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욕망의 시대, 분노의 시대에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야망갈라가타 5번 게송에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이교도 중에 요정과 같이 아름다운 ‘찐짜 마네위까’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교도들은 부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찐짜를 시켜 거짓 임신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뱃속의 아이가 부처님의 아이임을 말하면서 모욕을 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법구경 176번게송 인연담에도 실려 있습니다.
거짓임신녀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대하였을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학대를 학대로 갚고, 공격을 공격으로 갚고, 증오를 증오로 갚았을까요? 게송에 따르면 “성자의 제왕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 (Santena soma-vidhinā jitavā munindo)”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평화로운 고요함(Santa)과 달(soma)처럼 부드러움으로 일관한 것입니다.
이교도들은 부처님을 중상모략하고자 거짓임신녀까지 동원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여자관계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부처님당시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 없습니다. 사회에서 생매장 시키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가 뛰어난 것이 여자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요함과 부드러움을 유지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습니다.
“코끼리가 전쟁터에 나아가면
활에서 화살이 쏟아져도 참아내듯,
나는 근거 없는 비난을 참아내리라.
사람들은 대부분 계행을 지지키 않으니.”(Dhp320)
부처님이 근거 없는 비난을 참아 낸 것에 대해여 계행이 엉망인 자들의 소행으로 보았기 때문 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1)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2)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고 말하고, 3)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것을 기억한다고 말하고, 4)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5)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2) 들은 것을 듣지 않았다고 말하고, 3) 기억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4)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행이 수승한 자는 근거 없는 비방을 할 리가 없습니다. 계행이 저열한 자들이 중상모략하여 파멸 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근거 없이 비난이나 비방,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들은 한마디로 ‘천박한 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비난과 비방, 중상모략에 대하여 일체 대응 하지 않았습니다. 왜 대응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마지막 구절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계행을 지지키 않으니”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주석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은 천박해서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숙고가 없이 말을 지껄이고 다툼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나의 중요한 할 일은 참아 내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인내를 강조한 이유 입니다. 만일 부처님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증오를 증오로’ 갚는다면 그들과 ‘동급’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계행이 엉망이고 저열한 자의 비난이나 비방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낫습니다.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천박한 자들이 싸움을 걸어 올 때 넘어 가지 않는 방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할 것을 말씀 했습니다.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그대 자신이 동요하지 않으면,
그것이 열반에 이른 것이니
격정은 그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Dhp134)
비난이나 비방에 대하여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동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언저리가 잘리고 깨어져 땅위에 놓인 놋쇠그릇이 손이나 발이나 막대기로 쳐도 동요하지 않고 소리내지 않는 것처럼” 이라 했습니다. 깨어진 놋쇠에서 소리가 나 보았자 “쨍쨍”거리기만 할 뿐 듣기에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습니다.
비난, 비방,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계행이 엉망인 자에게 굳이 “그대는 계행이 부족하다”는 등의 언어적 표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계행등의 이유를 들어 반응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지 인내하며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일관하면 됩니다.
지금 나에게 화 내는 자가 있다면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면 그뿐 입니다. 화내는 이에게 화내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S11.5) 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알면 사띠(sati)를 확립하고 고요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과 같은부드러움으로 섭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고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화내는 자, 비난하고 비방하는 자에 대하여 자애와 연민으로 대할 뿐 결코 가까이 하지도 않고 사귀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고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는 것 입니다.
Katvāna kaṭṭham-udaraṃ iva gabbhiniyā
Ciñcāya duṭṭha-vacanaṃ jana-kāya-majjhe
Santena soma-vidhinā jitavā munindo
Taṃ-tejasā bhavatu te jaya-maṅgalāni
“여인 찐짜가 자신의 배에 통나무 넣고
임신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했을 때,
성자의 제왕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5번 게송)
2016-07-26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0) | 2016.07.27 |
---|---|
잠 못 이루는 열대의 밤에 (0) | 2016.07.27 |
연(蓮)의 바다에 파도가 치면, 2016년 관곡지 연꽃테마파크 (0) | 2016.07.25 |
연꽃님의 블로그는 (0) | 2016.07.24 |
잠 못 이루는 열대야에 (0) | 2016.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