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고 지고
아파트 화단에 누군가 수국을 심어 놓았습니다. 수국은 꽃 중에 가장 탐스러워 보입니다. 수 백 개의 작은 꽃이 다발을 이루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그런데 현재 보고 있는 꽃은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에 한번 피었습니다. 처음 것은 시들고 연달아 핀 것입니다.
꽃은 피고 집니다. 시든 꽃은 아무도 쳐다 보지 않습니다. 더구나 뚝뚝 떨어져 있는 꽃잎을 보면 지저분해서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늘 새롭고 싱싱한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어느 사진을 보든지 시든 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번 ‘형성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라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되기 마련입니다. 다름아닌 변화 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그 사실 자체는 변함 없는 것입니다.
이침에 눈을 뜨면 늘 익숙한 것과 마주칩니다. 창 밖의 무성한 녹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어제의 녹음은 오늘의 녹음이 아닙니다. 서서히 변해 갑니다. 그러다 극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늦가을이 되면 잎이 벌겋게 변하다가 결국 떨어지고 맙니다.
사람의 마음도 늘 변합니다. 그때그때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합니다. 어린아이는 울었다 웃었다 합니다. 어떤 이는 변덕이 죽 꿇듯 합니다. 어떤 마음이 내마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급기야 “내마음 나도 몰라!”가 됩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그 무엇을 추구 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천국’일 것입니다. 창조주가 있어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가 있으면 천국으로 보내 영생을 보장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해서 보기 싫은 놈 미운 놈이 있으면 지옥에 쳐박아 놓고 영원히 못나오게 하는 것 입니다.
유일신교에서는 영원을 말 합니다. 천국도 영원한 곳이고 지옥도 영원한 곳이라합니다. 한번 천국이면 영원한 천국이고,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천국은 정말 즐거운 곳일까요?
천국에서는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더구나 온갖 쾌락을 즐기며 행복하게 산다고 합니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곳이 행복할지 몰라도 영원히 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마 보통사람들은 무료해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진수성찬도 매일 먹으면 식상하듯이 천국에서 꿈같은 삶 역시 싫증나기는 마찬가지 일겁니다. 그런데 한번 천국에 가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천국은 사실상 지옥과 다름 없습니다.
유일신교의 천국은 지옥과 동의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천상은 다릅니다. 블교천상에는 수명이 있습니다. 가장 수명이 짧은 천상은 인간 바로 위에 있는 사대왕천 입니다. 사대왕천의 수명은 500천상년으로서 인간으로 따지면 9백만년입니다. 가장 긴 수명의 천상은 8만4천대겁을 산다는 비상비비상처천 입니다. 이렇게 천상에도 수명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천상의 존재도 무상함을 말 합니다. 어는 것 하나 제행무상의 법칙에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옥중생의 수명은 어떨까요? 천상의 존재와 달리 딱히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수명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세계는 지옥을 포함하여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악처에서는 왜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업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지은 업이 작용하기 때문 입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전생에 뭔짓을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지은 업이 익으면 과보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업은 달리 익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업이숙(業異熟: kamma vipāka)’라 합니다. 조건에 따라 업이 달리 익다 보니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업공덕으로 태어난 천상에서는 수명을 보장해 줍니다. 그래서 불교천상에서는 수명이 있습니다.
꽃이 피면 시들듯이 천상의 존재도 때가 되면 죽습니다. 그런데 초기경울 보면 죽음이 오기 전에 몇 가지 징조가 있다고 합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천신이 자신의 하늘 몸에서 죽을 때, 그에게 다섯 가지 징조가 나타난다. 그의 화환이 시들고, 그의 의복이 바래고, 그의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르고, 그의 몸이 추악해지고, 자신의 하늘보좌에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다.” (It83)
이띠붓다까 ‘징조의 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상의 존재가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마치 꽃이 시들듯이 더럽고 추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이 시들고, 옷이 바래고, 냄새가 나고, 몸이 추악해지고,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천신이 죽을 때 나타나는 징조라 합니다. 이런 징조가 나타나면 동료천신들은 “이 천신은 죽을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존자여, 좋은 곳으로 가라. 좋은 곳으로 가서 행복의 성취하라. 행복의 성취해서, 안착하라.(It83)”라고 고무한다고 합니다. 그 좋은 곳은 어디일까요? 다름아닌 인간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인간의 상태가 천신들이 좋은 곳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수행승이여, 인간으로 있으면서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믿음을 성취한다면, 그것이 천신들의 행복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It83)
인간세상만이 공덕행과 수행하기에 좋음을 말합니다. 천상의 경우 즐거움만 있어서 수행하기 힘들고, 반면 지옥 등 악처는 너무 괴로워서 수행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희로애락 등 모든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공덕행과 수행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라 합니다. 더구나 부처님의 정법이 살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천상의 존재가 죽으면 악처에 태어나기 쉽습니다. 천상에서 복과 수명을 향유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이전 생에 지었던 ‘악업’뿐 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천상의 존재둘은 죽음이 임박하면 몹시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마치 이 생에서 온갖 향락을 누린 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상의 존재는 임종이 임박한 동료천신이 부디 인간으로 태어나 공덕을 지어 다시 천상에 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삼십삼천의 경우 인간의 백년은 하루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오십년 살아 공덕을 짓고 다시 삼십삼천에 태어 났다면 불과 반나절 자리를 비운 셈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 했습니다.
“천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 때에,
천신들은 이러한 연민을 통해서
함께 기쁘게 맞이한다.
‘천신이여, 또 거듭해서 오시오.’라고.” (It83)
2016-07-2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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