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格)이 존중되어야
“강아지를 찾습니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이른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본 문구이다. 학의천 길에 붙어 있는 광고지를 보면 강아지 이름은 미뇽이고 나이는 6살, 성별은 암컷, 견종은 푸들이라 되어 있다. 강아지를 잃어 버린 사람의 절절함을 알 듯 하다.
광고지에는 강아지를 잃어 버린 사연도 적혀 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 놓았는데 그 사이에 빠져 나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락처가 적혀 있고 연락주면 후사하겠다고 적혀 있다.
강아지를 잃어 버린 사람에게는 마치 가족을 잃어 버린 것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아이를 잃어 버려 애타게 찾아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강아지 역시 그 정도의 중요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광고지에는 “동생 같은 아이 입니다.”라고 하였다.
요즘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개의 경우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주인을 알아 보며 말을 잘 듣는 것이 말 안 듣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가족처럼 키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정도 되면 ‘견격(犬格)’이 존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는 인격(人格)이 있다. 나라에는 국격(國格)이 있다. 이렇게 격이 있다는 것은 ‘존중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물건에도 격이 있어서 품격(品格)이 있다면 가치를 더 쳐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에게도 격이 있을 수 있다. 마치 강아지를 가족처럼 대한 다면 ‘견격(犬格)’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견격만 존중되어야 할까? 돼지나 소, 그리고 닭은 격이 없는 것일까?
야채가 풍부한 카페테리아
매일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천원 하는 대중식당에서 먹는 밥은 먹을 만하다. 무엇보다 야채가 풍부해서 좋다. 부페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 저것 먹는 재미로 즐겨 찾는다. 그런데 한꺼번에 수 백명이 식사하는 카페테리아에서 고기가 매끼마다 빠지지 않는다. 그 중에 단골 메뉴는 단연 닭고기와 돼지고기이다.
사람들의 식판을 보았다. 주로 빌딩에 입주해 있는 회사직원들이나 싼 맛에 찾는 근처 사람들이 먹는 식판을 보면 고기로 가득하다. 국이 있어야 할 위치에 닭고기 조림이 듬뿍 담겨 있다. 돼지고기가 나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보니 고기가 끊이지 않는다.
식당 주인에 따르면 고기를 반드시 올려 놓아야 한다고 한다. 고기가 없으면 불만을 토로하고 손님이 빠져 나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닭고기는 거의 하루 걸러 나오는 듯 하다. 그 많은 닭고기는 다 어디서 났을까?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 돼지고기가 나오는 날 역시 아주 조금만 먹는다. 고기를 먹다 보면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신 닭고기 주변에 있는 감자나 당근 등을 취한다. 그래서 식판을 보면 야채를 비롯한 식물성으로 그득하다.
어떤 이는 닭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닭고기는 먹지 않지만 돼지고기는 먹는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생선만 허용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생선마저 거부 하는 채식을 하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어떻게 육식이 공급되는지를 알면 못 먹는다는 사실이다.
먹는 것을 낙으로 사는 사람들
사람은 먹어야 산다.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버텨 나지 못한다. 매일 세 끼를 먹어야 그 힘으로 일도 하고 삶을 영위한다. 그렇다고 많이 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맛집만 순례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잘 먹으면 건강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예술품 같은 식사를 한 자들이나 육류를 즐겨 먹는 사람들 중에 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잘 먹는 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먹는 것을 낙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 일과 중에 먹는 것이 가장 큰 행사인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식사가 가장 중요한 일과인 것이다. 그런 식사 중에는 음주행위도 포함된다.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거의 소주 한병 이상 비워내는 사람이라면 사실상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마치 동물과도 같은 사람들이다.
하루 종일 먹다 보면
아침시간에 TV를 보았다. 채널을 돌리자 공중파방송에서 동물의 왕국 류의 자연다큐를 방영하였다. 영국 BBC에서 만든 프로이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살아 가는 초식동물에 대한 이야기에서 전에 듣지 못하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과 서너 줄 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문구를 스마트폰에 기록하였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코끼리나 기린, 누우, 영양 같은 초식동물들은 풀을 뜯어 먹고 산다. 그런데 다큐프로에 따르면 “초식동물들은 16시간을 먹어야 하니 다른 중요한 일을 못한다. 엄청난 풀을 먹어야 하니 소화기관이 커져서 덩치가 커졌다”라 하였다. 마치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동물들의 특징이다. 오로지 생존하고 번식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식도락가들은 먹는 것을 즐기고, 술꾼들은 음주를 즐긴다.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으로 날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상 축생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하지만, 먹기 위해서 산다면 전도된 삶의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먹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라면 동물들의 삶과 다를 바 없고, 오로지 번식을 위한 삶만을 살아 간다면 역시 동물의 삶과 다름 없다. 그런 동물의 삶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먹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번식하는 것이다. 식욕 성욕으로 사는 사람들 역시 동물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치킨지옥
오로지 먹기 위해서 살고 번식하기 위해서 살아서 일까 지구상의 인구가 크게 늘었다. 무려 70억명이 넘는 인류가 살고 있다. 70억명이 먹어 치우는 음식의 양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70억명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하여 자연과 환경의 훼손은 또 얼마나 심각할까? 무엇 보다 70억명이 먹는 것에는 닭이나 돼지나 소 등의 가축이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업화된 축사에서 마치 공장에서 물건 찍어 내듯이 생명이 죽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우리나라 치킨관련 업소가 3만 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수치는 전세계에 퍼져 있는 맥도날드 햄버가 체인점 보다 더 많다고 한다. 직장을 잃은 자영업자들이 너도 나도 치킨사업에 뛰어 들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하는데 생존율은 10여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많은 치킨은 다 어디서 났을까?
우리나라를 ‘치킨지옥’이라 한다. 일년에 소비 되는 닭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일령으로 따지는 닭의 생존기간은 불과 30여일 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대한민국은 닭들에게는 지옥이다. 또 한편 치킨을 업으로 하여 살아 가는 자영업자들 역시 지옥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치킨지옥의 나라에서 ‘계격(鷄格)’이 있을 수 없다.
격(格)이 존중되어야
닭에게만 ‘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돼지에게는 ‘돈격(豚格)’이 있을 것이고, 소에게는 ‘우격(牛格)’이 있을 것이다. 비록 닭이나 돼지, 소로 태어났지만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살코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먹는 것이 낙인 식도락가에게 토종닭은 어떻게 비추어질까? 아마 걸어 다니는 치킨으로 보일 것이다. 탐스럽게 모이를 헤쳐 먹고 있는 토종닭을 보면서 백숙이 연상된다면 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닭도 계격을 가진 생명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먹는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오로지 먹는 것이 낙인 사람들, 먹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은 아무 것이나 다 먹는다. 이른바 잡식성이다. 특히 동물질 단백질을 섭취하는 사람들은 그에 따라 욕망도 크다.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들은 체내에서 축적된 성분에 따라 동물적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오로지 식욕과 성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인간도 하나의 먹이의 대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특히 여자를 보는 눈이 그럴 것이다.
여자를 성적대상으로 보는 사람들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는 어떤 의미일까? 가족이라면 당연히 존중 받는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경우에는 성적 대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애욕에 불타는 사람에게는 성적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인간이 탐욕적으로 또는 동물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먹는 습관에서 찾을 수 있다. 아무 것이나 주어 먹는 잡식성 동물의 특징이 유감 없이 발휘 되는 것이다. 식욕이 강한 사람에게 토종닭이 백숙으로 보이듯이, 성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모든 여자가 성적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식욕과 성욕은 함께 한다.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강조하였다. 이는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괴로운 느낌이 적어지고”라는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틈만 나면 강조하는 것이 음식절제이다. 음식절제가 이루어 지지 않고 마구 먹으면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하였다.
되새김질 하는 수행승
우리사회는 먹고 즐기는 사회 풍토가 만연되어 있다. TV를 보면 어느 채널을 돌려도 ‘먹방’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게 만드는 먹방을 보면 등장하는 것은 고기이다. 닭, 돼지, 소, 어류 등 생류가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먹는 것을 즐긴다는 것은 욕망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동시에 생류의 격이 존중되지 않음을 말한다. 만일 인간이 동물이 되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를 말한다. 사람이 동물이 되기도 하고, 동물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런 윤회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불교인에게서 조차 볼 수 있다. 더구나 많이 배우고 공부하였다는 학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육도윤회를 말씀 하셨다.
동물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율장대품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수행승이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더구나 되새김질하여 먹기까지 하였다. 이를 본 다른 수행승들은 “때 아닌 때에 식사를 한다.”고 하며 매우 역겨워 하고 혐오 하였다.
되새김질 하는 수행승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율장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소의 모태에서 죽은 지 아직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았다. 되새김질하는 자의 돼새김을 허용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낸 후에 삼키지는 말아라.” (Vin.II.132) 라 하였다. 부처님은 돼새김을 허용하되 삼켜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율장의 내용을 보면 부처님은 윤회를 인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동물에서 사람으로 윤회한 것이다. 이와 같이 율장에 기록 되어 있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것 보다 믿어서 받아 들이는 것이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 그것은 믿지 않아서 잃는 것에 비하여 믿어서 얻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설령 부처님이 신화 같은 이야기를 할지라도 받아 들였을 때 얻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지혜롭게 만든다.
한 때 동물로서 삶이 있었는데
동물이 사람이 되는 것이 윤회이다. 또 사람이 동물 되는 것 역시 윤회이다. 이는 행위에 따른다. 누군가 동물의 행위를 하면 동물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알 수 있다.
윤회는 그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묶인 존재들은 한량 없는 세월동안 육도윤회 하며 살아 왔다. 때로 동물로 삶을 살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S15.13) 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우리들은 소 뿐만이 아니라 소, 양, 염소, 사슴, 닭, 돼지로 태어났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마다 목이 잘려 흘린 피의 양이 사대양의 물보다 많았을 것이라 한다.
지금 닭으로 태어나 태어난 지 30여일 만에 식도락가의 살코기가 되었다면 대단히 불행한 것이다. 이는 돼지나, 소 등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식도락가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살코기용으로 사육되는 것은 축생의 비참한 삶이다.
한번 낮은 지위로 떨어지면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람은 아니다. 사람 중에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많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계를 지키지 않아 목이 잘려 피를 흘린 사람도 많을 것이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 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S15.13) 라 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경에 따르면 “타인의 아내를 겁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는 오계를 지키지 않아 발생한 것이다.
오계를 지키지 않았을 때 목이 잘려 피가 한량없는 윤회에서 사대양 보다 많았을것이라 한다. 그런데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축생과 같은 악처에 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산 자들에게 축생과 같은 과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축생은 비참한 곳이다. 한번 축생으로 떨어지면 다시는 인간으로 올라 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를 ‘맹구우목(盲龜遇木)’으로 비유로 설명한다. 경에서는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를 던져 넣었는데 그때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M129) 라 하였다. 그때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물음이다. 거의 불가능함을 말한다.
약자가 먹히는 세계
한번 낮은 지위로 떨어지면 다시는 인간세계로 되돌아 오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한다. 이를 맹구우목의 비유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축생으로 떨어지면 왜 인간으로 돌아 오기 힘들까? 그것은 축생의 삶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 (aññamaññakhādikā ettha bhikkhave, vattati dubbalakhādikā.)”(M129) 라 하였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서로가 먹힌다(aññamaññakhādikā)’라 하였다. 이것은 전형적인 축생의 세계를 말한다. 또 다른 말로 먹이사슬의 세계이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고, 더 큰 물고기가 또 먹는 것처럼 먹이사슬도 되어 있는 것이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는 항상 먹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dubbalakhādikā’라 하였다. 이는 ‘dubbalakhādikā’가 ‘dubbala+khādikā’의 형태로서, dubbala가 ‘feeble; weak’의 뜻이고, khādikā는 khādi의 형태인데 이는 ‘ate; chewed; bit; gnashed’의 뜻이다. 따라서 ‘dubbalakhādikā’의 뜻은 ‘약자가 먹힌다’가 된다.
약자는 항상 먹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지구상에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라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먹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렇게 최상위 포식자를 위하여 요즘은 대량으로 사육된다. 이른바 공장식 축산이다.
오로지 인간의 살코기가 되기 위하여 사육되는 닭, 돼지, 소 등의 운명은 비참한것이다. 그런데 최상의 포식자로서 인간은 약육강식의 동물과 다름 없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세계
동물의 세계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약육강식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있는 실천이 없다. (Taṃ kissa hetu: na hetthe bhikkhave, atthi dhammacariyā samacariyā kusalakiriyā puññakiriyā,)”(M129) 라고 하였다. ‘법다운 실천(dhammacariyā)’ 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법이 무너진 사회를 말한다. 한마디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라 하였다. 이는 이띠붓따까 ‘밝은 원리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Dve me bhikkhave sukkā dhammā lokaṃ pālenti. Katame dve? Hiri ca ottappañ-ca. Ime kho bhikkhave dve sukkā dhammā lokaṃ na pāleyyuṃ,)” (It.36) 라 하였다.
부끄러움(hiri)과 창피함(ottappa)이 없는 사회는 어떤 것일까? 두 가지 원리가 세상을 수호 하지 않는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을 것” (It.36) 이라 하였다. 한마디로 동물 같은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It.36) 라 하였다.
식욕과 성욕으로 일평생 산 자들의 운명은?
축생의 세계는 약육강식이다. 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이 축생과 같은 삶을 산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행위에 의해서 브라만도 되고 도둑놈도 된다고 하였다. 동물의 행위를 하면 동물로 태어 나게 될 것이다. 육도윤회를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인간이 동물로 태어날 수 있는지 의문하게 될지 모르지만,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동물적 삶을 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동물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약육강식이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이다. 토종닭을 보면 먹을 것으로 보이고, 여인을 보면 성적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닭도 계격이 있어서 단지 먹는 것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여인도 인격이 있어서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 (S35.127) 라 하였듯이 가족처럼 여기는 존중의 대상이다.
오로지 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 자들의 운명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Sa kho so bhikkhave bālo idha pubbe rasādo idha pāpāni kammāni karitvā kāyassa bhedā parammaraṇā tesaṃ sattānaṃ sahavyataṃ upapajjati ye te sattā gūthabhakkhā.
“수행승들이여, 일찍이 여기서 맛을 탐하고 여기서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가운데 동료로서 태어난다.”(M129)
이는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축생에 대한 것이다. 축생들은 거의 하루 종일 먹기만 하기 때문이다. EBS에서 방영된 BBC다큐에서도 동물들은 하루 16시간을 먹는데 할애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소화기관이 발달하여 덩치가 엄청나게 커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먹기만 하고 먹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는 자는 축생으로 태어나게 될 것을 암시 하는 가르침이다.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축생보다 더 비참한 존재들이 있다. 경에 따르면 곤충, 구더기, 지렁이 등 이라 하였다. 물고기도 해당될 것이다. 초원에서 초식동물을 잡아 먹고 사는 포식자들도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어둠 속에서 태어나고 어둠속에서 자라고 어둠속에서 죽는 생물가운데 동료로서 태어난다.”(M129) 라 하였다. 이처럼 약육강식에 축생만 해당되는 것일까?
인간으로 태어 났지만 한평생 먹는 것만 탐내며 먹기 위해 산 자들이 있다. 또 오로지 번식을 위해서만 사는 자들이 있다.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식욕과 성욕으로만 일평생 살았을 때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육도윤회를 믿지 않다고 하더라도 악처에 날 것은 틀림 없다.
한번 타락한 곳에 떨어지면 인간의 지위를 얻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이를 맹구우목의 비유로 설명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약육강식의 동물과도 같은 삶을 강요하는 듯 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삶 자체가 동물의 삶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자원이 고갈되든 말든 오늘도 내일도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죽어야 하고, 상대방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미래를 위하여 노후를 위하여 축적하는 삶을 살다 보니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되었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동물과 다름 없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식욕과 성욕뿐이다. 더구나 매스콤에서는 매번 어느 채널을 돌려도 먹방이다.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등의 살코기를 입에 넣고 최고라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렇게 잘 먹고 나면 기운이 넘쳐 날 것이다. 넘쳐 나는 힘을 주체 하지 못해서일까 도시의 밤하늘에는 컬러풀한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이다.
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은 화려 하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한 없이 성장할 것 같이 보이던 경제가 저성장으로 들어 섰듯이 언젠가는 멈추고 말 것이다. 아니 추락할 일만 남았는지 모른다.
인간들의 욕심으로 만들어낸 주가가 어느 날 ‘시세분출’한 후 맥없이 고꾸라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마찬가지로 한없이 성장할 듯이 보였던 경제도 저성장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경제가 2% 이상이면 성장이라 하고 2% 이하면 저성장이라 한다. 하지만 미래는 저성장이 아니라 마이너스성장을 향하여 갈지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여념이 없다. 자연과 환경이 오염 되든 말든, 자원이 고갈되든 말든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잔칫날이고 파티날이다.
2015-10-16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0) | 2015.10.20 |
---|---|
늘 바쁘다는 핑계로 (0) | 2015.10.19 |
불자들에게 혼란만 야기하는 환공망상 (0) | 2015.10.13 |
나무새가 날 때까지, 글그림 작가 거람 김반석의 그림세계 (0) | 2015.10.08 |
명상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0) | 2015.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