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구시대의 헛소리라고? 오물장 같은 진화연기론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5. 17:47

 

구시대의 헛소리라고? 오물장 같은 진화연기론

 

`

부정적 언표로 설명된 열반

 

우다나는 부처님이 즉흥적으로 감흥어를 읊은 것이다. 특히 열반과 관련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thi bhikkhave tad-āyatana,

yattha neva pahavī,

na āpo, na tejo, na vāyo,

na ākāsānañcāyatana,

na viññānañcāyatana,

na ākiñcaññāyatana,

n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nāya loko, na paraloko,

na ubho candimasuriyā.

 

Tatrāpāha bhikkhave neva āgati vadāmi,

na gati, na hiti,

na cuti, na upapatti.

Appatiṭṭha appavatta

anārammaam-eveta,

esevanto dukkhassā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0)

 

(Pahamanibbānasutta-열반의 경1, 우다나 Ud80,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감흥어로 읊은 열반의 세계는 부정적 언표로 되어 있다. 이는 긍정적 언표보다 포괄적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괴로움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거룩한 진리를 설한 것과 같다.

 

만일 불교가 행복의 종교라고 가정한다면 행복이라는 한 단어에 한정되어 버린다. 그러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종교라고 말하면 포괄적이다. 법률용어 대부분이 “~하지 아니한다.”라고 하듯이 부처님 역시 열반을 설명할 때 “~아니고, ~아니고,…”라 하여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였다. 이 같은 방식은 반야심경에서도 볼 수 있다. ()자와 비()자를 사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열반에 대하여 부정적 언표로 설명하면서 마지막 문구에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na cuti, na upapatti)라 하였다. 한자로 표현한다면 불생불사(不生不死)’이다. 이를 줄여서 불사(不死: atama)라고도 한다. 열반에 대하여 죽지 않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렇다고 열반에 대하여 불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불사라는 표현 역시 부정적 언표라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게송에서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Appatiṭṭha appavatta  anārammaam-eveta)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처를 여윈다는 것을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의처를 뜻하는 Patiṭṭhā‘help; support; resting place, 河岸, 渡場의 뜻이다. 삼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전생(轉生)이라 한 것은 굴러 가는 것(pavatta)’을 말하는 윤회(the circle of existence)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대상(對象)’이라 말은 ārammaa의 번역어이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대상은 ‘There are six: visible object, sound, odor, taste, body-impression, mind-object’라 설명되어 있다. 여섯 가지 감각 대상을 말한다.

 

열반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라는 말로 잘 표현 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행복이다라 하지 않은 것이다. 사성제가 괴로움에 대한 진리이듯이 열반 역시 괴로움과 관련이 있다. 괴로움이 끝나는 것이 열반인 것이다.

 

열반과 관련된 게송 하나 더

 

우다나에서는 열반과 관련하여 여러 게송이 있다. 하나 더 든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tthi bhikkhave ajāta abhūta akata asakhata. No ce ta bhikkhave abhavissā ajāta abhūta akata asakhata, na-y-idha jātassa bhūtassa katassa sakhatassa nissaraa paññāyetha. Yasmā ca kho bhikkhave atthi ajāta abhūta akata asakhata, tasmā jātassa bhūtassa katassa sakhatassa nissaraa paññāyatī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세상에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세상에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진다.”

 

(Tatiyanibbānasutta -열반의 경3, 우다나 Ud8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먼저 생겨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라고 정의 하였다. 열반은 분명히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존재론으로 보아야 할까?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알려질 수 없다.”라고 하며 부정한다. 하지만 이는 조건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이라 하여 조건을 달았다. 형성되는 것이 없으므로 당연히 열반은 알려 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있어야 세계가 있는데 마음이 없으니 세계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여읨이 알려진다.”라고 긍정하였다. 이전과는 180도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 으므로이다.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역으로 형성되는 것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진다.”라 하였다. 마음이 있으니 세계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마음이 사라지면 세계도 사라진다. 그래서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진다.”라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주석에 없는 내용이다. 추측으로 적어 본 것이다.

 

구시대의 헛소리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열반은 진짜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존재론적 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과학문명의 시대에 오로지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만으로 파악하려는 자들에게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열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것이다.

 

최근 불교닷컴에 포항공대 강병균교수는 유전자와 진화론은 무아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나가세나, 윤회, 닭과 ) 라고 하였다. 불교에 대하여 과학적 검증을 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무아사상에 대하여 진화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업사상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부처님은 세간적 정견으로 업자성정견을 말씀 하셨다. 이는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이런 업사상은 불교의 근본사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로 업()을 내세우기 위해들었지만라는 식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 하고 있다.

 

강병균 교수는 심지어 부처님의 연기법도 진화연기법으로 해석하고 있다.  심지어 윤회론에 집착한다느니 하는가 하면  통속적인 윤회론을 주장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폄하한다.  더구나 과학만능주의에 입각하여 과학의 발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것을 알아 냈다.”라며 불교를 과학의 입장에서 재해석 하고 있다.

 

 

DNA

 

 

과학으로 재단된 불교에서 경전에서 언급된 내용이 대부분 부정된다. 그래서 구시대의 헛소리를 믿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결론 짓는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이 헛소리가 되고 경전은 그의 말에 따르면 구라경이 될 것이다.

 

경전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열반은 어떻게 비추어질까?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업의 법칙마저 부정하는 존재론적 과학만능주의자들에게 열반은 구라라고 볼  것이다.

 

열반에 대하여 의심하는 왕기사

 

부처님당시에도 열반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숫따니빠따에 왕기사의 경(Sn2.12)’이 있다. 경에 따르면 왕기사의 친교사가 죽었다. 여기서 친교사라는 말은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은사스님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친교사는 정말로 완전한 열반에 드신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 완전한 열반에 드시지 않은 것일까?”라고 의문하였다.

 

왕기사는 부처님에게 여쭈어 보러 갔다. 그래서 저희의 의혹을 끊어 주십시오.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는지 알려 주십시오.” (stn346)라고 말한다. 이것도 부족하였는지 심지어 존자 깝빠가 지녔던 청정한 행으로 이루려 했던 목적이 무엇이든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까?” (stn354)라고 묻는다.

 

오늘날 회의론자들은 내생과 윤회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교를 이끌어 간다고 볼 수 있는 스님들과 학자들 중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들은 권위가 있다. 그것은 승복의 권위와 PHD의 권위이다.

 

머리깍은 자가 한마디 하는 것과 재가자가 하는 것과 다르다. 박사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자의 한마디는 일반인들에게 먹혀 들어 간다. 이렇게 권위 있는 자들이 과학적 잣대로 내생과 윤회를 부정한다면 당연히 업의 법칙도 부정되고 열반도 부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 하시기를

 

왕기사는 친교사의 죽음에 대하여 궁금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청정한 삶을 살았지만 그가 정말로 열반하였는지 몹시 궁금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소멸에 든 것입니까? 아니면, 삶의 근원을 남겨 둔 것입니까?”(stn354)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짤막하게 대답해 준다.

 

 

Acchecchi taha idha nāmarūpe (iti bhagavā)
Ka
hassa sota dīgharattānusayita,
At
āri jātimaraa asesa

 

[세존]

그는 이 세상에서 정신과 육신에 대한 갈애를 끊어버렸다.

오랜 세월 잠재하던 악마적 흐름을 끊어 버린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을 완전히 건너 뛰었다.”(stn35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의문에 휩싸인 왕기사의 질문에 대하여 갈애를 끊어버렸다라고 하였다. 사성제에서 멸성제에 해당된다. 멸성제에서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S56.11)라 하였다.

 

갈애가 소멸되면 더 이상 재생의 근거가 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업으로 인한 태어남은 없게 된다. 그래서 아라한의 죽음과 함께 더 이상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으니 세상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을 인식하는데, 마음이 없으니 세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갈애를 끊어 버린 것에 대하여 태어남과 죽음을 완전히 건너 뛰었다라 하였다.

 

승의(paramatthato)와 추론(dhammanayo)으로

 

열반의 세계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그러나 열반의 세계는 알 수 없다. 마음이 사라져 버렸으니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열반에 대하여 문자적으로 부처님은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라며 부정적 언표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질 수 없다.”라 하였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진다.”라고 말로서 설명하였다. 이런 열반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UdA.390에 따르면, 열반의 세계는 승의(勝義: paramatthato)로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에서 열반을 제외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으로 나타나지 조건지어지는 것과 무관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열반의 세계는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 발견되는가? 형상 등이 시각의식 등의 객관적 조건을 구성하는 것처럼, 열반은 길과 그 경지 등과 관련된 앎의 객관적 조건을 구성하기 때문에 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세계이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승의의 의미에서 존재하는 무조건적인 세계에 대하여 가르쳐 준다. 이것은 사실과 관계된 추론(dhammanayo)이다: 조건지어진 것들이 여기에 발견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그것과 반대가 되는 무조건적인 세계가 존재해야 한다. 괴로움이 있을 때 그 반대가 되는 즐거움이 있고 뜨거운 것이 존재하면, 찬 것도 존재하고 악한 것이 존재하면, 선한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996번 각주, 우다나, 전재성님)

 

 

핵심구절은 승의추론이다. 이는 열반의 세계는 승의(勝義: paramatthato)로서 존재한다.”는 것과 사실과 관계된 추론(dhammanayo)이다.”라는 핵심구절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승의라는 것은 절대적 진리를 말한다. 아비담마에서 82법에 대하여 빠라맛따담마라 하는데 이는 궁극적 진리를 뜻한다. 82법 안에 열반도 포함되어 있다.

 

열반은 절대적 진리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각으로 인지 하지 못하였다 하여,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여 믿지 못한다면 매우 경솔한 것이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스님이나 학자들이 단멸론적 주장을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신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법 네 가지

 

열반이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범부단계에서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이는 주석에서와 같이 길과 그 경지 등과 관련된 앎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성자의 경지에 들어서야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아무리 박사 타이틀을 여러 개 가지고 있어도 연기법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 연기법에 대하여 진화론적 연기법으로 해석하면 더욱 더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 수 있다.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이 연기법은 아주 심오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해하기 아주 쉽게 느껴집니다.” 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연기법에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이 연기의 법칙은 깊고도 심원하다. 아난다여, 이 법칙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뭇삶들은 방치된 편물처럼 뒤죽박죽이 되고 실타래처럼 엉키고 잘못 배열된 갈대나 골풀같아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으로 태어나는 윤회를 벗어나기 어렵다.” (S12:60) 라고 하였다.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법이 있다. 그것은 연기법처럼 알기 어려운 심오한 법이라 하여 네 가지를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알기 어려운 네 가지 법에 대하여 사성제, 재생연결식, 재생(윤회), 연기법이라 하였다.

 

추론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은?

 

그렇다면 알기 어려운 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추론이라 하였다. 주석에서는 조건지어진 것들이 여기에 발견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그것과 반대가 되는 무조건적인 세계가 존재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는 경과 추론으로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붓다고사는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경을 근거로 하여 “ 법들은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Dhs.5)”라는 방법으로 여러 곳에서 느낌 등이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추론으로는, 마음으로부터 생긴 물질을 봄으로 보지 않은 물질도 알음알이를 조건한 것이라 알 수 있다.(17장 통찰지의 토양, 202, 대림스님역) 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알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알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길과경지에 이른 현자들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반 범부들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회의론자들은 이 네 가지 법을 부정한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해석하여 개인적 견해를 말한다. 법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회의론자들이 부정하는 업, 내생, 윤회, 열반과 같은 가르침은 확실히 있는 것이다. 이는 존재론적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을 말한다.

 

오물장 같은 진화연기론

 

강병균교수는 진화연기론 또는 유전자와 진화론은 무아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라는 황당한 말을 하였다.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부처님이 과학을 몰랐다고 하여 구시대의 헛소리를 믿는 것은 잘못이다라 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먹혀 들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단멸론이 극성을 부린다. 인터넷세상도 현실세계의 연장선상이고 축소판이기 때문에 온갖 오물장 같은 이론이 난무한다. 그런 이론 가운데 하나가 진화론에 근거를 둔 연기법  또는 진화론적 무아사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관련 없는 개인적 견해일 뿐이다.

 

불자들은 누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까? 경전에 전승되어 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과학적으로 재해석하는 새로운 불교를 따라야 할까? 전자를 따르면 불자라 볼 수 있고, 후자를 따른다면 강병균식 불교인이라 볼 수 있다.

 

눈을 가진 자들이 보았을 때

 

우다나에 다양한 이교도의 경이 있다. 눈먼 봉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들을 말한다. 그런데 육사외도가 부처님 당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터넷시대에 수 많은 외도들을 본다.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로 재단하여 새롭게 해석한 불교를 말한다. 경전적 근거를 전혀 갖지 않는 개인적 견해의 불교를 말한다.

 

선천적으로 봉사인자들이 있다. 외도들을 말한다. 그들은 코끼리를 보고서 여러 가지 추측을 한다. 어떤 이는 물항아리같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쟁기같다고 한다. 이외 창고, 기둥, 절구, 곤봉, 빗자루 같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들이 코끼를 제대로 알리 없다. 눈을 가진 자들이 보았을 때는 우스운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Imesu kira sajjanti

eke samaabrāhmaā,
Viggayha na
vivadanti

 janā ekagadassino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실로 이러한 견해들에 집착한다.

사람들이 한쪽 관점만 본다면,

서로 말다툼을 벌이고 논쟁한다.” (Ud66, 전재성님역)

 

 

 

2015-10-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