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바쁘다는 핑계로
늘 바쁘다는데
세간에서 말하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그것은 장사꾼이 ‘믿지고 판다’는 말이고, 노인이 ‘어서 죽어야지’라는 말이고, 노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공인된 거짓말 외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바쁘다’라는 말이다.
모두 바쁘게 살아간다. 늘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초분을 다툰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게으른 것은 죄악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고 게으른 자가 한 없이 게으른 것은 아니다. 밥은 제 때에 찾아 먹기 때문이다.
광속으로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 ‘바쁘다’라는 한 마디면 용서가 되는 것 같다. 집에 늦게 들어가면 ‘일이 바빠서’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부모댁에 자주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일이 바쁘다’라는 말 한마디면 만사형통이다. 친구와의 약속시간에 늦어도 ‘일이 바빠서’라고 말하면 오케이(OK)이다. 그렇다면 정말 늘 바쁘기만 한 것일까?
바쁜 사람은 늘 일 핑계를 댄다. ‘일이 많아서’ 또는 ‘야근이 있어서’ ‘주말작업이 있어서’ 라는 등의 말을 한다. 그러다 보니 모임에 나가는 경우도 드물다. 중요한 모임이건 사소한 모임이건 시간 빼앗기는 모임에는 나가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사람들은 ‘이기적’이라 볼 수 있다.
늘 바쁘다면 밥 먹을 시간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숨을 쉬며 산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졸리면 잠을 잔다. 그럼에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면 거짓말쟁이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3대 거짓말쟁이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바쁜자라 볼 수 있다. 장사꾼, 노인, 노처녀에 이어 바쁜자는 4대 거짓말쟁이 중의 하나에 속한다. 바쁘다고 하여 일년 내내 바쁠까?
아쉬울 때만 절에 가는 사람
부처님 당시에도 바쁜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다나 ‘재가신자의 경(Ud.13)’에 따르면 바쁜 재가신자가 있었다. 경에 따르면 “그 때 재가신자 잇차낭갈라까가 할 일이 있어 싸밧티 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재가신자는 어떤 할 일을 마치고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 왔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재가신자가 자기 중심주의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일을 먼저 처리하고 부처님을 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을 마치고 알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구는 보면 부처님이 “그대 재가신자는 여기에 법문을 들으로 온지 오래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재가신자는 자신이 필요로 할 때 사원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불자들 중에도 절에 필요할 때만 가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기도와 관련된 법회이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절을 찾는 것이다. 그 외에는 절을 찾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필요에 따라 절을 찾는 것은 아쉬워서 찾는 다고 볼 수 있다.
평소 모든 것이 평온하고 안락할 때는 절에 갈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에 우환이 생겼을 때 찾는다. 그래서 자녀의 중요한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사업과 관련된 입찰을 앞두고 있을 때, 건강을 잃어 치유목적으로 찾는다. 한마디로 아쉬울 때 찾는 것이다.
‘깨달음성취 등’도 달아야
아쉬울 때는 절을 찾고 평소에는 발길을 끊는 불자들이 많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오랜 만에 부처님을 찾은 재가신자 잇차낭갈라까에게 ‘법문을 들으로 온지 오래 되었다.’라고 한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절에 기도하러 간다. 그 기도는 사대기도로 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 학업, 사업, 치유에 대한 것이다. 절에 기도만 하러 다닌다면 이는 이기적 불자라 볼 수 있다.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위해서라면 타종교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아무리 용하기로서니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과 비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에 왜 가는가? 그것은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이다.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발원을 한다면 자신과 가족의 안위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발원을 해야 한다. 등을 달아도 ‘학업성취’등의 소원성취 등만 달 것이 아니라 ‘깨달음성취의 등’ 도 달아야 할 것이다.
매번 바쁜 사람
부처님은 재가신자 잇차낭갈라까에게 오랜 만에 온 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에 재가신자 잇차낭갈라까는 변명하듯이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러 오고자 했습니다만, 그때 그 때 마다 할 일로 바빴기 때문에, 이처럼 세존을 친견하러 오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바빠서 못 왔음을 말한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바쁘다’라는 말 한마디면 모두 용서가 되는 줄 아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이다. 모임에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 물어 보면 바쁘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번에도 역시 바빠서 못나온다고 한다. 또 그 다음 번에도 마찬가지이다.
매번 바쁘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와 다를 바 없다. 뻔히 누구나 아는 거짓말을 바쁘다는 핑계로 말하는 것이다. 대체 바쁘다면 얼마나 바쁜 것일까? 그렇게 바쁘다면 큰 부자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소유한 자들의 고통을 보라”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재가불자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감흥어를 읊는다.
Sukhaṃ vata tassa na hoti kiñci
Saṅkhātadhammassa bahussutassa,
Sakiñcanaṃ passa vihaññamānaṃ
Jano janasmiṃ paṭibaddharūpo
[세존]
“가르침을 헤아리고 많이 배운 자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행복이다.
무엇인가 소유한 자들의 고통을 보라.
사람이 실로 사람들에게 묶여 있는 것이다.”(Ud.1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행복이다. (Sukhaṃ vata tassa na hoti kiñci)’ 라고 하였다. 조금도 가짐이 없는 것이 행복임을 말한다. 이는 출세간적 말이다. 많이 듣고 많이 배운자에 해당된다. 그러나 범부들에게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래서 법문을 듣는 것 보다 그 시간에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처님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행복이라 하였다. 이는 무소유의 행복을 말한다. 반대로 소유하면 괴롭다는 것을 말한다. 재산을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그에 따라 근심도 늘어나고 식솔들이 늘어날수록 그에 비례하여 걱정도 많아 진다. 소유함으로 인하여 즐거움 보다 오히려 괴로움이 늘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한 자들의 고통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묶이고 물질에 묶여 있는 것’이라 하였다.
절이 교회보다 재정적으로 열악한 이유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성소에 자주 나오기를 바란다. 교회 같으면 매주 일요일마다 신자들로 북적인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2부 또는 3부 예배를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일요일만 나오게 하는 것은 아니다. 주중 평일에도 나오게 한다. 각종 명목의 기도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 나오게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수입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교회나 절에 갈 때 빈손으로 가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갈 때 마다 헌금을 하고 보시를 하기 마련이다. 일요일은 물로 평일에도 교회나 절에 간다면 비용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교회나 절에서 살다시피 한다면 자신의 수입에서 상당부분을 바쳐야 할 것이다.
불자들은 절에 자주 가지 않는다. 어쩌다 생각나면 가는 것이 맞을 것이다. 부처님오신날 이라든지 커다란 행사가 있을 때 이외에는 잘 찾지 않는다. 다만 자녀의 시험이나 사업상 입찰이 생겼을 때 찾는다. 평소에는 발길이 뜸하다가 아쉬울 때 찾는 것이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늘 열악하다.
목사들이 부러워 죽을 지경인 스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일요일에는 반드시 찾는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살다시피 한다. 그러다 보니 재정적으로 절살림은 교회살림과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은 교회의 재정상태와 신자들의 헌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러움을 표시 하였다.
불교 신자들은 부처님께....
바라는 것은 엄청 많으면서도.....
절의 재정에 도움이 되어야 겠다는 의식도 인식도..없이....
약고 약삭빠른 계산으로,
자신의 돈은 마치 살을 떼어 주듯이 아끼고, 뼈를 발라 주듯이 진저리를 침 아끼면서도,
그저 부처님께 은혜는 무한정 받을려 애쓰며,
스님들의 살림살이들에는 도통 관심도 가지지 않은채.
지혜 있는 이야기 들으려고만 애쓰며,
무언가 얻어 갈것이 없는지만 애쓰며,
더 안주는 것에 안타까움들만 가지는
몹쓸 성정들만 가지고 살아 가는듯 합니다.
참 교회 의 재정들이 너무나 부러울 지경입니다.
그들 신자들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참여가 너무나 부럽습니다.
.
.
아...그래도 .....기독교 신자들....부럽습니다.
목사들...부럽습니다.
(어느 스님의 글)
스님의 글에 따르면 목사를 부러워하고 있다. 이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고, 교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자들이 있기에 재정적으로 튼튼한 교회가 되었고 그런 목사들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라 한다.
어떻게 해야 절에 자주 나오게 할 수 있을까?
불자들은 어쩌다 한 번 생각날 때 절에 간다. 그러다 보니 절의 재정상태는 매우 열악할 수밖에 없다. 절에 자주 나와야 시주금액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에 자주 나오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법문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기도로는 한계가 있다. 아쉬울 때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그때뿐이다. 그러나 법문위주의 법회를 하면 고정적으로 꾸준히 나오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어떤 콘텐츠인가?
법사들이 마음만 먹으면 법문할 콘텐츠는 널려 있다. 그것은 초기경전 자체가 법문용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부처님의 8만 4천 법문이 모두 법문용 콘텐츠이다. 그래서 법문용 콘텐츠를 따로 개발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빠알리니까야 자체가 훌륭한 법문용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앙굿따라니까야는 법문의 보고
한국불교에서 일요법회하는 곳은 매우 드물다. 절에 신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일요법회가 없고, 또 한편으로 스님들이 적극성을 보이지 않아 열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가뭄에 콩나듯 일요법회가 열리는 곳이 있다. 그런 절에 가보면 고정적으로 나오는 신도들이 있다. 기도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법문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기도 보다 법문위주의 법회가 되어야 한다. 부처님도 법문으로 중생을 교화 하였다. 부처님이 마치 사제처럼 제사를 주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빠알리니까야에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앙굿따라니까야는 법문의 보고나 다름 없다.
앙굿따라니까야는 재가신도들에게 적합하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 가르침도 매우 많다. 더구나 모두 11개의 모음에 만 개에 육박하는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경을 평생 법문해도 다 못할 정도이다. 이 정도라면 콘텐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불자들은 가르침에 목말라 하고 있다. 밥을 먹어야 살듯이 가르침 역시 접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법문이 없다. 오로지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기도만 있을 뿐이다.
이제 한국불교도 바뀌어야 한다. 더 이상 ‘유일신교 따라하기’를 멈추고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법문 위주로 법회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감로수와 같은 법문을 해 주어야 한다.
2015-10-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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