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 님들에게 공덕을 회향하면, 담장 밖의 경(Khp7)
수행자의 향기
도에도 향기가 있을까? 도에도 향기가 있다. 도를 닦는 도인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오분향례에서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라는 말이 있듯이 계행이 청정한 자에게 계향이 있고, 삼매를 많이 닦은 자에게 청정한 정향이 있고, 지혜로운 자에게 역시 청정한 혜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많이 한 자에게는 수행자의 향내가 난다.
수행자를 만나 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미디어붓다에 칼럼 100회를 맞이 했다. 미디어붓다에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올린지 1년 8개월만에 100회가 된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이학종대표기자가 저녁식사를 제안했다. 도이법사도 참석했다. 도이법사 역시 미디어붓다에 칼럼을 올리고 있다. 그렇다고 진수성찬을 먹은 것이 아니다. 청국장집에서 밥을 먹은 것이다.
식사하면서 주로 법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친구나 일반사람들과의 식사 때는 술을 함께 하며 세상돌아 가는 이야기 등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수행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의 식사는 다르다. 주로 불교관련 이야기를 한다. 공통적인 관심사이어서일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식사가 끝나고 도이법사가 커피를 샀다. 커피점에서도 역시 법에 대해 이야기 했다.
미붓아카데미
도이법사의 위빠사나 강좌에 네 명이 참석 했다. 이제까지 두 명이 참석 하다 네 명이 되니 작은 방이 꽉 차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방도 곧 비울 것이라 한다. ‘미붓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2년 계약으로 임대 했는데 11월 말이 만료 기간이라 한다. 지난 2년 동안 많은 강좌가 열렸지만 최근에는 거의 비어 있다시피한 것이다.
빈방을 누군가 계속 사용하면 문제 없다. 그러나 빈방인채로 있다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비용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서 문을 닫게 될 것이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이학종기자는 ‘장소가 없어서 강좌를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라 했다. 누구나 강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해 주고 있음에도 사용자가 없음을 개탄한 것이다.
보시에 대한 법문
청공거사, 이학종대표기자, 미붓아카데미 총무보살과 함께 도이법사의 법문을 들었다. 경행을 하고 좌선을 하고 인터뷰를 하고 차담을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저녁 10시에 끝나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도이법사는 준비한 프린트물을 준비했다. 손으로 직접 쓴 것이다. 매번 법문할 때 마다 새로운 프린트물을 준비하는데 이번 강좌에서는 보시에 대한 것이다.
정성으로 작성한 프린트물이다. 한번 듣고 나면 잊어 버린다. 새겨 둘만한 내용은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보시에 대한 가르침도 그렇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보시이지만 프린트물을 보니 ‘보시란 무엇인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보시 공덕에 대하여
절에 가면 스님들은 보시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육바라밀에서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이 보시바라밀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서 실천해야 할 아름다운 덕목으로 강조된다. 초기불교에서도 보시는 가장 먼저 언급된다. 이는 부처님의 차제설법과도 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보시, 지계, 수행 순으로 설법했기 때문이다. 보시를 하면 어떤 공덕이 기대될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M142)’에서 잘 표현 되어 있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다여, 축생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백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 부도덕한 일반 사람들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천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 도덕적인 일반 사람들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십만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난 밖의 사람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천억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 흐름에 든 경지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분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갚음이 기대된다. 하물며 흐름에 든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M142)
이른 아침 학의천을 지나 일터로 향한다. 작은 다리가 하나 있는데 다리 밑에는 팔뚝만한 물고기 떼가 있다. 불과 20년 전 까지만 해도 악취가 나는 썩은 하천이었다. 지금은 생태하천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물고기, 백로, 청둥오리 등이 한가로이 노니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학의천을 찾는 사람 중에는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다. 준비한 과자부스러기 같은 것을 던지면 팔뚝만한 잉어들이 파닥이며 떼거리로 달려 든다. 이런 것도 축생에게 보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축생에게 보시하면 백 배의 공덕이 기대된다고 했다. 부도덕한 일반 사람들에게 보시한다면 천 배가 된다고 했다. 도덕적인 사람은 십만 배라 했다. 지금 물고기떼에 백원 어치 과자부스러기를 던져 주면 그 백 배인 만원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걸인에게 만원을 보시했을 때 천 배인 천만원이 생겨나는 것일까?
종교인들이 말하는 보시공덕
종교인들이 보시공덕을 이야기 하면서 만원을 보시하면 그 백배 또는 천배의 과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현생에서 금전적으로 보상 받는 것이 아니다. 백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고 했을 때 주석에서는“백 번의 생을 거치면서 그것은 수명, 아름다움, 행복, 힘과 지혜를 부여하고 혼란을 제거한다.”(Pps.V.71) 라고 되어 있다.
도덕적인 사람에게 보시하면 십만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고 했다. 이는 십만 생 동안 수명, 아름다운 용모, 행복, 힘, 지혜 라는 다섯 가지 이익이 기대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난 밖의 사람에게 보시한다면 천억 배라 했다. 천억 생 동안 다섯 가지 이익이 기대 되는 것이다. 흐름에 든 경지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분에게 보시한다면 한량 없는 생동안 이익이 기대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천원짜리 또는 만원짜리 한장을 복전함에 집어 넣고 당장 백배, 천배의 이익을 기대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자신에게 베푸는 보시
보시를 우리말로 베풂이라 한다. 사회에서는 나눔이나 기부라는 말도 많이 사용한다. 많이 가진 자가 약간 떼어 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진정한 보시는 그냥 주는 것이다. 이를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라 했다. 이를 속되게 말하면 티내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냥 준다고 했을 때 사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다. 보시는 남에게 주지만 결국 자기에게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축생에게 보시하면 백배의 갚음이 기대된다고 했다. 이는 백생 동안 수명, 용모 등 다섯 가지 이익이 기대되는 것을 말한다. 현생에 백 배의 이익을 기대한다면 불순한 것이다.
보시는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것이다. 보시란 남을 통해 자기에게 주는 것이 된다. 그런 보시는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매우 수승하다. 수행자들에게 보시하면 한량 없는 공덕이 기대된다고 했다. 이는 다섯 가지 이익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음식을 보시하면 보시하는 자는 보시 받는 자에게 다섯 가지 좋은 점을 베푸는 것이다.”(A5.37) 라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스스로 자신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에게 음식을 보시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베푼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이익으로 “수행승들이여, 그는 수명을 베풀고, 용모를 베풀고, 행복을 베풀고, 기력을 베풀고, 총명을 베푸는 것이다.”(A5.37) 라 한 것이다.
담장 밖의 경(Khp7)에서
보시는 결국 자신에게 배푸는 행위이다. 남을 통해 자신에게 베푸는 행위는 ‘회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회향의 의미는 조상에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은 모든 보시공덕을 아귀로 태어난 조상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체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16대국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왕에 대한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어느 날 빔바사라왕은 잠을 못 이루었다. 부처님이 성을 방문했을 때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했다. 그리고 법문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에 들었다. 그 날 밤 빔비사라왕은 잠에 들려 하였으나 소란스러워 잠을 자지 못했다. 그것은 죽은 조상이 아귀가 되어 잠을 자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아귀들은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을 올린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공덕이 한량 없이 큰 것을 알고서 공덕회향을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기대와 어긋나게 잠을 자려 한 것이다. 그래서 공덕을 나누어 가지지 못한 아귀들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빔비사라왕의 잠을 방해 한 것이다.
밤새 무서움에 떤 빔비사라왕은 다음날 부처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이에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에게 공덕을 회향할 것을 말씀 해 주었다. 이에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다시 공양을 하고 법문을 들었다. 이번에는 “이 공양공덕이 친지들에게 이르기를!”라며 아귀가 되어 죽은 조상에게 회향했다. 이것이 쿳다까니까야 쿳다까빠타(Khuddakapāṭha)에 실려 있는 ‘담장 밖의 경(Tirokuḍḍasutta, khp7)’이다. 전재성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sandhisiṅghāṭakesu ca,
Dvārabāhāsu tiṭṭhanti,
āgantvāna sakaṃ gharaṃ.
담장 밖의 거리
모퉁이에 있으면서
가신 친지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문기둥에 서있나이다.
2.
khajjabhojje upaṭṭhite,
Na tesaṃ koci sarati
sattānaṃ kammapaccayā.
여러 가지 음식과
많은 음료를 차렸으나
뭇삶들의 업으로 인해
아무도 님들을 알아채지 못하나이다.
3.
ye honti anukampakā,
Suciṃ paṇītaṃ kālena,
kappiyaṃ pānabhojanaṃ.
연민에 가득 차서
가신 친지들에게
제 철의 정갈하고 훌륭하고
알맞은 음식과 음료를 헌공하오니,
4.
“Idaṃ vo ñātinaṃ hotu,
sukhitā hontu ñātayo!”
Te ca tattha samāgantvā,
ñātipetā samāgatā,
가신 친지들을 위한 것이니
친지들께서는 행복하소서.
여기에 모여 친지의 가신 님들도 함께 했으니
풍요로운 음식의 성찬에 진실로 기뻐하소서.
5.
~ sakkaccaṃ anumodare:
“Ciraṃ jīvantu no ñātī!
Yesaṃ hetu labhāmase,
Amhākañ-ca katā pūjā,
dāyakā ca anipphalā!”
‘우리가 얻었으니
우리의 친지들은 오래 살리라.
우리에게 헌공했으니
시주에게 과보가 없지 않으리.’
6.
Na hi tattha kasī atthi,
gorakkhettha na vijjati,
Vaṇijjā tādisī natthi,
hiraññena kayākkayaṃ.
Ito dinnena yāpenti,
가신 님들이 사는 곳
거기에는 농사도 없고 목축도 없고
장사도 없고 황금의 거래도 없이
보시 받은 것으로 연명하나니.
7.
yathā ninnaṃ pavattati,
Evam-eva ito dinnaṃ,
petānaṃ upakappati.
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계곡으로 흐르듯
이처럼 참으로 보시가 이루어졌으니
가신 님들을 위해 유익한 것이나이다.
8.
Yathā vārivahā pūrā
paripūrenti sāgaraṃ,
Evam-eva ito dinnaṃ,
petānaṃ upakappati.
넘치는 강물이
바다를 채우듯
이처럼 참으로 보시가 이루어졌으니
가신 님들을 위해 유익한 것이나이다.
9.
ñātimittā sakhā ca me,”
Petānaṃ dakkhiṇaṃ dajjā,
pubbe katamanussaraṃ.
‘나에게 베풀었다. 나에게 선행을 했다.
그들은 나의 친지, 친구, 그리고 동료였다.’라고
예전의 유익한 기억을 새기며
가신 님들에게 헌공해야 하느니라.
10.
yā caññā paridevanā,
Na taṃ petānam-atthāya,
evaṃ tiṭṭhanti ñātayo.
이처럼 친지들이 서있는데
울거나 슬퍼하거나
달리 비탄에 잠기는 것은 헛되이
가신 님들을 위하는 것이 아닐지니라.
11.
saṅghamhi suppatiṭṭhitā,
Dīgharattaṃ hitāyassa,
ṭhānaso upakappati.
그대가 바친 이 헌공은
참모임에 의해 잘 보존되었으니
오랜 세월 그것이 축복한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유익한 것일지니라.
12.
So ñātidhammo ca ayaṃ nidassito
Petānapūjā ca katā uḷārā,
Balañ-ca bhikkhūnam-anuppadinnaṃ,
Tumhehi puññaṃ pasutaṃ anappakaṃ!
친지들에 대한 의무가 실현되었고
가신 님들을 위한 훌륭한 헌공이 이루어지니
수행승들에게 크나큰 힘이 부여되었고
그대들에 의해서 적지 않은 공덕이 생겨났느니라.
(Tirokuḍḍasutta-담장 밖의 경, 쿳다까니까야 khp7,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전재성님이 편역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예경지송 ‘추모경송품’에 실려 있는 것이다. 장례식장이나 제사 등 추모행사가 있을 때 낭송하는 경이다. 그래서 약간 고풍스럽게 ‘느니라’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제사의 당위성
‘담장 밖의 경’을 보면 제사지낼 당위성이 있다. 죽은 조상 중에 아귀로 태어난 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귀계는 늘 굶주리는 세상이다. 이는 6번 게송에서 “거기에는 농사도 없고 목축도 없고 장사도 없고 황금의 거래도 없이 보시 받은 것으로 연명하나니”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굶주린 아귀를 위하여 먹을 것 등을 공양하는 것에 대하여 회향하는 것이라 했다.
굶주린 아귀는 부모일 수도 있고 먼 조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굶주린 아귀는 사실상 모든 뭇삶이라 볼 수 있다. 한량 없는 윤회에서 언젠가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9번 게송을 보면 “그들은 나의 친지, 친구, 그리고 동료였다.”라고 예전의 유익한 기억을 새기며 헌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는 최상품의 음식이 올려진다. 그래서 4번 게송을 보면 “풍요로운 음식의 성찬”이라 했다. 과일 역시 최상품이어야 한다. 이는 3번 게송에서 “제 철의 정갈하고 훌륭하고 알맞은 음식과 음료”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제사상의 상차림에 대한 것이 간접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 들지 않는
보시의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보시에도 원칙이 있다. 보시하는 자의 품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보시는 공손하게, 지극한 마음으로, 자기 손으로 직접해야 한다. 또 보시는 쓰다가 남은 것이나 버리는 것을 주어서는 안되고, 쌀쌀하게 대해서도 안된다. 마음 속으로 우러나오는 보시, 순수무잡한 마음의 보시이어야 한다. 그런 보시품은 식사, 마실것, 머물곳, 약품, 옷, 탈것, 꽃, 향, 등불 등 유용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당된다.
공덕을 지으면 회향할 줄 알아야 한다. 공덕은 물질적인 것과 달리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공덕을 지으면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만, 이를 회향하면 타인에게도 이익이 된다. 특히 아귀가 된 조상에게 회향하면 그들을 선처에 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보시 등 공덕을 지었을 때 반드시 회향하라고 했다.
공덕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물건은 나누면 줄어든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공덕을 타인에게 회양하는 것은 조금도 줄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는 것이 회향공덕이다. 이는 8번 게송에서 “넘치는 강물이 바다를 채우듯”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공덕을 회향하면 가신 님들에게도 이익이고 자신에게도 이익인 것이다. 가신 님들에게 이익인 것은 11번 게송에서 “오랜 세월 그것이 축복한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유익한 것일지니라.”라 한 것에서 알 수 있고, 자신에게 이익인 것은 마지막 게송에서 “그대들에 의해서 적지 않은 공덕이 생겨났느니라.”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보존하기 힘든 재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보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많은 재산을 가진 자가 보시하지 않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 그 많은 재산을 죽었을 때 가져 갈까? 죽어서 재산을 가져 갈 수 없다. 문제는 살아 있을 때 재산도 지켜 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자가 있다. 그러나 통치자를 잘못 만나면 재산이 모두 몰수당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5공화국시절 국제그룹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의 눈 밖에 벗어난 것이다. 이런 일은 고대인도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왕에게 재산을 빼앗기는 것이다. 전쟁으로 재산이 없어질 수도 있고 천재지변으로 재산이 사라질 수 있다. 평생 애써 모은 재산을 보시 등 유용하게 쓰지 않았을 때 남의 것이 되거나 사라질 위험은 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훌륭한 아들이 일하고 노력하고 분투하여 재물을 얻으면, 그는 그 재물을 보존하기 위해 '나의 재산을 왕들이 빼앗지 않을까, 도둑들이 빼앗지 않을까, 불이 태워버리지 않을까, 홍수가 휩쓸지 않을까, 사랑하지 않는 상속자가 빼앗지 않을까,'라고 고통과 불쾌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가 그 재물을 수호하고 보존하려 해도 왕들이 빼앗고 도둑들이 빼앗고, 불이 태워버리고 흥수가 휩쓸어버리고, 사랑하지 않는 상속자가 빼앗아버리면, 그는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애통하고, 가슴을 치며 울며 이와 같이 '나의 활동은 헛된 것이고 나의 노력은 무익했다.'라고 미망에 떨어진다.” (M13)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져도 내 손을 떠나 있으면 내 것이 아니다. 은행에 아무리 많은 돈을 예금해 놓았어도 이를 찾지 않는다면 은행의 것이다. 아무리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어도 내버려 둔다면 살고 있는 자의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 먹고 자고 입는 것 이외의 재산은 ‘잉여’에 지나지 않는다.
막대한 재산이 있다고 하지만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다. 경에서는 왕이나 도둑이 빼앗아 갈 것이라 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재벌이 해체되거나 부도가 나는 등 재산은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또한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평생모은 재산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중병에 걸렸을 때 병원비로 전 재산을 다 써 버릴 수도 있다. 심지어 상속자가 재산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고 했다.
약탈될 수 없는 일곱 가지 보시
평생모은 재산을 허무하게 빼앗길 수 있다. 그럴 때 “나의 활동은 헛된 것이고 나의 노력은 무익했다.”(M13) 라고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재산 모으느라 인색하게 한평생 살았는데, 왕, 도둑, 천재지변, 상속자 등에 의해 재산이 사라졌을 때 재산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러나 재산이 있을 때 보시 했다면 그 공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재산은 사라져 없어졌지만 보시공덕만큼은 남아 있는 것이다.
대부호에게 있어서 재물이나 재산은 왕이나 도둑에게 언제든지 약탈될 수 있다. 그러나 보시는 약탈될 수 없다. 이는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일곱 번째로 지혜의 재물이 있네”(A7.7) 라 하여 일곱 가지 보시를 들고 있다.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보시하는 것이 더 안전한 것이다. 재산은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지만 일곱 가지 보시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일곱 가지 보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법보시가 수승할까?
보시공덕 만큼 든든한 재산이 없다. 그렇다고 재보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외시도 있고 법보시도 있다. 보시 중에 가장 수승한 보시는 법보시이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보시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정신적 보시가 더 수승하다.”(A2.144)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법보시가 왜 수승할까?
재보시를 하면 보시공덕을 쌓는다. 동물에게 보시해도 백 배의 갚음이 있을 것이라 했다. 음식을 보시했을 때 먹고 나면 그만이다. 동물에게 주는 음식, 부도덕한 자에게 주는 음식이 생명연장을 해 주지만 먹고나면 남는 것이 없다. 일반사람에게 음식 등 유용한 모든 것을 주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고 그 보시물이 그 사람을 향상시켜 주지는 않는다.
사람들에게 살아 가는 방법, 삶의 지혜를 알려 준다면 먹는 것 등을 주는 것 보다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은 금생에도 이롭고 내생에도 이로운 것이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 법보시만큼 수승한 보시가 없다.
2016-10-19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스터메틱(Systematic)한 부처님 가르침 (0) | 2016.10.25 |
---|---|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는 생각의 바다 (0) | 2016.10.22 |
평범한 일상이 왜 불선(不善)일까? 아비담마 마음도표와 불선한 마음 8가지 (0) | 2016.10.15 |
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잊지 말자 (0) | 2016.10.14 |
산냐(相)의 극복에 대하여 (0) | 2016.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