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를 기억하고 있으면 담마가 보호해 준다, 모든 수행은 기억력에서부터
기억하지 않으면 잊어 버립니다. 좋은 생각이 떠 올랐을 때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마음 때문에 곧바로 잊어 버립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 났을 때 단단히 묶어 두어야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가사처럼 ‘밧줄로 꽁꽁 묶어’ 두는 것 입니다. 어떻게 묶어 둘까요? 노트해 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요즘은 늘 손안에 스마트폰이 있어서 메모해 둡니다. 키워드 몇 개만 쳐 두어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탁월한 결정
좋은 생각은 고요한 마음상태일 때 일어 납니다. 오감이 차단 된 상태에서 의문(意門)만 열어 놓았을 때 입니다. 이때 갖가지 생각이 일어나고 갖가지 생각이 치고 들어 옵니다. 그 중에는 정말 놓치지 않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마치 좋은 꿈을 꾸었을 때 기억하고 싶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일어나는 생각은 과거에 모두 경험한 것들 입니다.
언젠가 보았던 것, 들었던 것, 냄새 맡았던 것, 맛보았던 것, 감촉했던 것들 입니다. 비록 그때 당시에는 잊어 버렸을지 모르지만 기억의 창고 속에는 저장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현듯 떠 오릅니다. 어떤 장면을 보았을 때,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연상작용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이전에 체험했던 것들 입니다.
혼란한 마음 속에서는 좋은 기억이 떠 오를 수 없습니다. 눈으로, 귀로 계속 정보가 입력 되는 상태에서는 좋은 생각이 떠 오를 수 없습니다. 혼란된 마음에서는 훌륭한 판단이나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금 무엇을 먹을까 고민 하는데 식당 간판을 두리번거린다면 혼란만 가중 될 뿐 입니다. 그럴 경우 차라리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 나을 것 입니다. 눈, 귀 등 오감을 차단해 놓았을 때 생각의 문만 열려 있습니다. 이전에 체험했던 것이 떠 오를지 모릅니다. 잠재 되어 있는 생각이 떠 올랐을 때 탁월한 결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띠발라(satibala)에 대하여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잘 새겨 들어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전에 쓰여 있기는 하지만 기억하고 있으면 편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머리속에서 꺼집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Katamañca bhikkhave satibalaṃ: idha bhikkhave ariyasāvat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balaṃ.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 전재성님역)
오력에 나오는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빠알리어 사띠(sati)에 대한 설명입니다. 전재성님은 ‘새김’이라 번역했습니다. 기억의 뜻이 강합니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마음챙김’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챙김이라는 말에는 기억의 뜻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기억에 대하여 강조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설법할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귀담아 듣고, 귀담아 들은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실천했을 때 비로서 가르침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기억의 힘이라 했습니다.
강력한 기억력을 기반으로
무엇이든지 자주 오래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힘이 생겨납니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 근육이 생겨 나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도 지속적으로 하면 필력이 생겨서 글 하나 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억도 마찬 가지 일 것입니다. 주의 깊게 들어 기억 했을 때 자신의 것이 됩니다. 기억한 것이 쌓이고 쌓이면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의 힘, 기억력이 생겨날 것입니다.
기억과 관련하여 칠각지에서는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S46:3)”라 했습니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보면 순차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치 초등학교에서 산수를 하기 전에 구구단을 먼저 외우는 것과 같습니다. 영어를 배우기 전에 알파벳을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한문을 배우기 전에 필수 한자를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학문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외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 역시 기본적으로 외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는 강력한 기억력을 기반으로 합니다. 칠각지에서도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에서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 바로 기억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장 먼저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사띠 제1의 뜻은 기억
사띠가 기억의 뜻에 가까운 것은 청정도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불연에서 번역한 청정도론에 따르면 붓다고사는 사띠에 대하여 “이것 때문에 기억하고, 혹은 이것은 그 스스로 기억하고, 혹은 단지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 한다. ( Idāni sato ca sampajānoti. ettha saratīti sato. Sampajānātīti sampajāno.) ” (Vism.14.141)라 했습니다. 청정도론 영역판에 따르면 냐나몰리는 “(x) By its means they remember (saranti), or it itself remembers, or it is just mere remembering (saraóa), thus it is mindfulness (sati).” (Vism.14.141)라 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 했고, 영역에서는 ‘mindfulness’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띠의 제1의 뜻은 기억입니다. 제2의 뜻으로 대상에 깊이 들어 가는 특징이 있고, 제3의 뜻으로 잊지 않는 역할이 있고, 제 4의 뜻으로 보호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많은 역할이 있지만 사띠의 제1의 뜻은 기억입니다. 그 기억은 다름 아닌 가르침에 대한 기억입니다.
어색한 번역
어떤 번역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고. 그래서인지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어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을 대입했을 때 어색해집니다. 초불연에서는 오력에 대하여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힘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런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해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힘이라 한다.”(A5.14, 대림스님역)
번역어 ‘마음챙김의 힘’이란 빠알리어로 ‘satibala’입니다. 사띠발라에 대하여 마음챙김의 힘 대신에 ‘기억의 힘’ 또는 ‘기억력’으로 대체 하면 뜻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라 했습니다. 어색합니다. 이를 ‘최상의 기억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라고 바꾸면 기억력에 대한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초불연 번역에 대하여 기억이라는 말을 대입하여 다시 써 보면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기억의 힘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런 제자는 기억하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기억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해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기억의 힘이라 한다.”가 될 것입니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NDB를 찾아 보니 “And what is the power of mindfulness? Here, the noble disciple is mindful, possessing supreme mindfulness and alertness, one who remembers and recollects what was done and said long ago. This is called the power of mindfulness.” (A5.14, 빅쿠보디역) 라 되어 있습니다. 빅쿠보디는 “오래 전에 행했던 것을 기억하고 회상 하는 것(remembers and recollects what was done and said long ago)” 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늘 새겨 들어야 하기 때문에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마지막 유훈에서
초불연 각주를 보면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satinepakkena)’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 마지막 유훈을 인용하여 설명했습니다. 각주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편 디가니까야 제2권 대반열반경(D16)에서 나타나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인 불방일(appamada)을 “마음챙김의 현전(sati- avippavāsa)”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복주석서는 “지혜를 수반한 마음챙김(ñāṇūpasañhita)”이라고 설명하는데, 본문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초불연 앙굿따라니까야3권 20번 각주, 대림스님)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은 초불연 번역에 따르면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성취하라.”(D16)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방일하지 말라’라는 말에 대하여 마음챙김과 동의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방일에 대한 빠알리어가 압빠마다(appamada)인데, 이 말은 사띠(sati)와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불연 각주에서는 사띠발라가 불방일과 같은 것이고, 이는 주석서에서 ‘마음챙김의 현전(sati- avippavāsa)’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챙김의 현전에 대하여 ‘기억의 현전’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복주석서에서 “지혜를 수반한 마음챙김(ñāṇūpasañhita)”이라 했는데, 이는 ‘지혜를 수반한 기억’이라고 바꾸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모든 수행은 기억력에서부터
빠알리어 사띠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습니다. 제1의 뜻은 기억입니다. 사띠가 수행이 아닌 일반적 의미로 쓰였을 때는 기억이라는 말이 타당합니다. 사띠가 수행의미로 사용될 때는 문맥에 따라 새김, 마음지킴, 마음챙김 등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력과 칠각지에서 사띠는 마음챙김이라는 용어 보다는 기억이라는 용어가 타당합니다. 마음챙김이라는 말 대신 기억을 대입하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력에서 사띠발라는 기억의 힘 또는 기억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칠각지에서 염각지가 가장 앞서 나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깨달음의 길이 시작 됨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를 뜻하는 기억이라는 말은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수행에서도 활용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수행은 반드시 좌선을 뜻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이 모두 수행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수행의 근본이 되는 것은 기억력입니다. 기억력이 없는 자는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 자, 가르침을 새겨 듣지 않는 자, 가르침을 사유하지 않는 자는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수행은 기억력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기억력입니다.
담마를 늘 기억하고 있으면
이른 아침, 특히 새벽에 좋은 생각이 잘 떠 오릅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와 같습니다. 명경지수라 하여 거울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자신을 잘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전날 음주를 과하게 했다면 후회의 마음이 일어날 것 입니다. 이전에 행한 행위나 말이 거칠었다면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 날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전날 비난 받지 않을 행위를 했다면,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했다면, 더구나 마음을 계발하는 수행을 했다면 가뿐 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 새벽에 몸과 마음이 편안 하다면 잘 잔 것 입니다. 이전날 행위가 올바른 것입니다. 지금 마음 상태가 평안하다면 지혜로운 삶을 산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담마의 지혜를 말합니다. 늘 담마를 늘 기억하고 있으면 지혜로운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점심시간에 무엇을 먹을까 고민할 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을 떠 올린다면 더 이상 식당간판을 찾아 헤메이지 않아도 될 것 입니다. 담마를 늘 기억하고 있으면 담마가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모든 불교수행은 담마를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2016-11-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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