우리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 ‘다른 사람들이 순결을 지키지 않더라도 우리는 순결을 지킬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5) ‘다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6) ‘다른 사람들이 이간질하더라도 우리는 이간질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7) ‘다른 사람들이 욕지거리하더라도 우리는 욕지거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8) ‘다른 사람들이 꾸며대더라도 우리는 꾸며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9) ‘다른 사람들이 탐욕을 부리더라도 우리는 탐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0) ‘다른 사람들이 성내는 마음을 갖더라도 우리는 성내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1)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견해를 지닐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2)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사유를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사유를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3)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언어를 쓰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언어를 쓸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4)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행위를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행위를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5)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생활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생활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6)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정진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정진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7)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새김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새김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8)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집중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집중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9)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지혜를 갖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지혜를 가질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0)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해탈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해탈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1) ‘다른 사람들이 해태와 혼침에 묶이더라도 우리는 해태와 혼침에 묶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2) ‘다른 사람들이 흥분과 회한에 사로잡히더라도 우리는 흥분과 회한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3) ‘다른 사람들이 의심에 빠지더라도 우리는 의심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4) ‘다른 사람들이 악의를 갖더라도 우리는 악의를 갖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5) ‘다른 사람들이 원한을 품더라도 우리는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6) ‘다른 사람들이 저주하더라도 우리는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7) ‘다른 사람들이 횡포를 부리더라도 우리는 횡포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8) ‘다른 사람들이 질투하더라도 우리는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9) ‘다른 사람들이 인색하더라도 우리는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0) ‘다른 사람들이 거짓을 행하더라도 우리는 거짓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1) ‘다른 사람들이 기만하더라도 우리는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2) ‘다른 사람들이 고집을 부리더라도 우리는 고집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3) ‘다른 사람들이 자만에 빠지더라도 우리는 자만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4) ‘다른 사람들에게는 충고하기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충고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5) ‘다른 사람들이 나쁜 벗이 되더라도 우리는 좋은 벗이 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6) ‘다른 사람들이 게으르더라도 우리는 부지런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7)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8) ‘다른 사람들이 부끄러움이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9) ‘다른 사람들이 창피함이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창피함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0) ‘다른 사람들이 배움이 적더라도 우리는 많이 배울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1) ‘다른 사람들이 태만하더라도 우리는 애써 정진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2) ‘다른 사람들이 새김을 확립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깊은 새김의 확립을 이룰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3) ‘다른 사람들은 지혜가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지혜를 가출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4) ‘다른 사람들은 세속에 집착하여 자기 울타리를 치고 그것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세속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 울타리를 치지 않고 그것에서 쉽게 벗어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Sallekhasutta- 버리고 없애는 삶의 경, 맛지마니까야 M8, 전재성님역)

 

 

물에 빠지지 않은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있다. 가까운 거리라면 팔을 건네서 구할 수 있고, 먼 거리라면 밧줄을 던져서 구해 낼 수 있다. 수영할 줄 안다면 헤엄쳐서 구할 수 있다. 이는 경에서 스스로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승에서 말하는 상구보리하화중생과 같은 말이다.

 

하화중생과 관련된 말

 

경의 말미에 하화중생과 관련된 말이 있다. 그것은 쭌다여, 나는 그대에게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위해 그대들의 이익을 구하고 그대들을 연민하여 자비심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을 행했다.(Ya kho, cunda, satthārā karaīya sāvakāna hitesinā anukampakena anukampa upādāya, kata vo ta mayā., M8)”라는 대목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연민(anukampaka)과 자비심(anukampa)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자비스런 스승의 임무는 진리에 대한 전도 되지 않은 가르침이다.”라 하였다. 진리를 깨달았으면 자비심으로 회향해야 함을 말한다.

 

여기 물에 빠진 자가 있다.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자를 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영도 못하는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건져 낼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나룻배의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마치 사람이 물이 넘치고, 홍수가 져서,

물결이 거센 강에 빠지면,

그 물결에 휩쓸려 떠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 (stn319)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해 내지 못하듯이 가르침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는 남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르침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나 심지어 의미를 거꾸로 파악하는 자는 물에 빠진 자를 구해 낼 수 없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구원할 수 없다. 마치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할 수 없는 이치와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스스로도 모르고 의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가 어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stn320)”라 하였다.

 

 

2015-06-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