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터메틱(Systematic)한 부처님 가르침
어떤 강연, 어떤 법문
종종 강연이나 법문을 듣는다. 일부러 찾아 가서 듣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일부로 시간내서 찾아 갔는데 건질 것이 없을 때 시간과 돈과 정력만 낭비한 듯한 기분이 든다.
시간이 돈인 세상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일부로 하지 않는 것이다. 강연이나 법문 들으러 가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법문 들으로 먼 지방으로 갔을 때 비용이 발생한다. 한번 움직이면 하루가 다 간다. 시간과 돈 뿐만 깨지는 것이 아니다. 정력도 낭비된다. 이렇게 시간과 돈과 정력을 들여 참석한 강연이나 법문에서는 무언가 건질 것이 있어야 한다.
어떤 강연이나 법문에 참석해도 반드시 필기구를 준비한다. 펜을 들고 받아 적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필기구가 없으면 스마트폰 메모기능을 활용한다. 때로 스마트폰으로 녹음하기도 한다.
어느 절의 법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스님은 포교전문으로서 달변이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법문을 한다. 그런데 법문을 들어 보면 받아 적을 것이 없다. 잔뜩 긴장하고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법문이 끝날 때까지 한줄도 적을 것이 없다.
달변의 스님은 순발력이 뛰어나다. 마치 개그맨들이 원맨쇼 하는 것처럼 갖은 표정과 몸동작으로 말을 한다. 더구나 막힘이 없다. 끊어 질 듯 하지만 순발력과 애드립으로 위기를 잘 넘긴다. 그러다 보니 말이 두서가 없다.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있는데 주제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도 기지와 순발력, 애드립으로 주어진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받아 적을 것이 없다.
귀중한 시간을 내서 참석한 강연이나 법문에서 받아 적을 것이 없다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들을만한 것이라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면 역시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듣고 말 것이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 메모해야 한다. 메모한 것을 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시간낭비, 돈낭비, 정력낭비가 되지 않는다.
지견명상원 법륜법사의 법문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유튜브에 들을만한 강연이나 법문이 많이 올려져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가서 듣는 것 못지 않다. 더구나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 요즘은 스마트폰 시대라 이동중에 들을 수도 있고 베게맡에서 들을 수도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지견명상원’의 ‘법륜법사’의 법문이다.
요즘 유튜브에서 법륜법사의 법문을 즐겨 듣고 있다. 고작 수 십 회, 많아 보아야 이삼백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가치로 따졌을 때 수 만, 수 십만 조회 보다 더 가치 있다. 그러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적은 것 것 같다.
법륜법사의 맛지마니까야 150번 경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유튜브에 ‘법륜 맛지마 니까야 150 나가라윈다의 장자들 경’이라는 제목으로 올려진지 2시간 되었을 때이다. 조회수가 고작 3회에 지나지 않았다. 법문에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탐진치와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 대한 관계이다.
시스터메틱(Systematic)한 가르침
초기불교에 관심 있는 불자라면 사성제와 팔정도가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사성제에서 도성제가 팔정도를 말하는 것이고, 팔정도에서 정견이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정의 되어 있기 때문에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성제와 십이연기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사성제와 십이연기도 맞물려 있다. 이는 사성제가 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성제가 괴로움의 발생 원인이라면 고성제는 결과이다. 그래서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괴로움은 갈애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의 순관에 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성제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원인이라면 멸성제는 결과에 해당된다. 도성제가 인이 되고 멸성제가 과가 되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의 역관에 해당된다. 따라서 사성제는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이지연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지 연기가 확장된 것이 십이연기이기 때문에 사성제와 십이연기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사성제와 십이연기가 서로 맞물려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십이연기에서 무명에 대한 것이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 했다. 이는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 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성제와 팔장도, 십이연기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서로 맞물려 있다. 마치 기계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 가는 것 같다. 이러한 매커니즘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시스터메틱(Systematic)’하다고 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탐진치 역시 사성제와 팔정도와 맞물려 돌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에서는 탐진치의 소멸을 목표로 하고 있다.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가 열반이고 이는 다름 아닌 깨달음이다. 그런데 탐진치를 소멸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 팔정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탐진치와 사성제와 팔정도가 어떻게 맞물려 있을까?
수행자가 존경받으려면
맛지마니까야에 ‘나가라빈다의 장자들에 대한 경(M150)’이 있다. 이 경은 탐진치의 소멸에 대한 경이다.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꼬살라국의 나가라빈다 마을에 도착하여 장자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경이 시작된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가 있었다. 바라문교 역시 외도에 속한다. 그런데 나가라빈다의 마을에도 육사외도들이 다녀 간 모양이다. 외도들이 다녀 갈 때 마다 자신들의 교리에 대하여 이야기 했을 때 어떤 것이 옳은 것이 판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마을에 들렀을 때 이미 부처님에 대한 명성이 자자했었다. 그래서 마을의 장자들이 부처님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 했다.
부처님은 장자들에게 탐진치와 관련하여 설명했다. 경에 따르면 이교도나 유행자들은 장자들에게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존중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고, 공경 받지 못하고, 공양 받지 못하는가?”라고 질문 했다. 이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고 했다.
[세존]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에 대하여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성냄을 떠나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떠나지 못하고,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일을 행하면,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존중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고, 공경 받지 못하고, 공양 받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록 우리는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에 대하여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성냄을 떠나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떠나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도 평화롭지 못하고, 우리도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일을 행하지만, 그들 존귀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서 보다 높은 올바른 행위가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고 공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라빈다의 장자들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50, 전재성님역)
여섯 가지 감각영역 중에 시각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직자나 수행자가 존경받으려면 탐, 진, 치에서 떠나야 함을 말한다.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청각, 촉각, 의식에 대해서도 탐진치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 성직자나 수행자가 탐진치에 매여 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반사람들과 다름 없을 것이다.
성직자나 수행자는 일반사람들과 다른 면모를 보여 주어야 한다. 일반사람들 처럼 욕망으로 분노로 산다면 똑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수행자가 욕심을 부려 재산을 축적한다거나 사소한 것에 감정이 실려 화를 버럭 낸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탐진치로 살아 가는 일반사람들과 조금도 다름 없을 것이다. 이런 성직자나 수행자는 공경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장자들에게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서 보다 높은 올바른 행위가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고 공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M150) 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말씀 했다.
탐욕과 성냄은 패키지
성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화가 나기 때문에 화를 낸다는 말하는 이도 있다. 화가 났을 때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낸 것 그 자체는 불선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의 오염원이 남아 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화를 낸다는 것은 욕망과도 관련이 있고 어리석음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탐진치는 사성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사성제에서 집성제가 탐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집성제에서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은 갈애 때문이다. 이 갈애가 탐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탐욕과 성냄은 패키지라는 것이다. 탐욕이 있는 곳에 성냄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여섯의 여섯에 대한 경(M148)’에서도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그 즐거운 느낌에 닿아 그것을 기뻐하고 환영하고 탐착하면, 탐욕에 대한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미혹에 빠지면,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 (M148)라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좋으면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탐욕이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성냄이라는 것이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즐거운 마음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지속하고 싶은 욕망은 탐욕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냄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벗어나고자 하는데 이때 진심이 발동한다. 그렇다고 동시에 탐욕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에 따라 수시로 탐심과 분심이 일어난다. 느끼지 못할 때는 무덤덤한 마음이다. 이를 지둔한 평온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범부들에게 있어서 지둔한 평온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조건이 바뀌면 욕망 아니면 분노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마음이라 한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탐욕으로, 성냄으로, 어리석음으로 살아 가는 것이다.
탐, 진, 치 이렇게 세 가지 오염원 중에 탐욕과 성냄은 항상 쌍으로 작용한다. 항상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패키지상품과 같은 것이다. 집성제에서 갈애는 탐욕과 같은 것이지만, 탐욕과 성냄은 항상 쌍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집성제에서 갈애는 사실상 탐욕과 성냄이라는 패키지와 같은 것이다.
이 생에서 수행하려면
탐욕과 성냄이 늘 패키지 또는 쌍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비담마에서도 확인 된다. 아비담마에 ‘원인 있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무탐’ ‘무진’ ‘무치’에 대한 것이다. 원인 있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이는 ‘과보의 마음(과보심)’이라 볼 수 있다.
마음에는 불선심, 선심, 과보심, 작용심 이렇게 네 가지 마음이 있다. 이 중에 과보심은 과거생에서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 생겨난 마음이다.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한 자는 무탐, 무진, 무치의 마음으로 태어난다. 이는 원인이 세 개인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두 개의 원인을 갖고 태어난다. 무탐과 무진이다. 전생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았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축생이나 아귀, 지옥 등 악처에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무탐과 무진이라는 두 개의 원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무치가 없기 때문에 지혜가 결여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아비담마 강좌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인이 두 개가 되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육근이 골고루 갖추어집니다. 그 대신 지혜가 부족합니다. 이 생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재생연결식에서 원인이 세 개가 되야 삼매도 들 수 있고, 선정에도 들 수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죽기 전에 원인 세 개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 생에서 수행을 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묵스님에 따르면 원인이 세 개는 되어야 이 생에서 수행할 수 있는 근기를 갖춘 것이라 한다. 그 원인 세 개라는 것은 무탐, 무진, 무치를 말한다. 일반사람들은 무탐과 무진 두 가지만 있지만, 전생에 수행한 사람들은 지혜를 닦았기 때문에 무치가 하나더 추가 되어 무탐, 무진, 무치 이렇게 세 개를 원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성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아비담마에 따르면 세 개의 원인 중에 무탐과 무진은 항상 패키지이다. 무탐과 무진이 따로 떨어져 작용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탐욕과 성냄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탐욕이 있는 곳에 성냄이 있고, 성냄이 있는 곳에 탐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고명한 선사가 제자들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초기불교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깨달은 자라 볼 수 없다. 어떤 이는 제자들을 훈계하기 위한 ‘자비의 분노’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화를 낸 것은 사실이다. 화를 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탐욕이 함께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왜 그런가? 탐욕과 성냄은 늘 패키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탐욕과 성냄은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화를 버럭버럭 낸다는 것은 무아의 불교에서 결코 깨달은 자라 볼 수 없다.
사성제와 엮여 있는 탐진치
집성제에서 갈애가 탐욕이라면, 탐욕은 성냄과 패키지 이므로, 집성제는 탐욕과 성냄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과 성냄은 사성제의 집성제와 묶여 있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은 사성제와 어떻게 역여 있을까?
어리석음을 빠알리어로 모하(moha)라고 한다. 그런데 모하는 무명과 같은 말이다.무명을 빠알리어로 아윗자(avijja)이라 한다. 따라서 모하와 아윗자는 어리석음과 동의어이다. 그런데 십이연기에서 무명에 대하여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 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무명은 어리석은 것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지혜가 없음을 말한다. 무명(avijja)의 반대말은 명지(vijja)이다. 탐욕과 성냄을 소멸 했을 때 어리석음도 소멸된다. 이렇게 본다면 어리석음의 소멸은 사성제를 실현하는 것과 같다. 탐진치는 사성제와 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팔정도와 탐진치는 어떻게 엮여져 있을까?
팔정도와 엮여 있는 탐진치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십이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 했다. 무명은 어리석은 것으로 탐진치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탐진치가 마치 물고 물린 것처럼 보인다. 마치 네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 가는 것 같다. 그것은 무아라는 목표를 위해서이다.
무아의 실현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과 같은 말이다. 무아의 실현은 다름 아닌 괴로움의 소멸이다. 그런데 괴로움의 소멸은 윤회의 종식이라는 사실이다. 수행한다는 것은 윤회의 종식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아야 한다. 행위를 하면 다시태어남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런 수행은 또 한편으로 탐진치의 소멸이다.
탐진치를 소멸은 팔정도로 완성된다. 그런데 팔정도와 탐진치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팔정도에 정견이 있다.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그런데 무명은 어리석음이다. 탐진치에서 어리석음은 지혜가 없음을 말한다. 사성제에 대한 지혜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리석음의 소멸이기도 한다. 그래서 팔정도의 정견은 어리석음과 맞물려 있다.
팔정도에서 혜온에 해당되는 것이 정견과 정사유이다. 그런데 정견은 탐진치 삼독에서 어리석음과 맞물려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탐욕과 성냄은 팔정도에서 어디와 맞물려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정사유’이다. 정사유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saṅkappo: yo kho bhikkhave, nekkhammasaṅkappo avyāpādasaṃkappo, avihiṃsāsaṅkappo,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saṅkappo.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욕망을 여읜 사유를 하고
2) 분노를 여윈 사유를 하고
3)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 (S45.8)
정사유를 보면 욕망(nekkhamma)과 분노(avyāpāda)라는 말이 나온다. 탐욕(rāga)과 성냄(dosa)과 같은 말이다. 팔정도에서 정사유는 탐욕과 성냄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탐진치 삼독 중에 탐욕과 성냄은 팔정도의 정사유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간다. 왜 이렇게 살아 갈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욕망이 일어나고, 괴로운 느낌이 발생되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분노가 발생된다.
욕망과 분노는 대칭 되는 것이지만 늘 함께 한다. 마치 밀고 당기듯이 수시로 일어난다. 무덤덤한 느낌일 때도 있다. 이런 중립적인 느낌을 우뻭카라 한다. 그러나 일시적 평온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깨질지 모른다. 이 모두가 자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였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라 볼 수 있다. 이들 세 개의 근본 가르침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서로 맞물려 돌아 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아라는 목표를 위해서이다. 그런 무아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기 위하여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를 말씀 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불교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탐진치의 소멸이라 했다.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가 열반인 것이다. 열반은 무아를 말하므로 탐진치의 소멸은 열반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탐진치 소멸과 무아와 열반은 동의어이다.
무아를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체계적이다. 마치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 가듯이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탐진치를 대입하면 드러난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시스터메틱(Systematic)하다’고 했을 것이다.
2016-10-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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