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소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먹는 것으로 풀 수도 있다. 마구 먹어 대는 것이다. 그것도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그렇게 양껏 먹고 나면 포만감으로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한다. 또 하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것도 안주와 함께 마시는 것이다. 취기가 돌면 전혀 다른 기분이 된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매우 많이 있다. 건전한 것들도 있는가 하면 불건전한 것도 있다. 대게 먹는 것, 마시는 것, 담배 피는 것, 수다 떠는 것 등 불건전한 것이 많다. 특히 술자리를 통하여 스트레스를 풀 때 불건전한 것들이 모두 해당된다. 심지어 직장상사를 안주삼아 험담을 하는 등 부정적 요소가 많다.
술을 많이 마시면 실수하게 되어 있다. 술취한 상태에서 아무리 조심한다 하여도 헛점을 보이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술취한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 거나하게 취한 모습을 좋아할 사람이 없다. 술로 인하여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었을지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을 때 ‘우습게’ 볼 것이다.
술 마시지 말라고 하였는데
불교에서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 이는 오계로서 정해져 있다. 이렇게 술을 마시지 말라는 종교는 불교가 유일하다. 개신교의 십계가 있다고 하지만 불음주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교회에서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이는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 선교사들이 그렇게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술에 대해서 관대하다. 그러다 보니 신부들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 것은 보통이다.
불교에서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아마 수행에 방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술을 마심으로 인하여 오계를 어기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술을 마시면 실수를 하게 되어 있는데, 살생(폭력), 도둑질, 음행, 거짓말 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술을 마시되 음식으로 알고 마시면 괜찮다고 한다. 식사를 하는데 있어서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마치 프랑스사람들이 만찬할 때 포도주를 곁들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식사할 때 음주하는 것에 대하여 ‘반주’라 한다. 그러나 절제가 안 되는 경우 음식이 아니라 술이 된다.
약으로 술을 마실 때
어떤 경우에서든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술을 마셔야 되는 경우도 있다. 약으로 활용할 때이다. 율장대품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때 존자 삘린다 밧차에게 풍병이 들었다. 의사가 기름을 끓이면서 화주를 넣었다. 이에 부처님은 “기름을 끓일 때 화주 넣는 것을 허용한다.”(Vin.I.205) 라고 하였다. 술이 약으로 활용될 때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과도하게 화주를 넣지 말라고 하였다.
수행승들은 원칙적으로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병이 들었을 때 약으로 허용되었다. 어떤 수행승이 인간이 아닌 존재의 병에 걸렸다. 이를 치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살장에 가서 생살코기를 먹고 피를 마셨다. 그 결과 인간이 아닌 존재의 병이 치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인간이 아닌 존재의 병에 걸렸다면 생살코기와 생피를 허용한다.” (Vin.I.203) 라 하였다. 치료용으로 고기를 허용한 것이다.
“식사의 분량을 모르고”
부처님은 치료목적이 아닌 술과 고기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불살생계와 불음주계를 지키기 위한 당연한 조치라 보여진다. 이와 더불어 식사의 분량을 알 것도 강조 하였다. 특히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관련하여 말씀 하셨다.
Bhojanamhi amattaññū
indriyesu asaṃvuto,
Kāyadukkhaṃ cetodukkhaṃ
“식사에 분량을 모르고
감관을 수호하지 않는 자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
두 가지 고통을 겪는다.”
(Paṭhamabhikkhusuttaṃ-수행승의 경, 이띠붓따까 It22,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게송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식사의 분량을 모르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식사라 한 것은 bhojana로서 ‘food; meal’의 뜻이다. 이를 음식(飲食)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먹고 마시는 것 모든 것이 해당된다. 넓은 의미에서 음주도 식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양껏 배불리 먹고 또 소화제를
식사의 분량을 모른다는 것은 적당량을 모른다는 것이다. 과식이나 과음하는 것을 말한다. 과식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스님은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은 과식하고 난 다음에 소화제를 먹는 것이다.
양껏 배불리 먹고 나면 소화를 시켜야 한다. 그러나 너무 배를 채웠다면 소화기능에 장애가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소화제를 투여 하여 소화기능을 도와 주어야 한다. 대체 배가 터지도록 먹으면서 또 소화제까지 먹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문제 제기를 한 스님에 따르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다.
로마시대 말기 귀족들은 옆으로 비스듬히 누어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맛있는 것을 먹고 나서 토하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이다. 음식막장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배불리 양껏먹고 소화제를 찾는 다면 이 또한 막장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막장은 음주에서도 볼 수 있다.
과음하고 난 다음 날은 괴롭다. 그럴경우 사람들은 술깨는 약을 찾는다. 그럴거러면 뭐하러 과음 하였을까? 이는 과식한 사람이 소화제를 먹는 것에 대하여 ‘그럴거라면 뭐하러 많이 먹었을까?’라고 의문하는 것과 같다.
과식하거나 과음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식함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푼 것이다. 또 상사를 안주로 삼아 과음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푼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자라면 자신의 몸을 태워서 스트레스를 풀 것이다. 그러나 절제하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식, 과음, 흡연은 대단히 어리석은 행위이다. 절제 할 줄 몰라 어리석다. 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받기 때문에 어리석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금방 잊어 버리고 마구 먹어 대고, 퍼 마시고 뿜어 댄다.
부처님 말은 틀림 없다
게송에서 식사에 적당량을 몰랐을 때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두 종류의 고통이 있다. 눈에 보이는 질병 등에 의해서 미래에 괴로운 운명과 관계되는 신체적 고통과, 탐욕 등의 오염에서 유래하는 후회와 좌절된 욕망에 의한 정신적 고통이 있다.” (ItA.I.101) 라 되어 있다. 무절제한 생활을 하였을 때 미래에 나타나는 과보가 있다는 것이다.
과음이나 과식하는 것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흡연하고 있다고하여 당장 폐암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수년, 수십년 누적 되면 탈이 나게 되어 있다. 이는 알코올 중독자나 장기간 흡연으로 인하여 각종 질환에 걸린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감관을 수호하지 않는 자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 두 가지 고통을 겪는다.”라는 말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먹는 것이 낙(樂)인 스님들
부처님 당시 수행승들은 하루 한끼만 먹고 살았다. 요즘도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일종식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한다. 물론 우리나라 수행자 중에도 일종식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스님들은 하루 몇 끼 먹을까? 아마 하루 세 끼 다 찾아 먹을 것이다. 아니 그것 이상 먹는지 모른다. 어느 불교전문기자의 책에 따르면 한국의 스님들은 먹는 것이 낙인 것 같다. 내용 중에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일식집에서 한 스님이 헉헉대며 아가미로 숨쉬는 생선회를 맛있게 먹는 모습도 보았다. 그럴 때 흔히 하는 말이 약으로 먹는 다는 것이다. 돈 잘 쓰는 귀족형 성직자 가운데 식도락가 많다.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우리 주지스님은 식도락가인데 루이비통 가방 든 보살과 에쿠우스 타고 별 다섯 개 짜리 호텔에서 식사한다.” “우리 스님은 비만이라 보살들하고 골프치고 호텔에서 사우나하고 돌아 온다.” 신자들이 갖다 주는 온갖 좋은 것 배부르게 잘 먹고 최고 고급만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을 과연 무어라 불러야 하나?
(신앙지옥 불신천국, 김나미 기자 지음)
한국스님 중에 식도락가가 많다고 하였다. 그것도 살아 펄떡이는 생선회도 거침 없이 먹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듣는다. 조계사 근처 식당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고위층 스님들이 식당에서 고기와 술을 먹는 것은 흔한 일이라 한다. 너무나 많이 목격 되기 때문에 전국적 현상이라 한다.
하루 세 끼를 다 찾아 먹고 좋은 것만 골라 먹는 스님들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살이 쪄서 풍채가 좋아 보일 것이다. 거기에다 목살까지 있다면 대식가라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먹는 것을 낙으로 사는지 모른다.
무위도식형 스님의 하루일과
불교를 포함하여 타종교까지 종교를 전문으로 다년간 취재한 기자의 책을 보면 가관이다. 그 중에 무위도식형 스님이 있다.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하는 것이다. 무위도식형 스님의 일과는 어떤 것일까?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무위도식형은 직무태만의 전형적인 경우이다. 이 유형은 이 세상 온갖 좋다는 것 다 누리고 산다. 유서 깊은 사찰은 신선이나 살 것 같은 수려한 산을 배경으로 구름이 발아래 오는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사찰에 사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 좋은 곳엔 다 사찰이 있다는 말처럼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곳에 살며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산다.
청산별곡의 “살어리 살으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달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를 몸으로 보여 주는 것처럼, 보통사람들은 창살 달린 시멘트집에 사는 데, 한옥집에 몸에 좋은 것 다 먹고 좋은 옷에 좋은 음식에 온갖 호사를 누리며 세월아 네월아 하며 잘 산다.
이런 승려들은 대체로 소위 잘 나가는 주지스님을 은사로 둔 경우가 많고, 고정된 단골 고객이 있어 대체로 일정금액의 수입이 매달 들어와 지갑이 두둑하다. 할 일은 월급 주고 고용한 사람에게 맡기고 여기 저기 좋은 곳으로 놀러 다니기 바쁘다.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무척 자유로워 이런 부류일수록 무엇이든 몸에 좋다는 최고를 찾고 철마다 즐길 것 다 즐기고, 다도와 같은 고급 취미도 하나쯤 갖고 있다.
이런 무위도식형은 불로소득의 호의호식하며 여가 활동에 열중한다. 종일 하는 것 없이 따뜻한 밥만 먹고 최고의 수제차만 마신다. 가끔 입맛 없다, 식욕 없다며 밥투정하다가도 외출이라도 하면 신나서 나간다. 돈 잘 주고 잘 쓰는 신도 만나 고급 가사 장삼 걸치고 맛난 것만 찾아 다닌다.
무위도식형에는 식도락가 승려가 많다. 앉은 지리에서 불고기 8인분을 먹는 배불뚝이 비만형 승려도 보았다. 봄이 오면 봄나물에 꽃구경, 여름에는 삼계탕에 휴가, 가을에 송이 먹고 낙엽구경, 겨울되면 몸에 좋다는 온갖 몸보신용 보약을 섭렵한다.
동네 작은 사찰의 공양주 보살은 아침마다 스님 드실 해장국을 끓여 바쳐야 한다. 매일 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절에서 마시고 놀고 밖에 나가 놀며 마시는 술 때문이다.
작년에 미국 다니며 골프를 즐기더니 이젠 실력이 싱글이 되었다는 한 스님의 이야기가 주변에서 회자 되고 있다. 알 사람은 알 만한 승려가 주인공이다.
(신앙지옥 불신천국, 김나미 기자 지음)
무위도식형 스님을 보면 먹기만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술도 잘 마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공양주 보살은 매일 아침 해장국 끓여 갖다 바치기 바쁘다는 것이다.
스님과 관련하여 부정적 이야기를 하였을 때
스님과 관련하여 부정적 이야기를 하였을 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모든 스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매번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조건문을 달 수 없다. 글을 쓸 때마다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일일이 해명하고 규정하고 선언하는 일은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글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런 줄 알아야 한다.
법구경에서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Dhp129) 라는 게송이 있다. 여기서 ‘누구나’와 ‘모든’ 이라는 말이 들어 간다. 이는 빠알리어 삽베(sabbe)를 번역한 것이다.
부처님이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 한다’고 하여 부처님과 성스런 제자들도 포함 되는 것일까? 부처님이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다’라고 하였을 때 성스런 제자들도 포함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모든 존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모든 존재’라는 말은 예외가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마치‘모두 모여라.’라고 북소리로 집합을 알리면, 왕자들과 대신들을 빼놓고는 모두 모이라는 것과 같다.
설령 스님들이 술을 마셨다라고 할지라도 ‘일부 스님이 그렇게 했다’라고 알면 되는 것이다. 글에서 ‘ 누구나’ 또는 ‘모든’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하여 이를 시비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음식인가 보약인가?
한국불교에 오관게가 있다. 이를 공양게라 한다. 그런데 오관게를 공양음식 먹는것에 대하여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正思良藥爲療形枯)”라는 구절이 있다. 밥먹는 행위에 대하여 육신을 지탱하는 의미 보다 약으로 아는 의미가 더 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음식은 ‘보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약이 되는 음식을 많이 먹어도 좋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먹는 것과 관련하여 초기불교경전에서는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있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S35.239)라 하였다. 이런 태도는 대승불교의 공양게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 (S35.239)라고 분명히 하였다. 보약개념으로 먹는 음식과는 다른 것이다.
하루 한끼만 먹고 사는 숲속의 수행자
수행자들은 하루 한끼만 먹어도 살 수 있다. 고된 일을 하지 않는 수행자들이 세 끼, 그것도 간식까지 챙겨 먹는 다는 것은 지나치다. 하루 한끼만 먹는 수행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 ‘숲속의 경’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게송이 있다.
[하늘사람]
“한적한 숲속에서 살면서
고요하고 청정한 수행자는
하루 한 끼만 들면서도
어떻게 얼굴빛이 맑고 깨끗해지랴?”
[세존]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
지나간 일을 슬퍼하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시든다네.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 (S.10, 전재성님역)
하루 한끼만 먹고 사는 숲속의 수행자는 얼굴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다. 이는 수행의 결과이다. 식사에 적당량을 알고 감각기관을 수호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얼굴빛이 맑고 깨끗하다(kena vaṇṇo pasīdatīti)’라 한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식사를 마친 뒤, 물러나 명상하면서 의식을 한곳에 집중해서 산란한 마음을 극복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피가 맑아져서 육체가 정화되고 안색도 맑고 아름다워진다.” (Srp.I.28)라 하였다. 얼굴이 맑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
수행승들은 오전에 탁발 할 때 한끼만 먹는다. 오후에는 일체 먹지 않는다. 대신 명상으로 보낸다. 이는 오늘날 수행처의 일상에서도 알 수 있다.
수행처에서는 좌선과 경행을 번갈아 가며 한다. 이렇게 명상을 하였을 때 다섯 가지 장애가 가라 앉는다. 감각적 욕망,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마치 정화된 물처럼 정신이 맑은 것이다. 하루 한끼 먹어 소식하면 몸이 가벼울 것이다. 더구나 명상으로 오장애가 가라 앉았다면 얼굴 색깔이 맑고 평온하고 평화로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얼굴은 금방 알아 볼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얼굴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후 길을 떠났다. 오비구를 찾아간 것이다. 도중에 한 사명외도 우빠까를 만났다. 그때 우빠까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vippasannāni kho te āvuso indriyāni.
Parisuddho chavivaṇṇo pariyodāno.
Kaṃ si tvaṃ āvuso uddissa pabbajito?”
[우빠까]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
벗이여, 그대는 누구를 의지하여 출가하였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구의 가르침을 즐겨 배우는가?”
(율장대품 Vin.I.8, 맞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역)
우빠까는 사명외도이었다. 사명외도란 잘못된 생활을 영위하는 자란 뜻이다. 막칼리 고살라가 이끌던 운명론자 또는 결정론자를 신봉하는 외도들을 말한다. 그들은 벌거벗은 유행자이었다고 한다.
우빠까가 보기에 부처님의 얼굴은 매우 맑았다. 그래서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 (vippasannāni kho te āvuso indriyāni. Parisuddho chavivaṇṇo pariyodāno)”라 하였다. 여기서 vippasanna라는 말은 ‘very clear; pure; bright’의 뜻이다. 얼굴이 맑고 깨끗하기도 하지만 ‘빛난다’는 의미도 있다. 수행을 하면 얼굴이 맑아질 수밖에 없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청정해졌기 때문이다.
“아빠가 스님이란게 넘 창피해요”
요즘 수도권의 한 교구본사에서 신도들의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이유는 청정하지 못한 비구가 있기 때문이다. 주지스님에게 처자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60년대 대처승이 머물던 사찰을 ‘정화’라는 명목으로 절뺏기 하듯이, 21세기 판 정화운동이 용주사 입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계신문에 따르면 재가불자들은 주지스님의 은처와 숨겨놓은 아들을 문제 삼고 있다. 독신비구종단을 표방하는 조계종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스님들이 정화를 못하니 재가자들이 나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플레카드에서 재미 있는 문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아빠가 스님이란게 넘 창피해요”라는 문구이다.
오늘날 스님들의 범계행위는 도를 넘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고기를 먹고 술마시고, 심지어 음행에 이르기 까지 오계를 지키지 않는 스님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율장정신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일종식이라도 실천해야
계행을 무시하는 스님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외모로 본다면 풍채가 좋다. 잘 먹어서 그런지 몸이 비대하고 거구들이다. 걸을 때 뒤뚱뒤뚱하며 가는 것이 특징이다. 또 하나는 ‘목살’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는 것이다. 이렇게 풍채 좋고 목살 있고 개기름 흐르는 스님들을 보면 탐욕스럽게 생겼다. 얼굴에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서 그대로 나타나 보인다. 이 스님들을 어찌 해야 할까?
승단이 청정해지려면 계행을 지켜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탁발’하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처럼 걸식하며 하루 한끼로 사는 것이다. 탁발이 힘들다면 ‘일종식’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일종식을 하면 얼굴이 맑고 깨끗해진다고 하였다. 적당히 먹으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그래서 얼굴도 맑고 온화 해 질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탁발이 불가능하다면 일종식이라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명상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재가자들의 삶은 고달프다. 쇠붙이 보다 더 단단한 족쇄로 묶여 사는 삶이다. 아내와 자식을 부양하기 위하여 노동을 해야 한다. 그것이 육체적 노동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고된 것이다. 이럴 때 보상 받고 싶어 진다. 대게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 빠는 것으로 해결한다.
폭식을 하고 음주를 하고 흡연을 해 보아도 양이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일시적으로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지만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식사에 적당량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을 하기 때문에 빅쿠들처럼 일종식을 할 수 없다. 그대신 하루 세 끼를 먹지만 음주와 흡연을 삼가는 것이다. 그리고 명상을 하는 것이다.
명상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이 세상에 미남미녀가 많지만 예쁘다라는 말을 할 수 있어도 아름답다라는 말을 해 주기에는 인색하다. 나이 든 중년 여성에게 “참 예쁩니다”라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 그 대신 “당신 참 우아합니다” 또는 “참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최고의 찬사이다. 마찬가지로 얼굴에 상관 없이 명상하는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명상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명상을 마치고 난 모습은 더욱 더 아름답다. 왜 그럴까? 오장애가 가라 앉았기 때문이다. 탐욕과 분노 등이 가라 앉은 얼굴은 맑고 깨끗할 것이다. 마치 새로운 하늘과 땅을 접하는 듯한 평온하고 온화한 얼굴을 보았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래서 우빠까가 부처님의 얼굴을 보고서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라 하였을 것이다.
2015-10-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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