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타인의 업(業)

담마다사 이병욱 2015. 8. 12. 11:59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타인의 업()

 

 

 

 

 

 

흔히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한다.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받는다.’는 뜻이다. 이를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도 한다. 물론 여기서 나를 뜻하는 자신이라는 말은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일반사람들이 의례히 내가~”라고 말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나는 말한다.’고 하든가‘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S1.25) 하였다. 여기서 자업자득이라 하였을 때 이는 업보만 있고 작자는 없다.”라는 말과 같다.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금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다. 지금 죽은 사람이 있다. 그때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과보에 개입할 수 없다. 선한 것이든 불선한 것이든 자신이 지은 것은 자신이 받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도 개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인터넷카페에서 묻고 답하기를 보았다. 어느 질문에 대하여 M법사는 이렇게 코멘트를 달았다.

 

 

미운 사람이 있을 때나 아들 때문에 슬플 때는 먼저 각자가 받는 업의 과보로 생각하십시오.

 

상대의 업의 과보는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은 단지 상대의 업의 과보를 지켜보고 자애와 연민을 보내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는 비켜갈 수 없습니다. 받아야 할 것은 당연히 받는 것이 사물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M법사)

 

 

어찌 보면 상당히 냉정한 답변이라 볼 수 있다.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내가 개입하여 어찌해 보고 싶으나 실제로 바꿀 수 없음을 말한다. 지금 받고 있는 과보는 단지 그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 보자고 한다.

 

타인의 업에 개입하였을 때

 

만일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내가 개입하여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 악행을 저질러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처해 있는 자를 천상으로 끌어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전지전능한 자라면 선과보에도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선행을 하여 천상과도 같은 행복을 누리는 자의 업보에 개입하여 내가 차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타인의 불행이나 성공에 대하여 내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만일 개입하여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뒤죽박죽 되어 버릴 것이다. 업보에는 악과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보도 있기 때문에 내가 개입 하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것이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 볼 뿐 그 사람의 업에 개입하여 바꿀 수 없다. 타인의 성공과 번영에 대해서는 축하하며 함께 기뻐할 뿐  내것으로 만들 수 없다. 자업자득이고 자작자수이다. 그래서 받아야 할 것은 당연히 받는 것이 사물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라 했을 것이다.

 

자심해탈(慈心解脫)

 

부처님 가르침에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있다.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을 말한다. 모두 업()과 관련이 있다. 타인의 불선과보에 대해서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함을 말한다. 타인의 선과보에 대해서는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또 불선과보이든 선과보이든 모두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 하는 것이다.

 

사무량심은 기본적으로 닦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타인의 업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업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자애의 마음을 내었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요해진다. 자애를 방사 한다고 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자애의 마음을 내어 고요 해졌을 때 이를 자심해탈(慈心解脫),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 한다.

 

불교의 목적이 열반의 성취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청정에 이르는 길 중의 하나가 사무량심을 닦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무량심을 닦는 근본목적은 해탈하기 위해서이다.

 

자애공덕의 과보

 

초기경에 따르면 자애공덕은 그 어떤 공덕 보다 더 수승하다고 하였다. 이띠붓따까(여시어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다시 태어날 근거가 되는 공덕을 만드는 토대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 모든 것은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의 십육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It19)”라 하였다. 어떤 공덕행 보다 가장 스승한 것이 자애를 닦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별빛에 대한 달빛으로 비유하였다. 그렇다면 자애공덕은 어느 정도일까? 초기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았는데,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고 나서 일곱 파괴의 겁과 생성의 겁 기간 동안 이 세계에 돌아 오지 않았다.”(A7.62)

 

 

부처님은 과거 성불하기 전에 자애를 닦았다. 그 공덕에 대한 과보로서 천상에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천상은 무너지지 않는 곳이다. 겁화가 일어나 주기적으로 우주가 파괴 되어도 안전한 곳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곳에 대하여 경에서는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極光天)’이라 하였다.

 

극광천은 천상도표에 따르면 색계 이선의 첫번째 천상인 아밧사라(ābhassar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애를 닦으면 우주의 성주괴공에서 벗어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우주가 형성되는 성겁의 시기가 되면 우주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우주가 파괴될 때는 나는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 있었고, 우주가 생성될 때에는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났다.(A7.62)”라 하였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일겁 단위로 주기적으로 파괴 되고 또 생성된다. 일겁단위로 성주괴공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치성하였을 때라 하였다. 탐욕이 치성하면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즉 색계 2선천의 광음천은 괴겁으로부터 안전한 것이다. 이렇게 자애를 닦으면 괴겁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성겁의 시기에는 우주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우주가 생겨날 때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난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디가니까야 하느님의 그물의 경(D1)’ 주석에 따르면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대하여 원래 태어난 존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하느님의 궁전이다.”라 하였다. 또 주석에서는 하느님(Brahma)의 무리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Brahmakayika:  梵身天)의 땅에 태어난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를 만드는 자도 없고 만들게 하는 자도 없다는 사실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업연과 시절의 인연에 의해서 보물의 땅이 생겨난다.”(Vism421)라 하였다.

 

자애를 닦으면 그 공덕으로 괴겁을 피해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겁에는 우주의 주재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거기서 나는 일곱번이나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였다.”(A7.62) 라 하였다. 요즘 유일신교의 하느님 또는 하나님, 알라와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최고신 브라흐마(梵天)을 일컫는 말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그 공덕은 상상을 초월한다. 여기서 공덕이라는 말은 행복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공덕을 짓는 것은 바로 행복을 지칭하는 것이다.”(A7.62) 라 하였다. 어느 정도의 행복인가? 경에 따르면 일곱번이나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수백번이나 전륜성왕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자애공덕의 과보는 매우 크다.

 

이와 같은 같은 자애 사상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이를 불교에 도입하여 적극 활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진정한 권력자는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런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한마디로 그들만의 사랑이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말한다. 피조물에 대한 청조주의 사랑이다. 그런데 모든 유일신교에서는 이와 같은 일방적 사랑이 엿 보인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 역시 유일신교나 다름 없었다. 초기경에 따르면 브라흐마(梵天)는 이 세상의 근원이자 창조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자애를 닦으면 하느님(Brahma)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주의 사랑을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자애라는 말은 창조주와도 매우 관련이 깊은 말이다. 그런데 초기경에서는 자애를 설명할 때 어머니의 사랑을 예로 들었다.

 

숫따니빠따 자애의 경(Sn1.8)’을 보면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Mātā yathā niya putta āyusā ekaputtam anurakkhe)(Stn149) 이라는 구절이 있다.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라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구체적 실천론으로서 어머니의 사랑을 들고 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을 베풀고 나서 일기장에 오늘 내가 착한 일 했다.”라고 적어 놓을까? 타인이 아이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면 그렇게 써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부모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식에게 헌신한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자애이다. 이를 확대하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사랑 역시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권력의 행사는 자애이다. 작은 권력자는 분노로서 권위를 나타내려 한다. 하지만 큰 권력자는 자애의 마음을 내는 자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진정한 권력자는 자애의 마음을 내는 자이다.

 

사무량심을 닦는 목적은

 

어느 누구도 타인의 업에 개입할 수 없다. 지금 불행에 처한 자의 업에 내가 뛰어 들어 운명을 바꾸어 줄 수 없다. 지금 성공과 번영을 누리는 자의 업에 개입하여 내것으로 가로챌 수 없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 보아야 한다. 타인의 번영과 성공에 대해서는 축하와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한다. 인생의 파란곡절을 겪을 때는 모두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임을 반조하여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사무량심은 자신의 마음을 닦아 해탈하기 위한 수단이다.

 

 

2015-08-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