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에게 혼란만 야기하는 환공망상
누구나 일상이 평온하고 안은 하기를 바란다. 인생의 파란곡절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은 돌아 간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는다. 괴롭다고 느껴질 때 이 세상을 멀리 하고 싶어진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저 세상을 생각하게 된다. 저 강 건너의 세상, 저 언덕 너머의 세상에는 고통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과학도 믿을 것이 못 된다
종교를 가지는 목적은 무엇일까?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이 편안하고 즐겁다면 굳이 종교에 의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과학이 발달한 물질문명의 지금 현재가 행복하면 굳이 굳이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언제나 행복할 수 없다. 조건이 바뀌면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더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종교에 의지 하게 된다.
과학의 시대에 종교에 의지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자연현상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현시대에 경전에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수 천년 전에 만들어진 경전을 보면 신화적인 이야기로 가득한데 그런 이야기가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경전의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한다.
모든 것을 과학적 근거를 들어 경전을 회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렇다. 또 수행을 했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학자들이 그렇다.
논리적으로 글을 쓰고 논거를 들어 논문을 쓰는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경전은 낡아 빠진 것이다. 신화적인 이야기, 초월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경전은 과학의 시대에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과학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그런 과학도 믿을만한 것일까?
영국에서 살고 있는 어느 교포과학자는 EBS에서 특강을 하였다. 놀랍게도 과학도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 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과학이론도 바뀐다고 하였다. 오늘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후대에 뒤집힌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과학사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도 믿을 것이 못된다.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한 것을 받아 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과학에 근거하여 재단하려 한다면 매우 경솔하다고 본다. 최근 강병균 교수의 글이 그렇다.
윤회를 부정하는 환공망상
불교닷컴에 연재되고 있는 강병균교수의 ‘환망공상’시리즈를 보면 윤회를 부정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존재론에 기반한 단멸론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과학을 근거로 한다는 것 자체가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통찰로 아는 지혜와는 다른 것이다.
과학은 철저하게 존재론에 기반한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탐구이다. 진화론 역시 존재론에 기반한다. 그런데 불교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물리학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양자론이 대승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공즉시색과 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에 일부 스님들도 동조한다. 힉스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불교교리가 매우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원로스님도 보았다.
부처님이 발견하신 연기법은 지혜에 기반한다. 지혜는 존재론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만일 통찰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하는 작업을 한다면 실패 하고 말 것이다. 연기법에 대하여 과학적 검증의 잣대로 재단이 되지 않는 것이다. 과학은 철저하게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고 인식하고 통찰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론에 입각하여 가르침을 재단하려 한다면 이를 불교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강병균교수의 환공망상시리즈 중에 “자연과 식물은 윤회가 없이도 잘 유지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나치게 확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인간’이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 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 경전 대부분은 ‘오온’에 대한 것이다. 인간을 떠나서는 다른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윤회의 범위를 자연과 식물로 확대시킨 것은 존재론에 입각한 발상이라 볼 수 있다.
강교수의 윤회부정이야기의 예는 수 없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나쁜 짓을 하면 동물로 환생한다니, 감히 지구동물계 전체를 저주받은 세계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소위 개념이 없는 행위입니다.”라 하였다. 이는 육도윤회의 허구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보았을 때, 과학적 상식으로 보았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강교수는 “하하하. 이보다 더 엉뚱한 짓은 자기를 닮은 아이를 낳고 손자까지 보는 일이지요.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식의 자식으로 환생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자기가 자기의 손자가 되는 거죠.”라 하였다. 이 역시 존재론에 기반한 단멸론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강교수의 단멸론을 보면 식물이 등장하고 광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번뇌망상이 없는 식물이나 광물은 이미 해탈한 존재라며 인간 이외로 논점을 확대한다. 이와 같은 논점 확대는 동물계로도 이어진다. 그래서 “동물들은 언어도 없고, 종교도 없고, 윤회사상도 없고 따라서 (만약 윤회가 사실인 경우에) 윤회를 한다는 걸 몰라도 잘만 유지됩니다.”라고 말한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오로지 현생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잘못 비유한 등불론
존재론에 입각한 강교수의 윤회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는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윤회를 통해서 유지하고자 하는 정체성은 대체 무엇입니까? 욕망 증오 무지, 이런 겁니까? 아니면 기억입니까? 불완전한 수천 가지 육체적 정신적 특성을, 윤회를 통해서, 유지하고 싶은 겁니까? 과거에 경험한 모든 일을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싶은 것입니까?”라고 말한다. 마치 윤회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을 비판 하는 듯하다. 강교수가 생각하는 윤회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촛불의 이어 붙음’으로, 열반을 ‘촛불의 꺼짐’으로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이 촛불에서 저 양초로 불이 이어 붙었지만, 두 촛불이 같은 촛불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다른 촛불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불이 이어 붙을 양초가 없어서 촛불이 다하는 걸 열반(涅槃 nirvana)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촛불은 당연히 의식(識)을 말합니다. 의식이 이어 불붙다가 마침내 의식이 다하는 걸 열반이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의식을,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이나 집단의식이 아닌, 초롱초롱한 현재의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좁은 의미의 해석일 것입니다. (윤회론과 단멸론, 강병균교수, 2015-10-12)
위 문장에 강병균 교수의 윤회사상이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강교수는 “초롱초롱한 현재의식”이라 하였다. 여기서 현재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오로지 지금 여기를 말한다. 즉 살아 있는 자신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금 여기서 조건에 따라 변하는 자신을 말한다. 윤회가 있다면 순간적 윤회가 있음을 말한다.
단멸론자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 이후를 생각지 않는 것이다.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고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있다면 현재라 한다. 지금 이 몸이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한다.
강교수는 인간이 동물로, 인간이 동물로, 인간이 천신으로 될 수 있다는 육도윤회를 부정한다. 존재론에 기반한 과학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수용한다면 누군가 보여 달라든가 근거를 대라고 하였을 때 논문으로 발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입증 되지 않은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변화 하는 것 외에는 믿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단멸론이다.
강교수는 윤회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촛불의 비유를 들었다. 그러나 대단히 잘못된 비유를 들었다. 그것은 “이 촛불에서 저 양초로 불이 이어 붙었지만”이라는 말이다. 이 촛불이 다 되면 또 다른 초에 옮겨 붙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촛불은 계속 타게 된다고 한다. 과연 이런 비유는 맞는 것일까?
강교수는 윤회를 설명하면서 이 초에서 저 초로 옮겨 간다고 하였다. 이는 식이 옮겨 감을 말한다. 그런데 결정적 모순이 있다. 그것은 열반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붙을 양초가 없어서 촛불이 다하는 걸 열반(涅槃 nirvana)이라고 합니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왜 이 말이 모순인가? 그것은 이전에 “이 촛불에서 저 양초로 불이 이어 붙었지만”라는 말에서 볼 수 있다. 이 초가 다 되서 저 초에 불을 붙였다면 그 초를 붙인 사람은 누구일까? 영혼일까? 식일까?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의식이 윤회하는 것
한번 초가 다 되어서 꺼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를 열반이라 한다. 또 다른 전달자가 있어서 초를 계속 붙여 준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이는 숫따니빠따 ‘라따나경(Sn2.1)’에서 알 수 있다. 라따나경 14번 째 게송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Khīṇaṃ purāṇaṃ navaṃ natthi sambhavaṃ
Virattacittā āyatike bhavasmiṃ,
Te ṇīṇabilā avirūḷhicchandā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Etena saccena suvatthi hotu.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stn23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불이 꺼진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래서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든다’라고 하였다. 누가 열반에 드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현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자를 말한다. 그런 등불은 또 다른 등불에서 불이 옮겨 왔을까?
이 초에서 저 초로 불이 옮겨 붙는다는 것은 힌두교의 교리와 같다. 마치 변치 않는 아뜨만이 있어서 이 몸에서 저 몸으로 환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뜨만을 부정한다. 그래서 이 초에서 저 초로 옮겨 가듯이 식이 유전할 수 없다. 다만 조건이 유전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M38) 라고 말씀 하셨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의식이 윤회하는 것이라 하였다.
만일 식이 윤회한다면 이는 연기법을 적용받지 않는 것이 된다. 따라서 강병균교수의 윤회론은 아뜨만윤회와 다름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 (paṭiccasamuppannaṃ viññāṇaṃ)”라고 분명히 말씀 하신 것이다.
조건에 따른 식이 윤회한다면 이 초에서 저 초로 불이 붙는 것은 모순이 된다. 그럼에도 강병균 교수는 모순으로 윤회를 설명하며 윤회를 부정한다. 그리고 윤회가 있다면 현생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찰나윤회만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는 ‘초롱초롱한 현재의식으로 해석’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존재론에 기반한 과학주의자들은
존재론에 기반한 과학주의자들은 경전을 믿지 않는다. 믿어도 선별적으로 믿는다. 윤회와 관련된 것들은 모두 빼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의지할 경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일부 수행관련 경들 외에는 모두 허구라 보는 것이다. 오로지 숨 쉬고 있는 현실만이 대상인 것이다.
그들에게 윤회가 있다면 찰라윤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일생윤회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육도윤회에 대하여 부정하고, 설령 말한다고 하더라도 식물, 광물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도처에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동물이 인간이 되기도 하고, 인간이 신이 되기도 하는 육도윤회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더구나 식물과 광물까지 확대 적용하여 무력화 시킨다. 그런 과학주의자들은 현자들일까?
법은 현자들만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존재론에 기반하여 고학의 원리로 설명하는 학자의 말은 진실일까? 부처님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이 심오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현자들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가르침을 통달하거나 수행하여 법을 증득한 자가 아니면
학자들이 PHD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현자로 볼 수 있을까? 존재론에 입각하여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학자들이라고 해서 현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현자들일까? 그것은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가르침을 해설해야 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세존께서 연기를 가르치시면서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 들이 있다’라는 방법으로 경전을 설하셨다. 그 뜻을 설명함에 해체를 설하는 [상좌부]의 회중에 들어가서 스승들을 비방하지 않고, 자기의 교리에서 빗나가지 않고, 타인의 교리에 [허물을 찾으려] 애쓰지 않고, 경을 왜곡시키지 않고, 율을 지키며, 위대한 권위를 살피고, 법을 밝히고, 뜻을 이해하며, 다시 그 뜻을 알기 쉽게 말을 바꾸어 설명하며,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설명하는 자가 주석을 해야한다. 본질적으로 연기의 주석은 어렵다. 이와 같이 옛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 진리, 중생, 재생연결, 조건이 네 가지 법은 보기 어렵고 가르치기도 아주 어렵다.”
(청정도론, 17장, 25절,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 따르면 현자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법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진리(sacca), 중생(satta), 재생연결(patisandhi), 조건(paccaya)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법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전승된 가르침을 통달하거나 수행하여 법을 증득한 자가 아니면 연기의 주석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과연 강병균교수는 경전에 통달하여 육도윤회가 없다고 주장하는가? 강병균교수는 수행하여 법을 증득하여 육도윤회가 없다고 주장하는가?
탐진치를 연료로 하여
한 번 붙은 불은 스스로 타게 마련이다. 이는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에서 “불이 붙어 있는 등불은 다른 등불을 켜는데 쓸 수 있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어떻게 불이 타오르는가? 그것은 연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연료는 다름 아닌 탐, 진, 치라는 연료이다. 그래서 연소의 경에서는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세상은 무엇으로 불타고 있는가? 그것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다. 탐욕이라는 땔감이 있기에 붙타오르고, 성냄이라는 땔감이 있기에 불타오르고, 어리석음이라는 땔감이 있기에 불타는 것이다. 이 초에서 저 초로 불을 옮기는 전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가발전식으로 자신의 오염원이 끊임 없는 땔감이 되어 스스로 타오르는 것이다.
타오르는 불은 조건에 따라 다르다. 등불이 여전히 타고 있으므로 새로운 등불의 불꽃은 이전의 등불이 분명히 아니지만, 이전의 두 등불과 두 개의 불꽃이 인과적으로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는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건을 얻은 식이 다음 생으로 갈 뿐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했다.
단지 조건을 얻은 그 법이
다음 생으로 갈 뿐이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윤회해온 것도 아니고
원인이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청정도론, 17장 161절)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도론에 따르면 “단지 조건을 얻은 이 물질과 정신의 법이 일어나면서 다음 생으로 간다고 했다. 중생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다. 이것은 과거 생으로부터 여기에 윤회해온 것이 아니고, 그것으로부터 원인 없이 여기에 나타난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조건에 따른 식이 윤회하는 것이다. 현생에서 마음은 찰라찰라 상속으로 이어지듯이 마찬가지로 일생윤회 역시 상속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속을 경험하는 자는 없는 것이다. 아뜨만이 없는 것이다.
강병균 교수는 이 초에서 저 초로 ‘촛불의 이어 붙음’으로 윤회를 설명한다. 이는 힌두교 윤회이다. 힌두교 윤회를 설명하면서 불교의 육도윤회를 부정하는데 활용한다. 존재론에 기반한 과학만능주의자에게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불자들에게 혼란만 야기하는 환공망상
불교는 존재론을 넘어서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과학적 존재론으로만 해석하면 윤회는 부정된다. 그럼에도 강병균 교수는 “우리는 6도윤회론이나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인 윤회론 등의 통속적인 윤회론을 극복하고, 새롭게 윤회를 해석해야 합니다.”라고 주정한다. 대체 새롭게 해석한 윤회론은 무엇일까?
오늘도 내일도 불자들에게 혼란만 야기하는 강병균교수의 환공망상은 언제 까지 지속될 것인가? 많이 배운 자들, 많이 가진 자들, 지위가 높은 자들의 갑질과 오만에 한국불교가 병들어 간다.
2015-10-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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