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는 아무나 하나?
이거룡교수의 강연을 듣고
이거룡교수가 있다. 인도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이거룡 교수의 강연을 접하게 되었다. 강연 제목은 ‘이거룡 교수의 깨달음 & 사유’이다. 화면을 보니 ‘TBC’라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TBC의 ‘행복플러스’라는 프로이다. 화면은 브라운관시대 화면처럼 화질이 좋지 않다. TBC라 하였는데 80년 방송통폐합 당시 이전의 TBC일까? 검색하여 보았다. 검색하여 보니 ‘TBC대구방송’라 한다. 대구방송에서 방송하였던 것이다.
이거룡교수는 보기에 도인처럼 생겼다. 장발로서 머리가 어깨까지 닿았고 수염은 길게 길러서 겉으로 보기에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마치 인도 요가수행자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거룡교수는 요가수행에 대하여 책도 내고 강연도 많이 하였다.
이거룡교수는 인도와 관련하여 이것 저것 이야기 하였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것도 있고 전혀 새롭게 접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바라문 사주기에 대하여 주의 깊게 들었다.
인도인들은 재미를 추구한다는데
일반적으로 바라문사주기는 학생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로 나눈다. 브라흐마짜리라야라 불리는 학생기에는 강조되는 것은 ‘금욕’이라 한다. 그리고 가주기에서는 가능성에 대한 ‘포기’라 하였다. 이는 인도사람들이 재미만 추구한다는 사고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이거룡교수가 말하는 인도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욕망에 대하여 긍정적이라 하였다. 이는 강연 서두에서 인도사람들은 ‘재미’를 추구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재미란 다름 아닌 ‘즐거움’의 다른 말일 것이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말과도 유사하다. 여기서 재미라 하였을 때 아마 ‘수카(sukha)’를 뜻하는 것이라 본다.
수카에 대하여 한자로 즐거울 락(樂)이라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불교에 대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 한다. 그런데 수카에 대한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육체적 쾌락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인도 바라문 전통에서 재미를 추구한다고 하였을 때 이는 개인의 욕망의 충족에서부터 브라만과의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해탈까지 다양한 모든 재미, 즉 수카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거룡교수가 말하는 인도인들의 재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몸으로 설명한다. 바깥 원에서부터 차례로 음식(Ana maya kosa), 생기(호흡: Prana maya kosa), 의근(Manomaya kosa), 식(Vigiana maya kosa), 환희(Annanda maya kosa)가 있다고 하였다.
다섯 가지 몸에서 가장 깊은 곳에 환희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본질이고 에센스라고 말한다. 이를 ‘아난다마야꼬샤(Annanda maya kosa)’ 하는데 이를 이거룡교수는 ‘재미’라 하였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다.” 라든가, “본질 가장 깊숙한 곳까지 뚫고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재미있는 것 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아난다마야꼬샤(Annanda maya kosa)
일번적으로 ‘재미 있다’고 생각 되는 것은 종교에서 금지시 되는 경향이 있다. 음식이나 술을 즐기고 성적탐닉에 몰두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재미를 터부시 하는 것은 나를 본질적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이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사람들이 재미를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위험성이 있음에도 이를 피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다는 것이 경박한 것이 아니라 ‘깊고 깊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에서 욕망을 긍정하고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불교적 사고방식과는 다르다. 불교에서는 재미나 즐거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상락아정이 아니라 무상, 고, 무아로 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불교가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미를 추구하는 고대인도 전통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있는 몸에 대하여 아난다마야꼬샤(Annanda maya kosa)라 하여 환희의 몸이라 한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재미와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힌두교 삶의 세 가지 목표
인도에서 인도인들이 재미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힌두교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 인도인들의 사상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도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산의 비유의 경(S3.25)’에서 “지금 나는 그 해야 할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부처님의 질문에 빠세니디왕이 자신의 의무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전재성님은 각주에서“이 말에는 이러한 생활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비난이나 반성도 발견할 수 없다. 힌두교에서 삶의 세 가지 목표가 현세이익적 의무[sk. Dhamal], 사랑[감각적 쾌락의 욕망 sk. Kamal], 이익[sk. Artha]인 것을 고려한다면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974번 각주)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불교적 삶의 방식과 다른 것이다.
경에서 빠세나디왕은 왕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것은 영토를 정복하고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삶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바라문의 삶의 방식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라문교를 계승한 힌두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힌두교도의 삶의 방식은 현세적 의무를 다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고 이익되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한다. 이런 삶의 방식은 부처님당시 브라만교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능성에 대한 위대한 포기
인도철학자 이거룡교수가 설명하는 바라문인생사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임서기에 대한 것이다. 이교수에 따르면 25년 주기로 구분되는 사주기에서 임서기에 해당되는 것은 50세에서 75세까지이다. 50세가 되면 힌머리가 나기 시작하고 손자가 태어날 시기가 된다. 이때 정통바라문들은 가독을 자식에게 물려 주고 숲에 들어가 살았다. 이에 대하여 이거룡교수는 서두에서 ‘가능성에 대한 포기’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위대한 포기’라 볼 수 있다. 둘을 합쳐 말한다면 ‘가능성에 대한 위대한 포기’가 될 것이다.
이거룡교수의 강연에 따르면 “많이 벌어서 포기하라”라 하였다. 이는 잘 사는자의 포기와 같다. 포기라는 것도 가진자가 포기하였을 때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부처님도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포기 하였다. 여름에는 여름궁전에서 지내고, 겨울에는 겨울궁전에서 지낸 부처님 이었다. 온갖 것을 소유한 부처님도 포기 하였다. 이렇게 모든 욕망을 가능성이 있었을 때 포기한 것에 대하여 바라문인생사주기에서 임서기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포기하며 살 것인가?”에 포커스를 맞추며 강연하였다.
학생기(梵行期: Brahmacariya)
인도인들이 재미와 욕망을 추구하며 산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재미와 욕망만을 추구하며 살지 않았다. 또 재미와 욕망이라 하여 반드시 식욕이나 성욕 등 감각적 욕망만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환희를 추구하며 사는 삶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바라문 인생사주기에서 첫 번째단계가 학생기(梵行期: Brahmacariya)이다. 브라흐마짜리라야라 불리는 학생기에는 1에서25세를 말한다. 경전을 공부하는 시기이다. 주로 베다경전을 말한다. 이때 강조되는 것은 ‘금욕’이라 한다. 이는 시도 때도 없이 욕망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가주기(家住期: Gārhasthya)
바라문 인생사주기에서 두 번째가 가주기 단계(家住期: Gārhasthya)가 있다. 이는 26세에서 50세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고 돈을 버는 시기를 말한다. 경제적으로 자립기에 해당된다. 이거룡교수에 따르면 ‘힌두교나 인도인의 사고방식은 청빈 하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히려 ‘부자가 되라’ 라고 철저하게 가르친다고 하였다. 이는 정당하게 부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사상은 초기불교경전에서 엿볼 수 있다.
부처님도 강조하신 소유의 삶
부처님은 재가자들에게 무소유를 강조하지 않았다. 재가의 삶은 무소유를 강조하는 출가의 삶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문교 가주기에서처럼 가장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정당하게 소유하며 공덕을 베풀며 사는 삶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래서 앙굿따라 ‘빚의 경(A4.62)’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세존]
장자여, 소유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장자여, 세상의 고귀한 가문의 아들은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소유한다. 그는 이와 같이 ‘나는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을 소유의 행복이라 한다.
장자여, 향유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장자여, 세상의 고귀한 가문의 아들은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향유하며 공덕을 베푼다. 그는 이와 같이 ‘나는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향유하며 공덕을 베푼다.’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을 향유의 행복이라 한다.
장자여, 빚 없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장자여, 세상의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 누구에게도 어떠한 것도 많건 적건 빛을 지고 있지 않다. 그는 이와 같이 ‘나는 누구에게도 어떠한 것도 많건 적건 빚을 지고 있지 않다.’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을 빚 없는 행복이라고 한다.
장자여, 허물없음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장자여 세상에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 신체적으로 허물이 없고, 언어적으로 허물이 없고, 정신적으로 허물이 없다. 그는 이와 같이 ‘나는 신체적으로 허물이 없고, 언어적으로 허물이 없고, 정신적으로 허물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을 허물없음의 행복이라고 한다.
(Anaṇasuttaṃ-빚 없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62, 전재성님역)
부처님도 재가자에게 소유를 강조하였다. 이는 고대 바라문 전통에서 재가자의 삶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님은 장자와 대화에서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소유하는 ‘소유의 행복(atthisukha)’,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향유하고 베푸는 ‘향유의 행복(bhogasukha)’, 많건 적건 빚을 지고 있지 않는 ‘빚 없는 행복(anaṇasukha)’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허물이 없는 ‘허물없음의 행복(anavajjasukha)’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부처님의 네 가지 행복에 대한 가르침은 고대인도의 바라문 전통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재가가에게는 가능한 많이 벌어서 많이 공덕을 쌓는 삶이 최상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오계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당하게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하여 장려 하였다. 이는 ‘이마의 땀’과 ‘팔뚝의 힘으’로 벌어 드린 재산이 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임서기(林棲期: Vānaprastha)
세 번째로 임서기 단계(林棲期: Vānaprastha)가 있다. 이는 51세에서 75세의 시기로서 숲으로 들어가서 명상(요가)을 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이때 포기가 일어난다. 어떤 포기인가? 지금까지 공부를 하고 자녀를 낳고 재산을 모으고 명성을 얻는 과정을 거쳤지만 모든 것의 버림을 뜻한다.
유행기(遊行期: Saṃnyāsin)
네 번째로 유행기 단계(遊行期: Saṃnyāsin)가 있다. 이는 76세에서 100세 까지의 삶을 말한다. 숲에서 명상을 하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숲에서 나와 이곳저곳 돌아 다니며 탁발에 의존하여 삶을 사는 방식을 말한다. 걸망을 매고 운수행각을 하며 이제까지 배우고 익혔던 것들, 또는 진리에 대하여 검증을 하고 체험하는 단계를 말하는데 이 단계가 가장 이상적 단계라 한다.
출가를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 정통바라문들은 인생사주기가 가장 이상적 삶의 단계로 보았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짚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포기’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의 포기이다. 욕망을 추구하고 재미를 추구하며 살지만 궁극적으로 진리추구에 대한 삶에서 포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더 큰 재미, 환희를 얻기 위해서 일 것이다. 다섯 가지 몸의 단계에서 본질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아난다마야꼬샤(Annanda maya kosa)단계일 것이다.
바라문인생사주기는 정통바라문에 해당된다. 타락한 바라문 이전의 바라문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정통바라문과 불교는 다르다. 하지만 유사점도 있다. 정통바라문교에서는 학습기와 가주기를 거쳐서 위대한 포기가 일어나지만 불교에서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학습기에서 포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정통바라문교에서서는 인생사주기에 따라 재가와 출가의 삶을 모두 살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이거룡 교수는 “힌두교에서는 재가와 출가의 삶이 연속적입니다.”라 하였다. 학생기와 가주기가 재가의 삶이라면, 임서기와 유행기는 출가의 삶이라는 것이다. 재가후에 출가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거룡 교수에 따르면 “출가를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 한다.
출가는 모든 것을 포기 하였을 때 가능한 것이라 하였다. 이런 출가에 대하여 재탄생으로 말하기도 한다. 현재의 나가 죽고 새로운 나가 태어남을 말한다.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는 것 자체가 이전의 나가 새로운 나로 거듭 태어남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출가하면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는다고 하는데, 이는 한번 죽고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출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바라문인생사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에서 잘 산 사람들, 돈 잘 벌고, 명예를 쌓고, 잘 나가는 사람이 출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출가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거지가 출가 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아무나 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나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세간의 삶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만이 출가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훌륭한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훌륭한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나이 어려서 절에 맡겨져 자라 어린 나이에 출가 한다고 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 있을까? 세상이 싫어서 또는 세상에서 실패한 자가, 루저가 되어 도피 하듯이 출가하였다고 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 있을까? 실연하여 갈 곳이 없어서 출가하였다고 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 있을까? 바라문 인생사주기에 따르면 이 세상을 잘 산사람들이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위대한 포기로 달성된다.
요즘 회자 되는 말 중에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인기가 있고 명예가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을 때 그 때 떠나 가야 함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재가의 삶을 훌륭하게 살았다면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출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버리고, 버려야 겠다는 생각마저 버린 출가와 유사한 것이다. 그래서 구도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삶은 완성될 것이다. 그런데 “출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자들만이 출가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2015-09-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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