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최상의 공양이란 무엇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23. 19:22

 

 

최상의 공양이란 무엇인가?

 

 

 

최근 한국불교에서는 기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과연 기도라는 말은 적합할까? 기도라는 말 대신 어떤 말이 좋을까? 아마 불공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그래서 절에 기도하러 간다는 말 대신 옛날부터 써 왔던 절에 불공드리러 간다는 말이 더 낫다.

 

공양을 바라는 자가 있는데

 

불공이란 문자 그대로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공양을 빠알리어로 뿌자라 한다. 뿌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먼저 뿌자와 관련된 게송이 있다. 법구경 73번 게송에 공양을 바라는 자가 있다.

 

 

Asanta bhāvanamiccheyya 아산땅 바와나밋체이야

purekkhārañca bhikkhusu;   뿌렉카란짜 빅쿠수

Āvāsesu ca issariya,     아와세수 짜 잇사리양

pūjā parakulesu ca.        뿌자 빠라꿀레수 짜.

(Dhp73)

 

 

그는 헛된 특권을 바란다.

수행승 가운데 존경을

처소에서는 권위를,

다른 사람의 가정에서는 공양을 바란다.

 

 (Dhp73, 전재성님역)

 

 

かなは、にそぐわぬしい尊敬ようとうであろう。

修行僧らのあいだでは上位ようとし、

僧房にあってはようとし、

他人っては供養ようとうであろう。

 (Dhp73, 中村元)

 

 

어리석은 자는 헛된 명성을 바란다.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윗자리를,

승단 안에서는 다스리는 권력을,

남의 집에 가서는 돈과 먹을 것을 바란다.

 (Dhp73, 법정스님역)

 

 

愚人貪利養   우인탐리양

求望名譽稱   구망명예칭

在家自興嫉   재가자흥질

常求他供養   상구타공양

 

(Dhp73, 한역)

 

 

어리석은 비구는 칭찬받기를 원하고,

비구들의 위에 서려하며

권위를 내세우고

관계없는 사람들로부터까지 존경받으려 한다.

 

 (Dhp73, 거해스님역)

 

 

He would want unwarranted status,

preeminence     among monks,

authority       among monasteries,

homage      from lay families.

 (Dhp73, Thanissaro Bhikkhu)

 

 

 

 

 

누가 헛된 특권을 바라는가?

 

73번 게송에서 그는 헛된 특권을 바란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Asanta bhāvanamiccheyya: DhpA.II.76-77에 따르면, 어리석은 수행승은 존재하지 않는 특권을 바란다. 믿음이 없으면서 사람들이 나를 믿음이 있는 자로 보기를!’하고 원한다.

 

Niddesa에서 악욕(惡欲: pāpicchatā)이라는 용어아래 언급된 어리석은 자는 믿음이 없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배움이 없고, 분별이 없고, 나태하고, 새김이 부족하고, 집중이 없고, 지혜가 부족하고 취기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금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여기 믿음이 있고, 계행을 지키고 배움이 많고 , 분별이 있고, 나태하지 않고, 새김이 확립되고, 집중이 있고, 지혜롭고, 취기있는 것에 취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라고 여기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면서 허구적인 특권을 원한다.

(739번 각주, 전재성님)

 

 

헛된 특권에 대하여 허구적인 특권이라 하였다. 여기서 특권이라는 말은 bhāvana의 번역이다. bhāvana‘Consideration, reputation’의 뜻으로 평판의 뜻이 있다.  Bhāvanamiccheyya는 잘못된 평판을 말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계행이 엉망인 자가 계행을 지키는 척 하며 존경받기를 원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계행뿐만 아니라 믿음, 분별, 나태하지 않음, 알아차림, 집중, 지혜로움, 취기에 취하지 않는 것도 해당된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행동하는 것이 다른 자를 말한다.

 

승려들은 공양받을 자격이 있는가?

 

한국불교는 모순투성이다. 스님이 불륜을 저질로도 처벌하지 않는다. 바라이죄를저지르면 목이 잘릴만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승단추방 (pārājika)이다. 살생이나 절도, 거짓말, 음행 등 오계를 어기는 자는 승단추방이라는 극형으로 처벌한다. 사회라면 사형에 해당된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이 절도를 하고, 표절을 하고, 음행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도박을 하고, 음주를 해도 승단추방을 당하지 않는다. 견책등 가벼운 처벌로 그친다. 그러면서도 삼보의 하나인 승보로서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수행자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누려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명예를 바라고 권력을 탐한다면 수행자라 볼 수 없다. 어리석은 수행자과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란다.

 

게송에서 수행승 가운데 존경을 바란다(purekkhārañca bhikkhusu)’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수행승들 가운데 추종자를 원한다라 하였다. 하나의 파벌을 형성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문중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어리석은 수행자는 처소에서 권위를 바란다(Āvāsesu ca issariya)라고 하였다. 여기서 권위라는 말은 issariya의 번역어이다. issariya‘Dominion, supremacy’의 뜻으로 지배를 뜻한다. 승단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벌을 형성하여 교단의 권력을 잡았을 때 이제 신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가정에서는 공양을 바란다.(pūjā parakulesu ca)’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나에게만 보시하지 다른 사람에게는 보시하지 말기를!”하며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pūjā라는 말이 있다. 이를 공양이라 번역하였다.

 

한국불교에서는 언행이 일치 되지 않는 승려들이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란다. 이런 승려들에게 재가불자들은 공양을 한다. 과연 승려들은 공양받을 자격이 있는가?

 

공양이란 무엇인가?

 

공양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뿌자(puja)’이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puja의 제1의 뜻은 ‘honour, respect, homage’ 이고, 2의 뜻은 ‘worship, devotional observances, devotional offerings; also offerings to monks.’으로 되어 있다. 뿌자의 뜻이 명예, 존경, 귀의의 뜻이 있고, 또 예배, 헌공, 승려에게 공양하는 것의 의미기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 기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마치 유일신교의 기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예로부터 불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는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 불공이라는 말의 유래는 뿌자에서 기원한다.

 

뿌자와 기도는 다른 말이다. 기도는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하여 바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뿌자는 예배하고 찬탄하고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기도는 초월적 존재와의 주종관계로서 일종의 계약관계이지만 뿌자는 헌공과 공양의 의미가 더 크다

 

뿌자에 대한 첫 번째 의미

 

뿌자에 대한 첫 번째 의미로서 ‘honour(영광), respect(존경), homage(경의)’가 있다. 이는 일반적 의미의 공양이라 볼 수 있다. 숫따니빠따 위대한 축복의 경(망갈라경,Sn2.4)’의 한 게송을 예로 들 수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sevanā ca bālāna               아세와나 짜 발라낭

paṇḍitānañca sevanā,             빤디따난짜 세와나
P
ūjā ca pūjanīyāna              뿌자 짜 뿌자니야낭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세존]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에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59)

 

 

게송에서 뿌자와 관련된 구절은 “Pūjā ca pūjanīyāna이다. 전재성님은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니라 번역하였다. 여기서 뿌자는 존경(respect)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어른을 공경하는 등 일반적으로 의미에서 공양은 존경을 의미한다.

 

뿌자에 대한 두 번째 의미

 

뿌자에 대한 두 번째 의미는 ‘worship, devotional observances, devotional offerings; also offerings to monks.’의 뜻이다. 이는 부처님에 대한 공양이다. 불공을 말한다.

 

불공과 관련하여 PCED194에서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을 예로 들고있다. 관련 구절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Na kho, ānanda, ettāvatā tathāgato sakkato vā hoti garukato vā mānito vā pūjito vā apacito vā. Yo kho, ānanda, bhikkhu vā bhikkhunī vā upāsako vā upāsikā vā dhammānudhammappaipanno viharati sāmīcippaipanno anudhammacārī, so tathāgata sakkaroti garu karoti māneti pūjeti apaciyati [ida pada sīsyāipotthakesu na dissati], paramāya pūjāya. Tasmātihānanda, dhammānudhammappaipannā viharissāma sāmīcippaipannā anudhammacārinoti. Evañhi vo, ānanda, sikkhitabba ’’ nti.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배받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

 

(Mahāparinibbānasutta-마하빠리닙바나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러한 것으로 존경 등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러한 것이란 무엇일까? 이는 바로 이전 구문을 말한다. 이전 구문을 보면 때 아닌 살라쌍수 꽃이 핀 이야기가 나온다. 경에 따르면 그 꽃들은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해 부처님의 몸에 쏟아지고 떨어지고 흩날렸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존경(Sakkato), 존중(Garukato), 경배(Mānito), 예경(Pūjito), 숭배(Apacito) 이렇게 다섯 가지 용어를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꽃을 바치고 꽃을 뿌리는 것 등을 공양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것이 공양이 아니라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공양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이라 하였다.

 

여기서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이라는 말은 ‘dhammānudhammappaipannā의 번역어이다. 이는 주석에 따르면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라 하였다. 이는 구출세간간법이라 한다. 또는 구차제정이라 한다. 또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라 하였다. 여기서 최상의 공양이라는 말은 ‘paramāya pūjāya’의 번역어이다. Paramāsuperior; best; excellent의 뜻이고, pūjā‘worship, devotional observances, devotional offerings; also offerings to monks.’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양의 두 번째 의미는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불공이다.

 

최상의 공양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불자들이 공양한다는 것은 부처님에게 예경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불공이라 한다. 그렇다면 최상의 공양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paramāya pūjāya: Smv.579에 따르면, 그 자양을 여읜 공양(nirāmisapūjā)이 나의 가르침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사부대중이 그 공양으로 나를 공양하는 한, 나의 가르침으로 천공에 있는 보름달처럼 빛나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 1176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뿌자에 대하여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야 오랫동안 가르침이 유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양을 여읜 공양(nirāmisapūjā)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이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는 “There are two kinds of worship: in a material way (āmisa-pūjā) and through (practice of) the Dhamma (dhamma-pūjā). The worship through (practice of) the Dhamma is the better of the two" (A. II)”라 설명되어 있다. 공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물질적 공양과 가르침의 실천 하는 것이라 하였다. 더 구체적인 내용은 앙굿따라니까야 ‘A.I,93’에 실려 있다. 열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Dvemā, bhikkhave, pūjā. Katamā dve? Āmisapūjā ca dhammapūjā ca. Imā kho bhikkhave, dve pūjā. Etadagga, bhikkhave, imāsa dvinna pūjāna yadida dhammapūjā” 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예배가 있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물질적 예배와 정신적 예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예배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정신적 예배가 더 수승하다.

 

(pūjāsutta-예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2.15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두 가지 뿌자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물질적인 것은 아미사뿌자를 말하고, 정신적인 것은 담마뿌자를 말한다. 그런데 담마뿌자가 더 수승(Etadagga)하다고 하였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보시에 대해서도 정신적 보시가 더 수승하다고 하였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보시가 있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물질적 보시와 정신적 보시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보시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정신적 보시가 더 수승하다.(A2.144)”라는 구절에서 일 수 있다.

 

여기서 정신적 보시는 담마다나(dhammadāna)를 말한다. 한자어로 법보시(法布施)’라 한다. 금강경에서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보시하여도 사구게 등을 타인에게 설해준 공덕이 더 크다고 하였는데, 이는 재보시보다 법보시가 중요함을 말한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에서도 법보시가 재보시보다 더 수승하다는 말이 나온다. 마치 금강경의 오리지널 버전을 보는 듯 하다.

 

 

부처님은 뿌자를 할 때 물질적 뿌자보다 담마뿌자가 더 수승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를 말한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지향하는 삶이다. 그러나 법구경에서 어리석은 수행자는 다른 사람의 가정에 가서 음식, 의복 등 네 가지 필수품을 존경의 마음으로 보시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수행자는 언행이 일치 되지 않는 자로서 공양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

 

절에 가서 밥을 먹는 것도 공양이고 스님에게 물질적으로 보시하는 것도 공양이라 한다. 물론 불전함에 돈을 넣는다거나 불단에 공양물을 올려 놓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공양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공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향사과와 열반을 실천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진정한 공양은 명백하다. 물질적 공양도 아니라 정신적 공양이다. 빠알리어로 담마뿌자이다. 법공양을 말한다. 보시에도 물질적 보시 보다 법보시(담마다나)가 더 수승하듯이, 물질적 공양보다 정신적 공양(담마뿌자)이 더 수승하다. 이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D16)”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불자들은 기도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 절에서도 거리낌 없이 기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시불공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사시기도라 하고, 초하루 불공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초하루기도라 한다. 기도라는 말은 불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유일신교에서는 초월적 존재에게 믿고 의지하며 은총을 바라는 것으로서 유신론적이다. 아마 불자들은 불보살의 가피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라 본다. 이렇게 본다면 불보살과의 계약관계가 성립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공양물을 올리는 대신 대가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에게 기도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두 그루의 사라쌍수에서 아름다운 꽃이 뿌려지는 것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배받는 것이 아니다.(D16)”라고 물질적으로 공양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불공, 담마뿌자이다.

 

 

2015-06-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