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이 왜 불선(不善)일까? 아비담마 마음도표와 불선한 마음 8가지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마음, 마음’한다. 유행가 가사에서 “내마음 나도 모르게~”라는 구절도 있다. 변심한 것에 대해 원망하는 가사도 볼 수 있다. 유행가에서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마음’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유행가의 가사도 그렇고 선사들이 말하는 것도그렇다. 선사들은 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들라’고 말한다.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막연한 것이 마음이다. 또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기뻐하다가 슬퍼한다. 아기들처럼 울었다가 금방 웃기도한다. 어제 말한 것과 오늘 말하는 것이 다르기도 하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이다. 대체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일까?
마음의 구조를 알면 마음에 대해 어는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논장을 알아야 한다. 빠알리 삼장 중의 하나인 논장을 공부해야 마음의 메커니즘에 대해 알 수 있다. 아비담마가 대표적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아비달마구사론이라 한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마치 기계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정교하고, 수학의 공식을 보는 것 같다.
불선심(akusala), 선심(kusala), 과보심(vipaka), 작용심(kiriya)
예로부터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이야기 했다. 인간에게 내재 되어 있는 근본마음이 본래부터 선하다든가 본래부터 악하다는 이론이다. 아비담마에서도 선설과 악설을 말한다. 그러나 매우 구체적으로 정의 되어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작용에 대하여 크게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불선심(akusala), 선심(kusala), 과보심(vipaka), 작용심(kiriya)이다.
불선심 과 선심은 문자 그대로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과 착하고 건전한 마음을 말한다. 잘 이해 가지 않는 것은 과보심과 작용심이다. 과보심은 ‘업이숙심’이라 하며 전생이 지은 업의 결과로서 내재 되어 있는 마음이다. 전생에 악업을 지었다면 악업이 과보의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그 악업과 관련된 대상을 만나면 악업을 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과보심에는 불선과보심과 선과보심이 있다. 작용심은 아라한의 마음이라 한다. 어떤 대상을 만나도 업이 되지 않고 단지 작용만 하는 무기의 마음을 말한다.
마음이란?
마음은 시시각각 변한다. 왜 이렇게 마음이 자꾸 변하는 것일까? 그것은 대상이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대상이 자꾸 바뀜에 따라 마음 역시 자꾸 바뀐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제1의 불교적 정의는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 한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 대상이란 무엇일까? 색, 성, 향, 미, 촉, 법이다. 이를 육경이라 한다.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육근이 육경과 접촉 하였을 때 마음이 생겨나는데 이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 하여 육식이라 한다. 이렇게 매순간 육근이 육경과 접촉하여 육식이라는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은 대상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아는 것을 마음이라 한다.
마음의 특징중의 또 하나는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고, 그런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음의 지도
마음의 구조와 마음의 작용을 알려고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탐진치에서 벗어나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한 마음인지 무엇이 불선한 마음인지 알아야 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89가지이다. 여기서 수다원도 등 출세간의 마음 8가지를 빼면 모두 81가지 마음이다. 사람들은 이 81가지 마음이 수시로 일어난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도 이 81가지 마음 때문이다.
89가지 마음에는 선한마음도 있고 불선한 마음도 있다. 대체 마음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 아비담마를 보면 초기경전을 근거하여 마음의 지도를 만들었다. 이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 89가지
不善心 12 |
善心 21 |
無記心 56 | ||||||
異熟無記心 36 |
唯作心 20 | |||||||
세간 의 마음 |
욕 계 54 |
원인 |
재생연결 (19) |
등록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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貪根 (8) |
不善業異熟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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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喜, 邪見○, 行× |
(13) 捨, 眼識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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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喜, 邪見○, 行○ |
(14) 捨, 耳識 |
0 |
||||||
(3) 喜, 邪見×, 行× |
(15) 捨, 鼻識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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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喜, 邪見×, 行○ |
(16) 捨, 舌識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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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捨, 邪見○, 行× |
(17) 苦, 身識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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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捨, 邪見○, 行○ |
(18) 捨, 領受 |
0 |
||||||
(7) 捨, 邪見×, 行× |
(19) 捨, 조사 |
0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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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捨 ,邪見×, 行○ |
善業異熟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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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捨, 眼識 |
0 |
無因 (3) | ||||||
瞋根 (2) |
(21) 捨, 耳識 |
0 |
(28) 捨, 오문전향 | |||||
(9) 憂, 瞋○, 行× |
(22) 捨, 鼻識 |
0 |
(29) 捨, 의문전향 | |||||
(10) 憂, 瞋○, 行○ |
(23) 捨, 舌識 |
0 |
(30) 喜, 미소짓는 | |||||
(24) 樂, 身識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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痴根 (2) |
(25) 捨, 領受 |
0 |
||||||
(11) 捨, 의심상응 |
(26) 喜, 조사 |
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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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捨, 들뜸상응 |
(27) 捨, 조사 |
0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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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業異熟 (8) |
有因 (8) | |||||||
(31) 喜, 智○, 行× |
(39) 喜, 智○, 行× |
3 |
○ |
○ |
(47) 喜, 智○, 行× | |||
(32) 喜, 智○, 行○ |
(40) 喜, 智○, 行○ |
3 |
○ |
○ |
(48) 喜, 智○, 行○ | |||
(33) 喜, 智×, 行× |
(41) 喜, 智×, 行× |
2 |
○ |
○ |
(49) 喜, 智×, 行× | |||
(34) 喜, 智×, 行○ |
(42) 喜, 智×, 行○ |
2 |
○ |
○ |
(50) 喜, 智×, 行○ | |||
(35) 捨, 智○, 行× |
(43) 捨, 智○, 行× |
3 |
○ |
○ |
(51) 捨, 智○, 行× | |||
(36) 捨, 智○, 行○ |
(44) 捨, 智○, 行○ |
3 |
○ |
○ |
(52) 捨, 智○, 行○ | |||
(37) 捨, 智×, 行× |
(45) 捨, 智×, 行× |
2 |
○ |
○ |
(53) 捨, 智×, 行× | |||
(38) 捨, 智×, 行○ |
(46) 捨, 智×, 行○ |
2 |
○ |
○ |
(54) 捨, 智×, 行○ | |||
색 계 15 |
(55) 初禪定 |
(60) 初禪定 |
3 |
○ |
(65) 初禪定 | |||
(56) 第二禪定 |
(61) 第二禪定 |
3 |
○ |
(66) 第二禪定 | ||||
(57) 第三禪定 |
(62) 第三禪定 |
3 |
○ |
(67) 第三禪定 | ||||
(58) 第四禪定 |
(63) 第四禪定 |
3 |
○ |
(68) 第四禪定 | ||||
(59) 第五禪定 |
(64) 第五禪定 |
3 |
○ |
(69) 第五禪定 | ||||
무색계 12 |
(70) 空無邊處定 |
(74) 空無邊處定 |
3 |
○ |
(78) 空無邊處定 | |||
(71) 識無邊處定 |
(75) 識無邊處定 |
3 |
○ |
(79) 識無邊處定 | ||||
(72) 無所有處定 |
(76) 無所有處定 |
3 |
○ |
(80) 無所有處定 | ||||
(73) 非想非非想處定 |
(77) 非想非非想處定 |
3 |
○ |
(81) 非想非非想處定 | ||||
출세간 마음 |
출세간 8 |
(82) 수다원 도 |
(86) 수다원 과 |
3 |
||||
(83) 사다함 도 |
(87) 사다함 과 |
3 |
||||||
(84) 아나함 도 |
(88) 아나함 과 |
3 |
||||||
(85) 아라한 도 |
(89) 아라한 과 |
3 |
이것이 마음의 지도이다. 마음은 크게 세간의 마음 81가지와 출세간의 마음 8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세간의 마음 8가지는 성자들의 마음이므로 그다지 동요가 없다. 그러나 세간의 81가지는 불선한 마음, 선한 마음, 불선업과보심(불선업이숙) , 선업과보심(선업이숙) 등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89가지 마음은 한 순간에 오로지 하나의 마음만 일어난다. 그래서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이다. 한순간에 선한 마음이 일어나면 나머지는 잠재적인 마음으로 된다.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이라면 매순간 다른 마음이 된다. 마음이 자꾸 변하는 것도 대상에 따라 마음이 달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에서 마음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할 때는 번호와 함께 말하는 경우가 많다. 89가지 마음에다 고유의 번호를 매겨 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번 마음의 경우 ‘(1) 喜, 邪見○, 行×’라 되어 있는데, 이는 ‘기쁨이 함께 하고 사견이 있고 자극받지 않는 마음 하나’라고 설명된다. 불선한 마음 8가지 중에 첫 번째로 설명된 마음이다. 이런 식으로 조건에 따라 분류해 놓은 것이 출세간을 막론하고 89가지 마음이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 8가지
마음의 도표에서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불선심이다. 이는 도표에서 1번에서 12번까지이다. 89가지 마음 중에서 앞에 배치해 둔 것은 그 만큼 의미가 있어서 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탐, 진, 치에 대한 것이다. 불교수행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소멸해야 될 것이 탐, 진, 치이다. 그렇다면 탐, 진, 치의 마음이라 무엇일까?
마음도표를 보면 불선심 12가지 마음은 크게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8개),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2개), 어리석음을 뿌리(2개)로 하는 마음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흔히 말하는 탐, 진, 치는 불선한 마음의 대표주자라 볼 수 있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는 8가지가 있다. 마음도표에서는 “(1) 喜, 邪見○, 行×, (2) 喜, 邪見○, 行○, (3) 喜, 邪見×, 行×, (4) 喜, 邪見×, 行○, (5) 捨, 邪見○, 行×. (6) 捨, 邪見○, 行○. (7) 捨, 邪見×, 行×, (8) 捨 ,邪見×, 行○”라 되어 있다. 마치 암호문을 보는 것 같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을 빠알리어와 함께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Somanassasahagataṃ diṭṭhigatasampayuttaṃ asaṅkhārikamekaṃ
Somanassasahagataṃ diṭṭhigatasampayuttaṃ sasaṅkhārikamekaṃ
somanassasahagataṃ diṭṭhigatavippayuttaṃ asaṅkhārikamekaṃ
somanassasahagataṃ diṭṭhigatavippayuttaṃ sasaṅkhārikamekaṃ
upekkhāsahagataṃ diṭṭhigatasampayuttaṃ asaṅkhārikamekaṃ
upekkhāsahagataṃ diṭṭhigatasampayuttaṃ sasaṅkhārikamekaṃ
upekkhāsahagataṃ diṭṭhigatavippayuttaṃ asaṅkhārikamekaṃ
upekkhāsahagataṃ diṭṭhigatavippayuttaṃ sasaṅkhārikamekaṃ
1)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2)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
3)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4)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
5)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6)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
7)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8)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
이것이 누구에게나 내재 있는 불선심이다. 언제든지 조건만 형성되면 발현될 수 있는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8가지 마음을 보면 기쁨과 평온, 사견이 결합되었는지, 자극받았는지로 구분된다.
사견(diṭṭhi)에 대하여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사견(diṭṭhi)’이다. 사견은 빗나간 견해를 말한다. 정견(samma diṭṭhi)과 반대되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견이라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은 모두 사견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사견은 어떤 것일까?
사견은 업(kamma)과 업의 과보(vipaka)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 과보가 즉각적으로 올 수도 있지만 나중에 올 수도 있다. 과보가 익을 조건이 되어야 과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물건을 훔쳤을 때 그 즉시 들켰다면 그 즉시 과보를 받게 된다. 그러나 발각되지 않았다면 언젠가 과보를 받게 된다. 먼 후일 조건이 형성이 되면 훔친 것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이생에서 받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받고, 차차기생에서도 받을 수도 있다. 한번 지은 행위는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다만 달리 익기 때문에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이라 한다.
업은 달리 익는다. 업이 달리 익기 때문에 인간의 미래는 알 수 없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도 업이 달리 익기 때문이다. 한번 행위를 하면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따른다. 다만 언제 업보로 나타날지 모른다. 이와 같은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것이 정견(samma diṭṭhi)이다.
부처님은 업에 대한 정견을 설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며,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M135) 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부처님은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 라 하여 업이 정견임을 설하였다.
사성제를 출세간의 정견이라 한다. 반면 세간의 정견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업정견은 부처님 당시 숙작인론, 존우화작설, 우연론 등 소위 삼종외도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데 탐욕에 뿌리박은 8가지 마음의 가장 큰 특징은 ‘사견(micchā diṭṭhi)’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사견과 관련하여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 8가지를 보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사견과 결합한(diṭṭhigatasampayuttaṃ)’ 것이고, 또하나는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diṭṭhigatavippayuttaṃ)’ 것이라고 표현 되어 있다. 사견과 결합한 것은 업과 업의 과보를 모르는 것이다.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것은 업과 업의 과보를 알긴 알지만 탐욕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불선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
법륜법사의 아비담마 강좌에서
탐욕을 뿌리로 하는 8가지 마음, 즉 마음도표에서 1번부터 8번 까지 마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한 강좌가 있다. 지견선원 법륜법사의 아비담마 강좌가 그것이다. 유튜브와 카페에 올려져 있는데 카페에 올려져 있는 동영상 ‘탐욕에 뿌뿌리박은 마음’ 강좌에서는 8가지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 대하여 예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1)
마음도표 1번은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喜, 邪見○, 行×)’이다. 마치 암호문 같은 이 말은 어떤 뜻일까? 법륜법사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어떤사람이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즐겁게 음식과 음료들을 즐기고 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누구나 다 해당될 수 있다.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라는 말은 ‘사견과 결합한 것(diṭṭhigatasampayuttaṃ)’을 뜻한다. ‘즐겁게’라는 말은 ‘기쁨이 함께(Somanassasahagataṃ)’ 하는 것을 말한다. ‘즐겁게 음식과 음료들을 즐기고 있다’라는 말은 ‘스스로 그냥 즐긴다’라는 말로서 ‘자극받지 않은 것(asaṅkhārikamekaṃ)’임을 말한다. 따라서 식당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먹는 행위는 욕망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한다. 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욕망으로 음식이나 술을 접하였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 오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즐기기 위해 그냥 먹고 그냥 마시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살아 간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다. 술이 땡기면 술을 마시고 성적 욕망이 일어나면 성적교섭을 행한다. 이런 행위를 분석해 보면 크게 탐욕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소멸로 목표로 하기 때문에 욕망 충족을 위한 즐기는 삶은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를 마음도표 1번에 위치해 놓았을 것이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2)
마음도표 2번항은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喜, 邪見○, 行○)’이다. 1번과 차이가 있다면 ‘자극 받은 것(sasaṅkhārikam)’이다. 1번 마음에서는 자극받지 않는 마음이라 하여 그냥 스스로 음식을 즐긴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극 받은 것이란 무엇일까?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사람이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의 친구에게 설득을 받은 후에
영화를 즐겁게 본다.”
‘친구에게 설득을 받은 후에’라는 말이 자극받은 마음이다. 친구가 영화보러 가자고 했을 때 따라가서 영화를 즐긴 것이다. 여기서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사견과 결합한 것을 말한다. ‘즐겁게본다’는 것은 ‘기쁨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견이다. 욕망을 즐기는 것이 업을 짓는 것이고, 업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3)
“한 여자가
유쾌하게 새 옷을 입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 옷에 대한 집착이
해로운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쾌하게’는 기쁨(somanassa)을 뜻한다. 소마낫사는 정신적 행복이라 번역된다.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도마낫사(domanassa)라 한다. 빠알리어 so는 good의 뜻이고, 빠알리어 do는 bad의 뜻이다. 또 manassa는 정신을 뜻한다. 따라서 somanassa는 정신적 행복, domanassa는 정신적 괴로움으로 번역된다.
한 여자는 자신이 좋아 하는 옷을 입고 즐거워 하고 있다. 그러나 옷에 대한 집착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해로운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것(diṭṭhigatavippayuttaṃ)’이다. 또 ‘유쾌하게 새 옷을 입는다’라 했을 때 스스로 입는 것이다. 이는 누가 권유한 것이 아니라 그냥 스스로 입는 것이다. 그래서 자극받지 않은(asaṅkhārikam) 마음이다.
좋아 하는 옷을 입고 즐거워 하고 있는 것은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 때문이다. 마치 술이 해로운 것임을 알면서도 즐기는 것과 같다.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 도둑질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喜, 邪見×, 行×)’라 한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4)
“한 소녀가
업과 업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친구들의 요청에 순응하여
현대적인 음악을 즐겁게 듣는다.”
한소녀가 음악을 듣고 있다. 기본적으로 ‘기쁨이 함께 하는 (somanassasahagataṃ)’ 마음이다. 친구들이 좋다고 말한 음악을 듣는 것이다. 이는 권유받고 ‘자극받은(sasaṅkhārikam)’ 마음이다. 그런데 업과 업에 대한 과보는 알고 있다. 이는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diṭṭhigatavippayuttaṃ)’ 마음이다.
누구나 즐거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친구들이 권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다. 누구나 술을 마실 수 있다. 친구들이 술 마시자고 권유했을 때 유쾌하게 술을 즐길 수 있다. 누군가 음행을 할 수 있다. 술마시면서 친구들이 외딴 곳 관사에 있는 여교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강간을 하는 것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친구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즐겼다면 마음도표 4번 항에 해당될 것이다. 모두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이고,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 (喜, 邪見×, 行○)’라 볼 수 있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5)
“한 소년이
약간의 집착을 가지고 있지만
기쁨이 없이 업에 대한 지혜도 없이
소박한 밥을 소금과 함께 먹는다.”
마음도표 5번 항부터는 기쁨(somanassa)이 평온(upekkh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upekkhāsahagataṃ)’ 마음이 된다. 소년이 기쁨이 없이 밥을 먹는 것은 ‘평온이 함께 한(upekkhāsahagataṃ) 마음’ 이다. 그렇다고 사선정에서와 처럼 평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맹하고 지둔한 상태를 말한다. ‘업에 대한 지혜도 없이’라는 말은 ‘사견과 결합한(diṭṭhigatasampayuttaṃ)’ 마음이다. ‘소박한 밥을 소금과 함께 먹는다’라는 것은 그저 맹하니 밥먹을 때가 되서 먹기 때문에 ‘자극받지 않는(asaṅkhārikam)’ 마음이다.
평온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다. 지둔한 삶을 사는 자가 평온해 보일지 모르지만 업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업과 업의 과보를 모르고 욕망으로 사는 자의 평온은 기본적으로 불선한 마음에 기반한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捨, 邪見○, 行×)’라 했을 것이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6)
“한 소녀가
그녀의 새 옷이 아름답다는 설명을 어머니가 한 후에
그 옷에 대한 진가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중립적인 느낌을 갖고 있고
업에 대한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
맹하고 지둔한 평온이 함께 하는 소녀에 대한 것이다. 소녀는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옷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자극받은(sasaṅkhārikam)’마음에 해당된다. 중립적인 느낌이라는 것은 ‘평온이 함께 한(upekkhāsahagataṃ)’것을 말한다. ‘업에 대한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견이 함께 함 (diṭṭhigatasampayuttaṃ)’ 을 말한다.
평온이 함께 하는 마음은 중립적인 느낌을 특징으로 한다. 느낌에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에 해당된다. 이런 중립적인 느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조건에 따라 즐거운 느낌으로 바뀔 수 있고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 수 있다. 지둔하고 맹한 평온한 느낌도 즐거운 대상을 보았을 때 거머쥐려 하고, 싫은 대상을 보았을 때 밀쳐 내려 할 것이다. 욕망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립적인 마음은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 (捨, 邪見○, 行○)’라 했을 것이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7)
“업에 대해 생각하면서,
당신은 평온한 느낌을 가지고 커피를 마시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 맛을 감상하고 있다.”
업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diṭṭhigatavippayuttaṃ)’ 것을 말한다. 업과 업의 과보를 알고 있음을 말한다. ‘평온한 느낌을 가지고’라는 말은 ‘평온이 함께 한(upekkhāsahagataṃ)’ 것으로써 맹하고 지둔한 평온을 뜻한다. ‘여전히’라는 말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asaṅkhārikam)’을 말한다.
누구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그러나 맛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면 욕망으로 마시는 것이다. 맛을 감상하며 마시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가 비록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잘 알지라도 맛에 대한 갈애로 커피마시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면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 때문이다. 술도 마찬가지이고 담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捨, 邪見×, 行×)’라 했을 것이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8)
“한 여자가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여성 판매원에게서
많은 설득을 받은 후에 마지 못해 새옷을 산다.
판매원에게 설득당해 옷을 샀다는 것은 ‘자극 받은(sasaṅkhārikam)’ 것이다.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음 (diṭṭhigatavippayuttaṃ)’ 을 뜻한다.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음에도 설득당해 옷을 샀다는 것은 지둔하고 맹하다고 볼 수 있다. ‘평온이 함께 하는 것 (upekkhāsahagataṃ)’은 중립적인 평온으로서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누군가 설득하면 그대로 넘어 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경계에 부딪치면 실천이 되지 않는다. 착하게 사는 사람도 누군가 꼬드기면 넘어 간다. 누군가 도둑질 하자고 제안했을 때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을 생각한다면 멈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설득에 넘어갔다면 탐욕에 뿌리를 둔 지둔하고 맹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 (捨 ,邪見×, 行○)’라 했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왜 불선(不善)인가?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 간다.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평온하게 살아 가는 일상을 보면 대게 먹고 마시고 입고 거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 모두 불선(不善: akusala)이라는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그렇다.
평범한 일상이 불선이라는 것은 마음도표에서 확인 되고 있다. 기쁨과 함께 하는 또는 평온과 함께 하는 사견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또는 자발적인 것인지 권유받은 것인지에 따라 생겨나는 마음은 모두 불선한 것으로 본다. 특히 8가지 불선심이 그렇다.
8가지 불선심을 보면 공통적으로 탐욕이 뿌리박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라도 탐욕이 뿌리박은 마음은 모두 불선으로 본다. 이때 탐욕은 성냄, 어리석음과 함께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다. 이는 유아로도 설명 될 수 있다. 탐, 진, 치에 뿌리박은 마음은 모두 유아라 볼 수 있다.
탐욕의 마음을 내는 것은 즐거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쥐려 한다. 이는 욕망이다. 따라서 즐거움과 욕망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8가지 마음은 결국 즐거움으로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다.
8가지 불선심중에서 첫번째 항을 보면‘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라 했다. 이와 관련된 예문이 “어떤사람이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즐겁게 음식과 음료들을 즐기고 있다.”이다. 음식 먹는 것 자체가 불선심이라는 것이다. 왜 불선심이라 했을까? 즐기면서 먹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욕망으로 먹는 것이다. 누가 먹는가? 내가 먹는 것이다.
마음도표를 보면 하나의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무아이다.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 마음도표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표를 보면 불선심 12가지와 함께 선심이 21가지 소개 되어 있다. 선심 21가지 중에 욕계에 대한 것은 8가지이다. 나머지는 색계와 무색계, 출세간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불선심12가지와 선심 21가지 차이는 무엇일까? 크게 보시, 지계, 수행으로 볼 수 있다.
불선심 12가지에는 보시, 지계, 수행에 대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불선심 12가지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뿌리로 한 것이다. 보시하지 않고, 지계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고 것은 모두 불선심이다. 평범하게 살아 가는 사람들, 특히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면 그만이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시, 지계, 수행이 없다면 모두 불선심에 해당된다.
불선심은 불선업을 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뿌리내린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평범한 일상이 불선이고 불선업이 되기 쉬운 것은 자아관념때문이라 볼 수 있다.
보시, 지계, 수행으로
우리 주변에는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일평생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 일평생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보시, 지계, 수행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모두 불선업을 지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그런가? 일상의 삶이라는 것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마음 도표는 부처님가르침을 한눈에 보여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크게 불선심, 선심, 과보심, 작용심 이렇게 네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불선심과 선심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보시, 지계, 수행의 삶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로운 삶이다.
불교에서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다. 아비담마 마음도표는 결국 무아의 삶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로운 삶이다. 단지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살자는 것이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하여 무아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유아론적 삶은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불선하게 사는 것이 된다. 반면 무아론적 삶은 보시, 지계, 수행으로 살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하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 유아론자들이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결국 불선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무아론자들은 지혜롭게 살기 때문에 선한 삶을 살게 된다. 아비담마 마음도표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2016-10-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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