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잊지 말자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면 해로운 업을 지을 가능성이 많아진다.” 이 말은 법륜법사의 아비담마 강좌에서 들었다. 유튜브와 인터넷 카페에지견명상원의 아비담마 강좌가 올려져 있는 ‘해로운 마음의 과보’에 대한 것이다.
마음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선심, 2)불선심, 3)과보의 마음, 4)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세 번째 과보의 마음은 선과보심(유익한 마음의 과보)과 불선과보심(해로운 과보의 마음) 으로 나누어진다. 두 가지 과보의 마음 중에서 주로 불선과보심에 대하여 다루어 본다.
불선과보심
과거에 해로운 업을 지었으면 ‘해로운 마음의 과보(불선과보심)’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 해로운 과보의 마음은 어떤 업보를 낼지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기(abyākata)의 마음이라 한다.
현존하는 불선과보심은 과거의 업의 과보의 마음으로서 잠재적인 업을 지을 가능성이 있다. 과거에 해로운 업을 지었기 때문에 현재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 만일 해로운 대상을 만나면 해로운 업을 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해로운 과보의 마음은 어떤 업을 지을지 알 수 없는 무기의 마음이다. 아직 대상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해로운 업을 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현재 해로운 과보의 마음은 과거 해로운 행위로 인하여 그냥 나에게 생긴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생겨난 해로온 과보의 마음은 유익하다거나 해롭다고 판단할 수 없다. 과거의 업의 결과로 그냥 생겼기 때문에 경계를 만나야 발현된다.
선과보심
과거에 유익한 업(선업)을 지었으면 어떻게 될까? 그 업의 과보로 현재 ‘유익한 과보의 마음(선과보심)’이 생겨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말이 있듯이 과거의 유익한 행위가 익어서 현재의 유익한 과보의 마음이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유익한 과보의 마음이 유익한 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익한 업이 될지 안될지는 대상을 접해 보아야 알 수 있다. 다만 유익한 행위를 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유익한 업을 지을 잠재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도둑질할 잠재성향
업의 결과는 업이 아니다. 과거에 해로운 업을 지어서 현재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 결과로서 나타나 있지만, 그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 해로운 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해로운 업을 지을 ‘잠재성향’이 남아 있다. 아직 해로운 업을 지을 대상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업의 결과가 업이라면 무한복제가 될 것이다. 해로운 업을 지었는데 그 결과로서 해로운 업을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해로운 업의 과보의 마음이 생겨났다. 이미 경험한 것이 마음에 잠재성향으로 남은 것이다.
도둑질한 자는 도둑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도둑질한 마음이 도둑질이라고 볼 수 없다. 다만 도둑질할 성향이 남아 있는 것이다. 과거에 도둑질했다고 하여 현재 도둑놈이라 볼 수 없다. 다만 도둑질할 잠재성향이 남아 있는 것이다. 도둑질할지 안할지는 대상을 만나 보아야 알 수 있다. 아직 결과로서 나타나지 않는 잠재의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왜 도둑질 하는가?
우리는 살아 오면서 수 많은 업을 지었다. 때로는 유익한 업을, 때로는 해로운 업을 지었다. 그 업에 대한 과보의 마음은 현존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 내재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업을 지을지 모른다. 대상에 따라 유익한 업을 지을 수도 있고 해로운 업을 지을 수도 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을 만났을지라도 인식하는 그 마음은 업이 될 수 없다. 삼사화합에 의하여 감각의식이 생겨 났다고 하더라도 그 감각의식은 업을 짓지 않는 마음이다. 물건을 보았을 때 가지고 물건이라고 인식하였다 하여 도둑질한 것이라 볼 수 없다. 다만 도둑질 할 잠재적 마음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각의식 그 자체는 업을 짓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해로운 업을 지음에 따라 현재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 생겨났다. 해로운 업을 지을 성향을 타고 난 것이다. 해로운 과보의 마음 자체는 아직 업이 되지 않는다. 대상을 만났을 때 해로운 업을 지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이다. 만일 대상과 만나면 해로운 업을 지을 것이다.
물건을 보았을 때 가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탐욕이 발동한 것이다. 나에게 현재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마음이 일어나기 쉽다. 그래서 물건을 보았을 때 가져가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잠재성향에 대하여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면 이 다음에 해로운 업을 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음행하는 것도 해로운 과보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 살인, 도둑질, 음행을 했기 때문에 그 과보의 결과가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 내재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 살인, 도둑질, 음행이라 볼 수 없다. 대상을 만나야 한다. 대상을 접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다만 살인, 도둑질, 음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해로운 업을 지을 가능성이 높다. 도둑질한 자가 도둑질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끊을 수 없는 것과 같고, 흡연자가 담배를 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악순환의 반복
유익한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유익한 업을 지을 가능성이 높다. 보시를 하는 자는 계속 보시를 한다.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보시에 해당된다. 이는 “아난다여, 축생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백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M142)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람에게 보시하면 그 공덕은 더할 것이다. 하물며 성자에게 보시하면 그 공덕은 얼마나 클까? 이는 과거에 유익한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 과보의 마음이 현재의 마음에 결과로서 나나탄 것이다. 그래서 유익한 과보의 마음을 가진 자는 계속 유익한 업을 지을 가능성이 높다.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원하지 않는 대상을 만났을 때 해로운 업을 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유익한 과보의 마음을 가진 자는 원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 유익한 업을 지을 가능성이 높다.
해로운 업은 해로운 과보를 내고, 해로운 과보는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만들어 낸다. 해로운 과보의 마음은 원하지 않는 대상(물건, 술, 담배, 여자)을 만났을 때 또 다시 해로운 업을 짓게 된다. 악순환이이다. 이를 ‘자기복제’라 한다. 영어로 ‘Self-reproduction’이라 한다. 그래서 최악의 패를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윤회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가 된다.
고통이 함께 하는 신식(dukkhasahagataṃ kāyaviññāṇaṃ)
해로운 과보의 마음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7가지가 있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그리고 받아들이는 마음과 조사하는 마음이다. 여기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은 대상에 대한 부딪침이 약하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다고 한다.
평온이 함께 하는 안식, 평온이 함께 하는 이식, 평온이 함께 하는 비식, 평온이 함께 하는 설식은 마치 솜과 솜이 부딪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신식은 다르다. 대상에 대한 부딪침이 매우 강함을 말한다. 마치 솜을 모루에 올려 놓고 쇠망치로 때리는 것과 같다. 망치와 모루가 부딪치기 때문에 데미지가 매우 큰 것이다. 그래서 신식에 대해서는 ‘고통이 함께하는 신식’이라 한다.
해로운 과보의 마음 중에 신식에 대하여 ‘고통이 함께하는 신식’이라 했다. 과거에 해로운 업을 많이 지은 자들은 현세에서 고통스럽게 살 가능성이 높다. 살인, 도둑질, 음행 등 신체적으로 악업을 지은 자들은 이 생에서 몸의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왜 그럴까?
살인을 한 자라면 또 다시 살인업을 저지를 가능성이 크고, 도둑질한 자는 또 다시 도둑질 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 음행을 일삼던 자 역시 그 과보의 마음으로 또다시 음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이와 같은 업을 저질렀을 경우 거기에 상응하여 신체적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알콜중독자가 간이 나빠져서 알코올중독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것과 같고, 흡연자가 폐가 나빠져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것과 같다. 또 음행을 일삼는 자가 성병에 걸려서 고통받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신식에 대하여 ‘고통이 함께 하는 신식(dukkhasahagataṃ kāyaviññāṇaṃ)’이라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불선업을 짓지 않을까?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원하지 않는 대상과 접촉(phassa)한다. 유익한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원하는 대상과 접촉한다. 우리는 어차피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갖고 태어나면 반드시 원하지 않는 대상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다. 유익한 과보의 마음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원하는 대상 또는 열열히 원하는 대상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윤회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접촉 다음에 느낌(vedana)이 생겨난다. 십이연기에서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느낌이 발생되면 갈애가 일어난다. 이때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연기가 회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느낌에서 알아차려야 한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가기 전에 사띠(sati)하는 것이다.
사띠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현명한 주의기울임이다. 이를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ara)라 한다.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과거에 해로운 업을 지어서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해로운 업을 지을 원하지 대상과 만날 수 있다. 도둑질한 자가 자신도 모르게 남의 물건에 손이 가는 것도 해로운 과보의 마음 때문이다. 이때 알아차려야 한다. 대상에 대하여 접촉하려는 것을 알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이다. 이런 주의 기울임이 사띠로 이동시킨다.
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잊지 말자
우리는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해로운 과보의 마음 때문에 원하지 않는 대상을 만나면 해로운 마음이 작동하게 된다. 이때 알아차려야 한다. 그 대상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그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띠하는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알아 차리는 것이다.
해로운 과보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 원하지 않는 대상을 만났을 때 대부분 또 다시 해로운 업을 짓게 된다. 그러나 현명한 주의 기울임과 함께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면 유익한 업이 된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해로운 업이 되지만 알차리는 순간 유익한 업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띠하는 것에 대하여 “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잊지 않는 것”이라 했다.
2016-10-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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