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소욕지족의 당당함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0. 10. 17:17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소욕지족의 당당함

 

 

십수념

 

앙굿따라니까야에서 하나의 원리에 대한 품(A1.304-313)’이 있다. 이를 에까담마박가(Ekadhammavagga)라 한다. 초불연에서는 한가지 법의 품이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념(髓念: anussati)’에 대한 것이다. 흔히 십수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부처님에 대한 새김 (buddhānussati: 불수념)

2) 가르침에 대한 새김 (dhammānussati: 법수념)

3) 참모임에 대한 새김 (saghānussati: 승수념)

4) 계행에 대한 새김 (sīlānussati: 계수념)

5) 보시에 대한 새김 (cāgānussati: 시수념)

6) 하늘사람에 대한 새김 (devatānussati: 천수념)

7) 호흡에 대한 새김 (āāpānasati: 안반수념)

8) 죽음에 대한 새김 (maraasati: 사수념)

9) 신체에 대한 새김 (kāyagatāsati:신수념)

10) 지멸에 대한 새김 (upasamānussati:멸수념)

 

 

청정도론에 40가지 명상주제가 있다. 그 중에 수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여섯 가지에 그친다. 위 열 가지 항목 중에서 1번 항에서 6번 항까지만 명상주제로 선정되어 있다.

 

정형구를 보면

 

열 가지 수념에 대한 정형구가 있다. 불수념에 대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Ekadhammo bhikkhave bhāvito bahulīkato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āya savattati. Katamo ekadhammo: buddhānussati.

 

수행승들이여, 닦고 익히면 결정적으로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멸, 곧바로 앎, 완전한 깨달음,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그 하나의 원리란 무엇인가? 부처님에 대한 새김이다.”(A1.304, 전재성님역)

 

 

이 문구는 정형화 되어 있다. 열 가지 수념은 단지 하나의 단어만 바꾸면 된다. ‘buddhānussati’자리에 다른 수념을 끼워 놓으면 되는 것이다. 열 가지 다른 단어를 끼워 놓아 문장을 구성하면 반복구문에 따른 열 가지 문장이 완성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번역서는 반복구문 생략 없이 모두 복원하여 열 가지 수념에 대한 경을 완성했다. 그러나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서를 보면 반복구문을 생략했다. 그래서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라는 식으로 점 세게(…)를 이용하여 번역했다.

 

사수념(死髓念: maraasati)

 

반복구문 정형구에서 핵심적인 말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이다. 이후 소멸, 적멸, 곧바로 앎, 완전한 깨달음, 열반으로 이어지는데 부처님은 이를 하나의 원리라 했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요청되는 말이 싫어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무엇을 싫어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몸과 마음을 싫어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욕망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어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상관과 부정관 등의 수행이 요청된다.

 

불교에만 부정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도 부정관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말한다. 교회에 가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며 죽어 가는 끔찍한 모습의 십자가상을 볼 수 있다. 명상에 든 부처님의 형상과는 대조적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예수상은 죽음을 명상하기에 안성맞춤이라 한다. 십자가의 형상이 끔찍한 것이긴 하지만 끊임 없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내고 천국에 대한 믿음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에는 죽음에 대한 것이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부정관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선불교로 전개되면서 죽음에 대한 명상이 사라져 버렸다. 기독교에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끊임 없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지만 근자에 이르러 불교에서는 죽음을 명상하는 가르침이 사라진듯 하다. 그러나 부처님은 부정관 등을 통하여 죽음이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끊임 없이 강조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열 가지 수념에 포함되어 있는 사수념(死髓念: maraasati)일 것이다.

 

한호흡 기간에도 죽음이

 

사수념과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여섯 모음에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A6.19)’이 있다. 경에 따르면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대수명을 이야기하지만 기대수명대로 산다는 보장이 없다. 하루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고, 간판이 떨어져 즉사할 수도 있다. 도처에 죽음이 사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A6.19) 라고 말씀 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할 때 하루낮 하루밤도 긴 시간이다. 경에 따르면 시간은 점점 단축 되어 간다. 하루밤낮에서 하루 낮으로, 하루 낮에서 탁발음식을 먹는 동안으로, 탁발음식을 먹는 동안에서 네 다섯 모금 씹어 삼키는 동안으로, 네 다섯 모금 씹어 삼키는 동안에서 한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으로, 한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쉬는 동안으로 짧아진다. 한호흡 기간에 죽음이 찾아 올 수 있음을 말한다.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부처님은 숨쉬고 있는 기간 내내 죽음의 명상을 하라고 했다. 기대수명대로 삶이 보장 되지 않음을 말한다. 지금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천년 만년 살 것 같지만 죽음은 바로 지금 여기서 호흡하는 순간에도 찾아 올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매 호흡마다 죽음에 대한 새김(maraasati)’을 하였을 어떤 이점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고 익히면 불사에 뛰어들고 불사를 궁극으로 하는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을 얻는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아라.” (A6.19, 전재성님역)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 죽을지 몰라 벌벌떤다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stn576) 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음 그 자체도 두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두려워하는 것이다. 죽음의 불확실성이다.

 

죽음의 조건은 많다. 각종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을 수도 있고, 배타고 가다 배가 침몰해서 죽을 수도 있다. 지하철이 불에 타 죽을 수도 있다. 지진으로 죽을 수도 있다. 멀쩡 하던 체육관 천정이 무너져 죽을 수도 있고, 공연장에서 바닥이 꺼져서 죽을 수도 있다.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길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을 수도 있다.

 

도처에 죽음의 조건이 산재해 있다. 최악의 경우 한호흡 기간에 죽음이 찾아 올 수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기간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왜 염오(厭惡)-이욕(離欲) 해야 하는가?

 

부처님의 열 가지 새김에서 죽음에 대한 새김을 보면(maraasati)’도 하나의 원리라 했다. 하나의 원리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열반으로 이끌기 대문이다. 부처님은 열 가지 새김 중에 어느 것 하나를 닦아도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멸, 곧바로 앎, 완전한 깨달음,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경에서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이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이다. 빠알리어로 ‘nibbidāya virāgāya’라 한. 그런데 여기에 강조의 말 ‘ekanta’가 붙어 ‘ekantanibbidāya virāgāya라 되어 있다. 이를 전재성님은 결정적으로 싫어하여 떠남으로 번역했다. 여기서 ekanta‘sure; unfailing; extreme’의 뜻이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절대적인 역겨움, 탐욕의 빛바램이라고 번역했다.

 

빠알리 정형구 ‘nibbidāya virāgāya에서 닙비다(nibbidā)는 염리(厭離) 또는 염오(厭惡)라 하고, 위라가(viraga)는 이욕(離欲) 또는 이탐(離貪)이라 한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 ‘nibbidā virāgā는 일반적으로 염오-이욕이라 한다. 대상에 대하여 혐오 하는 마음을 일으켜 욕망으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눈과 귀 등으로 아름다운 대상을 접했을 때 괴로운 것으로 보라고 했다. 이는 다음과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형상, 소리, 냄새,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

원하는 것, 사랑스런 것, 마음에 드는 것,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

 

개체가 소멸하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는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모든 세상을 통해 보이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 그와는 정반대가 되네.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 전재성님역)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괴로운 것으로 아는 것이라 했다. 이런 가르침은 세간에서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탐진치로 살아 가는 자들은 즐거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 여기지만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거꾸로 알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로 가는 가르침을 설하였다. 이를 역류도(逆流道)’라 한다.

 

역류도에 따르면 세상의 즐거운 것은 괴로운 것이 되고, 세상의 괴로운 것은 즐거운 것이 된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하게 안다.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즐거운 느낌이 어떻게 향상할 것인가?”(S36.6) 말씀 했다.

 

쇠꼬챙이로 눈을 지질지언정

 

조건발생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즐거운 것이라도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대상에 대하여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극단적인 가르침은 아마 다음과 같은 것이라 본다.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S35.235, 전재성님역)

 

 

눈이 있어서 보고 귀가 있어서 듣는다. 그 중에 강한 대상을 만나면 즐거운 느낌과 함께 갈애가 일어나고 집착이 생겨난다. 그런데 부처님은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라 했다. 갈애와 집착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대상에 대하여 갈애와 집착을 일으킨다면 차라리 불에 달구어진 쇠꼬챙이로 눈이나 귀를 지지는 것이 낫다고 했다. 왜 그럴까? 아름다운 형상, 매혹적인 소리 등에 대하여 갈애를 일으켰을 때 결국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더구나  유혹의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이나 축생으로 떨어질 것이라 했다. 그래서 악처에 떨어지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멀게 하여 갈애와 집착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생략된 번역

 

부처님은 한 순간도 사띠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계속 알아차리라고 했는데 그것이 아누사띠(anusati),   수념(隨念)이다. 수념을 닦으면 싫어 하여 떠날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나까야에 하나의 원리의 품에서는 결정적으로는 말을 붙여서 결정적으로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ekantanibbidāya virāgāya)”라 했다. 빠알리원문에는 모두 열 가지 수념에 대하여 결정적으로라는 뜻의 빠알리 ‘ekanta’가 들어가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번역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새김에의 경에서만 ‘ekanta’에 대한 번역이 되어 있을 뿐 나머지 아홉 가지 수념에서는 ‘ekanta’에 대한 번역이 생략되어 있다. 생략되어 있어도 문맥에는 지장이 없으나 원문과는 다른 것이다. 반면 초불연의 번역에서는 들어가 있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반복구문이 생략 되어 “…”라고 뻬이얄라 처리 되어 있다. 이런 점이 차이가 있다.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이다. 세상사람들이 탐, , 치로 살아 갈 때 부처님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 갈 것을 말씀 했다. 이와 같은 역류도의 삶에 대한 것이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nibbidā viraga)”이다. 특히 ‘viraga’에 대하여 사라짐이라 했는데 이는 이욕또는 이탐을 말한다.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탐욕의 빛바램이라 하여 주석적으로 번역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실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려 놓아야 할 것이 욕망이다. 마치 옷감의 색깔이 바래져 하얕게 되는 것처럼 탐욕이 사라져 갈 때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이욕을 뜻하는 위라가는 탐욕의 사라짐이라 볼 수 있다.

 

욕망이 사라졌을 때 그 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그래서 싫어하여 떠남(nibbidāya), 사라짐(virāgāya), 소멸(nirodhāya), 적멸(upasamāya), 곧바로 앎(abhiññāya), 완전한 깨달음 (sambodhāya), 열반(nibbāāya)”순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Diogenes and Alexander

 

 

 

욕망이 사라졌을 때 두려울 것이 없다. 언제나 당당할 수 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작은 차를 몰아도, 가진 것이 없어도 만족하는 삶을 살아 간다. 그런 당당함은 디오게네스에게서 볼 수 있다. 알렉산더대왕에게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라고 말한 것이다. 소욕(appiccha)과 지족(santuṭṭha)의 삶을 살아 갈 때 무엇이든지 이루어낼 수 있다.

 

 

2016-10-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