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람들은 대게 급합니다. ‘빨리빨리’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빨리빨리라는 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말이 된 것 같습니다. 중국사람들도 이 말을 알고 있습니다.
2006년도에 중국 동관에 비즈니스출장 간 적 있습니다. 그때 중국 중간관리자한테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 관리자는 한국 대기업의 현지공장에서 일 했다고 합니다. 그때 들은 말이 ‘빨리빨리’라 했습니다. 한국의 관리자는 말할 때마다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중국인도 할 줄 아는 말 빨리빨리는 이제 세계어가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일상에서도 늘 ‘빨리빨리’를 말합니다. 조금만 지체 되어도 ‘빨리’라는 말이 튀어 나옵니다. 더 늦으면 이번에는 화를 냅니다. 행동이 굼뜨거나 말귀를 못 알아 먹는 사람들을 답답하게 생각하여 참지 못합니다. 이것이 대부분 한국사람들의 행동양식일 겁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면 보기에 좋습니다. 더구나 내 말대로 움직이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긴장이 형성 됩니다. 그때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에게 분노를 표출 합니다. 더 심하면 폭력을 행사 합니다. 약자는 폭력을 당했을 때 두려움을 갖습니다. 언어폭력이든 신체폭력이든 당하는 자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낍니다. 사실상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나 다름 없습니다.
축생들의 삶은 비참합니다. 잡아 먹힐까 봐 늘 두려워합니다. 언제 어디서 공격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약자로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약자는 강자의 분노와 폭력에 늘 두려워합니다. 그래서일까 오계에 ‘불살생계’가 있는지 모릅니다.
오계의 불살생계는 오늘날 ‘비폭력’과 같은 것입니다.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을말합니다. 이를 아힝사(ahiṃsā)라 합니다. 팔정도 정사유에서 세번째 항목이 ‘폭력을 여윈 사유’라 하여 ‘아위힝사산깝뽀(avihiṃsāsaṅkappo)’라 합니다. ‘아위힘사(avihiṃsā)’는 비폭력 뿐만 아니라 불살생도 포함됩니다. 폭력을 반대하고 더구나 작은 미물일지라도 살생하는 마음을 여의었을 때 바로 그 마음이 자비로 충만한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사유는 자비의 실천입니다.
인간으로 사는 한 약육강식의 짐승같은 삶을 면해 보자는 뜻에서 오계를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오계를 지킨다는 것은 인간과 축생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Dhp129)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Dhp130)
모든 존재들은 나름대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건 축생이건, 귀한자이건 천한자이건, 부자이건, 가난한자이건, 잘난자이건 못난자이건 각자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 삶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폭력을 가한다면 약육강식의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구나 폭력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자비심이 없다는 겁니다. 조폭에게 자비심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걸핏하면 분노하고 폭력을 일삼는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자비심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 일 것입니다.
[세존]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S3:4)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도 사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남도 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악한 자는 자신이 믿지 않더라도 자기가 자신의 적이다. 선한 자는 반대로 자신의 친구이다”라 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빨리빨리를 말하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마구 화를 내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남을 자비로 대할 리 없습니다. 자신을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신구의 삼업으로 악업을 짓습니다. 악업을 지으면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남에게 화를 낸다거나 폭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는 자는 남들도 친구로 생각하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업을 짓습니다. 선처에 태어날 업을 짓는 것입니다. 자신을 증오하고 학대하는 자는 남에게도 잔인하고 폭력적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결코 남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2016-07-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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