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을 읽으면 깨칠 수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4. 10:42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을 읽으면 깨칠 수 있다

 

 

 

 

 

 

뜻밖의 한마디에 고무되기도 한다. 우연히 들은 말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기도 한다. EBS2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듣게 된 말은 우리나라 교종과 선종에 대한 것이다. 새로 생겨난 EBS2 ‘스토리한국사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을 읽으면 깨칠 수 있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마음만 닦으면 도를 깨칠 수 있다. 신라시대 교종보다 선종이 각광받았던 이유이다.’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 때문에

 

교종과 선종, 역사교과서에서 듣던 말이다. 그런데 역사교과서에는 선종에 대해서 주로 언급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이 대표적이다. 교종이 있긴 있었다. 그럼에도 선종이 인기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방송에서는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 때문이라 하였다. 경전에 의존하지 않아도 마음만 닦으면 얼마든지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방송을 듣고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경전을 읽으면 누구나 깨칠 수있다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선종이 대세이다. 문자로 쓰여 있는 경전을 중시하는 불교가 아니라 마음을 중시하는 불교이다.

 

경전위주가 아닌 선위주의 불교로 바뀐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한문의 영향도 무시 못할 것이다. 사실 한문으로 만 된 경전을 보면 가슴이 턱 막히는 듯 하다. 글자 자체도 어렵지만 문장을 읽어내기는 더욱 어렵다. 어려운 문자를 익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고 더구나 문장을 해석해 주는 법사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신라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문은 외국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매우 난해한 외국어이다. 오늘날 영어만 아는 사람이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대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 없었을 것이다.

 

신라시대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계층에 속하였다. 특별히 교육을 받지 않는 한 한문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일반백성들에게 있어서 문자는 단지 흰 바탕에 검은 것이 있는 암호문과 같았을 것이다. 설령 심오한 가르침이 써 있다고 하더라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 문자를 아는 법사의 법문에 크게 의지하였다고 본다.

 

문자가 있어도 너무 어려워 읽을 수 없다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아무리 금쪽 같은 이야기가 경전에 실려 있어도 읽어 낼 수 없다면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하여 부처님 가르침에 쉽게 다가 갈 수 있도록 마음을 계발하면 깨칠 수 있다는 선종이 유행하였다는 것은 어쩌면 타당한 듯 하다.

 

전혀 다른 불교를 접하고

 

한자와 한문은 중국인들에게 익숙할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에서 선종이 생겨 나고 선종이 유행하였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조차도 문자는 익히기 어려웠던 것이라 본다. 설령 문자를 알아도 경의 내용을 알기는 더욱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문자에 의지하고,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불교가 전승되었을 때 전혀 다른 불교가 되어 버린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선종은 부처님 가르침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선종 또는 선불교라고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다. 역대 조사 스님들의 어록을 중심으로 성립된 선종은 전혀 다른 불교이다. 중국화된 불교라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조사불교라고도 한다.

 

선종에서는 말이나 문자 보다 뜻과 마음에 더 비중을 둔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말이나 문자로 표현 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되어 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전등록에서는 부처님을 초조로 하여 마하가섭, 아난다로 이어지는 역대조사 명단이 실려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사들에 따르면 부처님부터 시작된 전등이 우리나라에 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선사의 법문에 따르면 법맥이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에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 한편 선사들은  참나이야기를 한다. 참나는 한자어로 진아를 말한다. 과연 부처님이 진아를 말하였을까?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였다. 이는 부처님은 당시 일종의 진아사상인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부처님은 실체가 없음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자아가 있고, 더 큰 대아가 있고, 참다운 나가 있다는 사상을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초기경전에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럼에도 마음과 마음으로 전승되어 왔다는 선사의 법문은 부처님 근본가르침과 전혀 다른 내용이다.

 

말이나 문자를 신뢰하지 않는 선종에서는 뜻이나 마음을 우선시 한다. 그래서 가르침이외 별도의 전승된 가르침이 있다고 하여 교외별전이라 하고, 말이나 문자로서는 진정한 뜻을 알 수 없다 하여 불립문자라 한다. 이렇게 전승된 말이나 문자를 무시하고 뜻과 마음으로 전승된 것을 주장하다 보니 백가지 천가지 불교가 되었다.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소리를 함에 따라 백인불교, 천인불교가 된 것이다.

 

자기소리를 내야 한다는데

 

오늘날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여간해서는 경전을 근거로 법문하지 않는다. 자기소리를 내야 깨달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풍토에 기인해서 일 것이다. 이런 풍토는 학계라 해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불교학자들은 물론이고 불교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교수들 역시 경전의 문구를 인용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기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잘 들어 보면 모두 부처님이 말씀 하였던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초기경전에 실려 있던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전적 근거를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이 말한 것처럼 도용하는 꼴이 된다.

 

남방 테라와다 빅쿠들의 법문집을 보면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또 논장과 주석을 참고하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셨던 것을 근거로 하여 말하고 역대 주석가들의 주석과 논장을 근거로 하여 법문을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자기목소리가 없다고 비난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라면 자기목소리를 내는 것 보다 경전의 문구를 활용하여 말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 세상에 제 아무리 깨달은 자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을 읽으면 깨칠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는 선종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한국을 대표 하는 종단 역시 선종을 표방하고 있다. 교종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설령 교종이 전승되어 왔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빠알리니까야에서 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아니라 대승의 경전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사실상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알려진 것은 불과 이십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불교의 역사가 1700년이라 하지만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고작 30년도 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전에 아함경이라 하여 전승된 경전이 있었지만 하급수준으로 보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법화경에 따르면 일곱가지 비유가 있다. 이를 법화칠유라 한다. 칠유중에 의주유(衣珠喩)’가 있다. 귀한 보물을 옷에 넣었으나 친구는 깨닫지 못하고 계속 가난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이제까지 한국불교에서 귀한 보물이 있었음에도 모르고 살았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하고 전세계가 글로벌화 되는 21세기 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마침내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도 우리말로 된 것이다. 한글을 깨우친 자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경전이다. 그래서 EBS2에서 우연히 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을 읽으면 깨칠 수 있다.”라는 말이 와 닿는다.

 

 

Ya kiñci vitta idha vā hura vā    
Saggesu v
ā ya ratana paīta,      

Na no sama atthi tathāgatena         
Idampi budd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이 세상과 내세의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stn224)

 

 

2015-10-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