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모든 번뇌의 근원 유신견(有身見)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18. 19:39

 

모든 번뇌의 근원 유신견(有身見)

 

 

 

 

 

불자들은 거창한 서원을 한다. 법회가 끝나면 산회가를 하기 전에 사홍서원을 한다. 사홍서원 네 가지 중에 두 번째에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가 있다. 천수경에서는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라 하여 끝없는 번뇌를 다 끊겠습니다라 번역된다. 여기서 번뇌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흔히 번뇌망상이라 한다. 번뇌와 망상은 함께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번뇌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이라 되어 있다. 망상의 의미는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을 함이라 되어 있다. 유사한 것 같지만 서로 다른 말이다. 번뇌는 괴로움에 방점이 찍혀 있고, 망상은 헛된 생각을 의미한다.

 

사홍서원에서 번뇌무진서원단 하였을 때 그 번뇌는 다름 아닌 괴로움이다. 괴로움을 알아서 소멸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듯이 번뇌의 소멸 역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번뇌를 소멸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이 바로 그것이다.

 

일곱종류 번뇌의 끊어짐이 있는데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사성제를 알아야 한다. 초전법륜경에서 사성제에 대해 언급되어 있듯이 모든 번뇌의 경에서는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에서부터 해결 방법까지 제시 되어 있다. 모두 일곱 가지이다. 먼저 경에서는 일곱가지 번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 하고 있다.

 

 

Atth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savarā pahātabbā, atthi āsavā paisev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adhivās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parivajj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vinod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bhāvanā pahātabbā.

 

수행승들이여,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수호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수용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인내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피함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제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수행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

 

(Sabbāsavasutta-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일곱가지 항목을 보면 관찰(dassanā), 수호(pahātabbā), 수용(paisevanā), 인내 (adhivāsanā), 피함(parivajjanā), 제거(vinodanā), 수행(bhāvanā)이다. 이 용어에 대하여 초불연과 MDB를 참고 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빠알리어

성전협

초불연

MDB

1

dassanā

관찰

seeing

2

pahātabbā

수호

단속

restraining

3

paisevanā

수용

수용

using

4

adhivāsanā

인내

감내

enduring

5

parivajjanā

피함

피함

avoiding

6

vinodanā

제거

버림

removing

7

bhāvanā

수행

수행

developing

 

 

 

용어를 보면 수용과 피함과 수행만 공통적일 뿐 다른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의미는 별 차이가 없다.

 

관찰에 의해서 사라지는 번뇌의 핵심 내용은

 

경에서는 관찰에 의해서 사라지는 번뇌에 대한 내용이 길게 설명되어 있다. 다른 항목과 비교하여 거의 네 배 정도 긴 길이로 설명 되어 있어서 사실상 모든 번뇌의 경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관찰에 의해서 사라지는 번뇌의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론부에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Tassa eva yoniso manasikaroto tīi sayojanāni pahīyanti –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 Ime vuccant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이와 같이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임으로써 세 가지 결박, 개체가 있다는 견해,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관찰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라 한다.

 

(Sabbāsavasutta-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의 핵심은 세 가지이다. 그것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 (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 (sīlabbataparāmāsa)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한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개체가 있다는 견해, 유신견(有身見)’이 모든 번뇌의 근원중의 근원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유신견이란 무엇일까?

 

유신견이란 무엇인가?

 

유신견은 한마디로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무아를 설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드시 제거 되어야 할 삿된 견해에 해당된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첫 번째 조건으로서 유신견타파가 이루어져야 한다. 유신견이 타파되지 않는다면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을 뿐더러 부처님의 가르침도 실현될 수 없다. 그래서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족쇄 중에서 가장 먼저 타파 되어야 할 것이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을 부수어야 한다.

 

유신견은 빠알리어로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라 한다. 이는 ‘sakkāya+diṭṭhi’의 결합어이다. Sakkāya‘the existing body’의 뜻으로 有身, 常住身, 已存在的身体의 의미이다. diṭṭhi‘dogma; theory; belief’의 뜻으로 , 見解라 읽는다. 따라서 sakkāyadiṭṭhi는 불멸하는 영혼이나 인격 주체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를 말한다. MDB에서 빅쿠보디와 빅쿠 냐나몰리는 ‘personality view’ 로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존재더미가 있다는 견해로 번역하였다.

 

유신견에 대한 정형구

 

초기경전에서 유신견에 대한 정형구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 경(M44)에 따르면 재가신도 비사카의 물음에 빅쿠니 담마딘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rūpa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 vā attāna, attani vā rūpa, rūpasmi vā attāna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Cūavedallasutta- 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님역)

 

 

오온에서 있어서 물질(rūpa)을 예로 들었다. 경에서는 물질 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정형구를 보면 오온(五蘊)이 바로 자아라는 생각, 오온안에 자아가 들어 있다는 생각,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는 생각, 자아가 오온의 주관자란 생각으로 정리 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오온을 자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오온에 자아, 즉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주석(Pps.II.360)에서는 비유로서 설명하고 있다. 옮겨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물질(오온)을 자아로 생각

불타는 등잔의 불꽃이 불꽃의 색깔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물질(오온)을 자아로 여긴다.

 

2) 물질(오온)을 가진 것을 자아로 생각

나무가 그림자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자아가 물질(오온)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긴다.

 

3) 자아 가운데 물질(오온)이 있다고 생각

향기가 꽃속에 있는 것처럼 물질(오온)이 자아 안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4) 물질(오온)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생각

보석이 상자 안에 있는 것처럼 자아가 물질(오온) 안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와 같이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배우지 못한 범부라 하였다. 반면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잘 배운 고귀한 제자라 하였다.

 

유신견은 성자와 범부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된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으면 제 아무리 학식이 높고 수행을 많이 하였어도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힌두교에서 합일의 경지에 이른 성자라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성자의 초보단계인 수다원에도 들지 못한 것이 된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선정수행을 하여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 복과 수명을 누려도 윤회할 수밖에 없는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탐진치라는 족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신견에서 벗어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질과 정신을 아는 지혜

 

유신견은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동일시 하면 몸도 느낌도 지각도 모든 것을 나의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수행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실제로 수행자가 처음 수행을 시작하면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물질적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 현상을 거의 구별하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이런 물질과 정신적인 현상이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점차 집중력이 강화되면 몸과 마음을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 정신과 물질이 섞이지 않고 분리되어 보입니다.

 

그때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만 있지, 그 안에 ‘나’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으며 오직 물질적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라는, 두 가지 요소만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 2)

 

 

물질과 정신을 아는 지혜에 대한 설명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 가장 첫 번째 단계의 지혜가 바로 물질과 정신을 아는 지혜이다. 이 지혜를 알면 나라는 변치 않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행을 하면 오로지 물질과 정신 두 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대상을 접촉함에 따라 마음에 따른다. 경행을 하였을 때 발바닥의 촉감으로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것을 알아 차렸을 때 거기에는 오로지 물질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어떤 변치 않는 자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마나시까라(manasikara)에 대하여

 

관찰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의 핵심은 유신견타파이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모든 번뇌의 경에서는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ye dhammā na manasikaraīyā, te dhamme manasi karoti)”로 표현 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쓸데 없는 곳에 마음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마음에 잡도리해야 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고라 하였다. MDB에서는 “he attends to those things unfit for attention”라 하였다. 여기서 핵심어는 마나시까라(manasikara)이다.

 

Manasikara에 대한 빠알리사전 PCED194를 보면 'attention', 'mental advertence', 'reflection'라 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주의라는 말이다. 한자어로는 作意, 思念, 注意라 한다. 전재성님은 정신활동을 기울임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마음에 잡도리함이라 하였다. MDB에서는 attention이라 하였다.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될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번뇌가 생겨 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라 하였다. 한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곳에 마음을 쏟는 것을 말한다. 그로 인하여 번뇌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들고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번뇌만 늘어난다. 하나의 갈애는 더 많은 갈애를 유발한다. 여기에는 끝이 없다. 이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빠지면 번뇌는 절대 소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번뇌가 더욱 더 커집니다. 한 번 감각적 쾌락의 유혹에 빠지면 계속해서 더 큰 감각적 쾌락을 요구하는 갈애가 생깁니다. 하나의 감각 대상을 가지면 더욱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납니다.”라 하였다. 하나의 갈애는 더 많은 갈애를 유발하고 여기에는 끝이 없음을 말한다.

 

감각적 쾌락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어떤 양상으로 발전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수행승들이여,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들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가 증가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의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존재의 번뇌가 증가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무명의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무명의 번뇌가 증가한다면, 그것들은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Sabbāsavasutta-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감각적 쾌락에 정신활동을 기울인 결과 존재에 대한 번뇌, 무명에 의한 번뇌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존재와 무명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해서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다 보면 번뇌만 야기 될 뿐이다. 더구나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 성장한다고 하였다. 그런 예로서 다음과 같은 15가지 의문을 들 수 있다.

 

 

 So eva ayoniso manasi karoti. ‘ahosi nu kho aha atītamaddhāna? Na nu kho ahosi atītamaddhāna? Ki nu kho ahosi atītamaddhāna? Katha nu kho ahosi atītamaddhāna? Ki hutvā ki ahosi nu kho aha atītamaddhāna? Bhavissāmi nu kho aha anāgatamaddhāna? Na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 Ki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 Katha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 Ki hutvā ki bhavissāmi nu kho aha anāgatamaddhāna’nti? Etarahi vā paccuppannamaddhāna [paccuppannamaddhāna ārabbha (syā.)] ajjhatta kathakathī hoti – ‘aha nu khosmi? No nu khosmi? Ki nu khosmi? Katha nu khosmi? Aya nu kho satto kuto āgato? So kuhi gāmī bhavissatī’ ti?

 

그는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1)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2)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3)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4)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5)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6)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7)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8)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9)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10)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11) 나는 있는가?

12) 나는 없는가?

13) 나는 무엇인가?

14) 나는 어떻게 있는가?

15)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Sabbāsavasutta-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15가지 의문사항을 보면 공통적으로 나(aha: )가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 된다. 이는 유신견이다.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M44)”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나를 찾으면 찾을수록 번뇌만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위 15가지 의문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아서 발생된 것이다. 나를 찾으면 찾을수록 번뇌만 증장됨을 말한다. 이렇게 쓸데 없는 곳에 정신을 기울이면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가 생겨난다고 하였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tthi me attā ’ ti vā assa [vāssa (sī. syā. pī.)]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 natthi me attā ’ 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 attanāva attāna sañjānāmī ’ 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 attanāva anattāna sañjānāmī ’ 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 anattanāva attāna sañjānāmī ’ 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atha vā panassa eva diṭṭhi hoti – ‘ yo me aya attā vado vedeyyo tatra tatra kalyāapāpakāna kammāna vipāka paisavedeti so kho pana me aya attā nicco dhuvo sassato avipariāmadhammo sassatisama tatheva hassatī ’ ti.

 

‘나의 자아는 있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이와 같이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견해가 생겨난다.

 

(Sabbāsavasutta-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여기서 나의 자아는 있다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여기서 있다(atthi: )’ 라거나 없다 (natthi: )’ 라는 말은 존재론에 기반하는 말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말이다. 현상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에 있다또는 없다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단멸론으로 오해 되기 쉬운 무아사상

 

경에서 ‘나의 자아는 없다(natthi me attā)’라 하여 허무주의적 견해를 취했을 때 이는 불교의 무아사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무아사상은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조건 발생하기 때문에 무아인 것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나가 없다라 하여 무아라 한다면 단멸론에 빠지지 쉽다.

 

단멸론에 대한 주석을 보면 개인을 신체와 일치시켜서 죽음을 넘어서는 개인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유물론적인 견해를 말한다.(52번 각주)”라 하였다. 몸과 마음을 상호의존하는 것으로 보아 몸이 무너지면 정신까지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이런 단멸론은 철저하게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불교의 무아사상은 단멸론으로 오해 받기 쉽다. 그것은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는 말로서도 나타난다. 이런 질문은 악취나는 것이다. 유아론을 가정하여 넌지시 떠보는 질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무아사상은 연기법에 기반하기 때문에 나의 자아는 있다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아뜨만을 부정한 부처님

 

경에서 여섯 번째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바라문교의 브라만교의 영원주의적 관점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로서의 자아는 능동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말하고, 느끼는 자아로서의 자아는 수동적 주체로서의 자아를 말한다. 여기저기라는 말은 전생하는 것을 말하며 자기동일성을 갖는 아뜨만이 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자기동일성을 갖는 자아, 즉 아뜨만을 부정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M38에서  사띠수행승이 의식이 윤회하는 것으로 자기 동일성을 갖는다.(M38)’라는 말을 부정하고 조건발생하는 의식이 윤회한다라고 설명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병주고 약주고

 

부처님은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곳에 정신을 기울이면 번뇌만 늘어 날뿐이라 하였다. 이는 나를 기반으로 하여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등의 15가지 의문이 모두 번뇌를 야기함을 말한다. 특히 나는 무엇인가?(Ki nu khosmi : What am I)”가 있다. 나는 어떻게 있는가?(Katha nu khosmi: How am I)” 라든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Aya nu kho satto kuto āgato? So kuhi gāmī bhavissatī :Where has this being come from? Where will it go)”가 있다. 이런 물음은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에서 의문 하였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힌두교에서도 이런 물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선불교에서도 이런 물음을 화두로 삼는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ye dhammā na manasikaraīyā, te dhamme manasi karoti)”로 표현 된다. 그 결과 아직 생겨 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쉽게 말해서 긁어서 부스럼이고 또 다른 말로 병주고 약주고라 말할 수 있다.

 

정신활동을 기울어야 할 곳은?

 

누구나 한번쯤 나는 누구인가라 고민 하였을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며 숙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은 이런 의문에 대하여 쓸데 없는 것에 신경쓰는 것과 같다고 하였고, 심지어 없는 번뇌까지 새로 생겨나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번뇌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그것은 정신활동을 기울어야 할 곳에 정신을 기울이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o ‘ ida dukkha ’ nti yoniso manasi karoti, ‘ aya dukkhasamudayo ’ ti yoniso manasi karoti, ‘ aya dukkhanirodho ’ ti yoniso manasi karoti, ‘ aya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 ti yoniso manasi karoti. Tassa eva yoniso manasikaroto tīi sayojanāni pahīyanti –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 Ime vuccant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그는 이와 같이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이와 같이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임으로써 세 가지의 결박, 개체가 있다는 견해,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린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관찰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라고 한다.

 

(Sabbāsavasutta-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이다. 사성제를 안다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괴로움은 번뇌와 동의어 이므로 사성제를 안다는 것은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 즉 고성제는 무상. . 무아를 알게 합니다. 이렇게 아는 순간에는 갈애와 집착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납니다.”라 하였다.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만 있어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성제를 알면 동시에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알게 된다고 하였다.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성제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을 참고 하면 다음과 같다.

 

 

Pps.I.72에 따르면, 흐름에 드는 길을 성취할 때 까지 정신활동은 통찰이지만 길에 들어 서는 순간에 그것은 길에 대한 지혜가 된다. 통찰은 직접적으로 첫 두 진리[고제와 집제]를 감각한다. 왜냐하면 그 대상적인 범주가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에 지배되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머지 두 가지 진리에 대해서는 오로지 추론을 통해서 파악한다. 올바른 길에 대한 길의 진리[도제]를 꿰뚫음을 통해 이해하고 소멸의 진리[멸제]를 그 목표로 한다. 길에 대한 앎은 네 가지 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작용을 일으킨다. 괴로움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게 하고 괴로움의 발생을 버리게 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이루게 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계발시킨다.

 

(53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을 보면 고성제와 집성제에 대해서 아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흐름의 길에 들어서기 까지의 정신활동이라 하였다. 또한 고성제와 집성제의 대상의 범주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아닌 존재론을 말한다. 그런데 멸성제와 도성제는 오로지 추론을 통해서 파악 될 뿐이라 하였다. 이는 인식론이라 볼 수 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임을 말한다.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다. 존재에서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않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을 벗어 나기 위해서는 지혜가 개발 되어야 한다. 그런 지혜는 존재론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앎과 봄에 따른 인식론에 바탕을 둔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인가?(Ki nu khosmi)”가 라든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Aya nu kho satto kuto āgato? So kuhi gāmī bhavissatī)”라고 의문 하며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 나가 있다고 보는 유아론적 관점은 존재론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존재론에 근거 하는 한 불교적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표로 요약하면

 

모든 번뇌의 경에는 관찰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 뿐만 아니라 모두 일곱 가지 번뇌를 끊는 방법이 소개 되어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임으로써 세 가지의 결박, 개체가 있다는 견해,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린다.

사성제의 진리에 정신활동을 기울임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수호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āsavā savarā pahātabbā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시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한다. 수행승들이여, 시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시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여섯 가지 감각능력 수호

(시각,청각,

후각, 미각, 능력, 정신)

 

수용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āsavā paisevanā pahātabbā

“(네 가지 필수품을) 수용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가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수용하면 곤혹과 고뇌가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다.

사대필수품 수용 (의복, 음식, 처소, 필수약품)

인내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āsavā adhivāsanā pahātabbā

인내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인내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신체의 괴로움을 인내함

(추위나 더위, 굶주림과 목마름, 등에, 모기, 바람, 열기, 뱀과의 접촉, 악의적 으로 표현된 말, 괴롭고 아프고 저리고 찌르고 불쾌하고 치명적인 신체적 느낌이 생겨난 것을  참아내는 것)

피함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āsavā parivajjanā pahātabbā

피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피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적당하지 않은 자리, 적당하지 않은 장소, 악한 친구를 피함

 

제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āsavā vinodanā pahātabbā

제거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제거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팔정도에서 정사유실천

(욕망과 분노와 폭력의 사유를 제거)

 

수행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āsavā bhāvanā pahātabbā

수행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수행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칠각지 수행

(새김, 탐구, 정진, 희열, 안온, 집중, 평정)

 

 

 

 

모든 번뇌의 경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관찰에 의해 끊어져야 하는 번뇌(āsavā dassanā pahātabbā)’ 이다. 이는 정신활동을 어디에 기울어야 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나는 무엇인가?’ 15가지 사항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것은 바른 정신활동일 갖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오히려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 하였다. 바른 정신활동을 기울어야 할 것은 사성제의 진리를 통찰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다.

 

모든 번뇌의 근원 유신견(有身見)

 

말룽끼야뿟따는 이 세상은 유한한가?’등으로 부처님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지금 당면한 괴로움의 해결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사성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번뇌의 경에서도 나는 누구인가?’라며 존재론적 접근방식은 번뇌만 야기할 것이라 하였다. 그 대신 사성제를 설하였다.

 

부처님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었을 때 유신견과 가르침에 대한 의심과 규범과 집착에 대한 집착이 끊어진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었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개체가 있다는 견해, 유신견(有身見)’이 모든 번뇌의 근원중의 근원이라 볼 수 있다. 유신견 타파야말로 모든 번뇌의 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볼 수 있다.

 

 

Yo nājjhagamā bhavesu sāra

vicīna pupphamīva udumbaresu,
So bhikkhu jah
āti orapāra

urago jiṇṇamiva taca purāa.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stn5)

 

 

 

2015-06-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