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는 생각의 바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0. 22. 15:17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는 생각의 바다

 

 

 

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2’를 보았다. 수 년 전 마음테라피1’에 이어 시즌2라 볼 수 있다. 불교TV에도 올려져 있고 유튜브에도 올려져 있다. 언제 다시 들어도 유익한 가르침이다. 매번 반복해서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전현수박사의 [BTN]전현수 박사의 마음테라피2 - 1 생각의 속성을 보고 정리해 보았다.

 

생각의 탱크

 

전현수박사에 따르면 생각은 그냥 떠 오르는 것이라 했다. 나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언젠가 경험했던 것들이다.

 

생각이 떠오르면 끄달려 가서는 안된다.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그 생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 생각의 창고, ‘생각의 탱크에서 온다고 가정 할 수 있다. 나의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조건을 만나면 생각으로 떠 오르는 것이다.

 

거대한 생각의 탱크가 있다면 아인슈타인의 경우 물리의 탱크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탱크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탱크에 있는 생각이 떠 오를 때 단지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영어공부에 적용할 수 있다.

 

생각의 탱크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잘 관찰하면 힘들지 않게 영어 공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어가 잘 들리지 않을 때 잘 들을려고 애쓸 필요 없다. 입력되지 않은 단어는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르는 단어는 생각의 탱크에 입력하면 된다. 입력된 것을 잘 관찰하면 영어가 들린다는 것이다.

 

생각의 탱크에 들어 있는 것은 올라 오게 된다. 내가 무언가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것이 내 속에 충분히 있게끔 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내가 원치 않는 것은 입력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 공포영화를 보지 않으면 무서운 장면이 입력 되지 않는다. 무서운 장면이 무서워서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장면을 입력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는

 

누구나 생각의 탱크가 있다. 그런데 생각의 탱크에는 특징이 있다. 하나는 용량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이다. 요즘 컴퓨터의 메모리도 엄청나게 커졌다. 그런데 생각의 탱크는 그 크기의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의 탱크에 입력된 정보는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컴퓨터의 경우 용량확보를 위해 불필요한 데이터를 지울 수 있으나 생각의 탱크에는 딜리트(Delete)’기능이 없다. 그래서 한번 저장된 정보는 모두 쌓인다.

 

쌓인 정보는 조건을 만나면 생각으로 떠 오르게 되어 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다. 담배의 해로움을 알아 금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작심삼일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면 예전의 담배맛이 생각나서 견딜 수 없게 된다. 한모금 빠는 순간 이전의 금연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금연에 성공할 수 있다.

 

한번 저장된 경험은 조건만 형성되면 반드시 생각으로 올라오게 되어 있다. 눈으로 본 것이나 귀로 들은 것은 모두 생각의 탱크에 저장된다. 코로 냄새 맡은 것, 혀로 맛 본 것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의 경우 작업을 하고 난 다음 세이브(Save)버튼을 눌러야 저장된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컴퓨터와 달리 한번 본 것은 저장키를 누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모두 저장된다. 한번 들은 것, 한번 냄새 맡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카메라로 찍듯이 자동으로 저장된다.

 

미확인비행물체(UFO)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을까? 필름으로 따진다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귀로 들은 것은 또 얼마나 많을까? 코로 냄새 맡았을 때 이전에 맡았던 냄새를 떠오르게 한다. 시골에서 소똥냄새가 어렸을 적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것과 같다. 다만 처음으로 접하는 것은 알 수 없다.

 

경주에서 큰 지진이 났다. 경주에서 수 백키로 떨어진 곳에서도 지진이 감지 됐다. 처음에는 의미를 잘 몰랐다. 의자가 흔들거리고 책장이 출렁이는 듯 했을 때 그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바로 지진임을 직감 했다. 메스컴에서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런 현상이 나면 즉각 지진임을 알 것이다.

 

유년시절 시골에서 살 때 어느 날 동쪽 하늘에 커다란 물체가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굉음과 함께 낮게 비행하는 물체 여러 개는 뚜렸이 기억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행기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공군수송기였다. 그러나 수송기라는 사실을 모르는채 살았다면 아마 미확인비행물체(UFO)로 마음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인간바다(purisassa samuddo)

 

개의 경우 코로 입력된 것이 많다고 한다. 사람의 경우 눈으로 입력 되는 것이 많다. 다음으로 생각이라 한다. 감각영역에서 입력된 정보는 탱크에 저장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 된다. 상윳따니까야에 바다의 경(S35.228)’이 있다. 경에 따르면 눈이 바다라고 했다, 또 귀가 바다라고 했다.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모두 바다인 것이다. 바다는 정보를 저장하는 탱크와 같은 개념이다. 그런 바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다가 아니다. ‘인간바다(purisassa samuddo)를 말한다.

 

일반사람들은 바다, 바다라 하지만 부처님 제자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그것은 커다란 물의 더미요 커다란 물의 홍수일 뿐이다.”라 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 했을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시각을 보면 다음과 같다.

 

 

Cakkhu bhikkhave purisassa samuddo, tassa rūpamayo vego. Yo ta rūpamaya vega sahati, aya vuccati bhikkhave atari cakkhu samudda saūmi-1 sāvaṭṭa sagāha sarakkhasa 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

 

수행승들이여, 시각이야말로 인간의 바다로서 그 거센 흐름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형상으로 이루어진 거센 흐름을 견디어 낸다면, 그는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나찰이 많은 시각의 바다를 건너 그것을 뛰어넘어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 고귀한 님이라고 한다.” (S35.228, 전재성님역)

 

 

 

Shark in Sea

 

 

부처님에 따르면 시각이 바다라고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저장 되는 엄청난 크기의 바다이다. 주석에 따르면 시각은 결코 채워질 수 없거나 만족될 수 없기 때문에 시각의 바다라고 했다. 보는 족족 입력되고 저장되는 것이다. 그 바다의 크기와 심연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평온한 것이 아니다. 늘 파도치고 있다. 그것도 모든 것을 휘쓸어 가버리는 폭류이다. 더구나 그 바다에는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다. 상어와 나찰 같은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파도는 분노의 번뇌를 의미한다고 했다. 소용돌이는 여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 오욕락을 말한다. 상어와 나찰은 여인을 뜻한다고 했다.

 

바다에 풍덩 빠졌을 때

 

인간의 바다에는 시각의 바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각의 바다도 있고, 후각의 바다도 있고, 미각의 바다도 있고, 촉각의 바다도 있고, 정신의 바다도 있다. 여섯 가지 인간의 바다는 그 크기와 심연을 알 수 없다. 보이는 족족 저장되고 들리는 즉시 저장된다.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저장된 것은 대상을 만나면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Santi bhikkhave cakkhuviññeyyā rūp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hitā rajanīyā, aya vuccati bhikkhave ariyassa vinaye samuddo. Etthāya sadevako loko samārako sabrahmako sassamaa brāhmaī pajā sadevamanussā yebhuyyena samunnā tannā kulakajātā guāguṇṭhikajātā muñjababbajabhūtā apāya duggati vinipāta sasāra nātivattatīti.

 

수행승들이여,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은 훌륭하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거룩한 이의 규범에는 바다라고 한다.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는 대부분 침몰하여 실타래처럼 엉키고, 종기로 덮인 것과 같고, 갈대나 골풀과 같이 되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으로 태어나는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S35.229, 전재성님역)

 

 

시각으로 인식되는 대상은 자극적이고 사랑스런 것이라 했다. 이전에 경험 했기때문이다. 처음 마주 치는 대상이라면 무덤덤 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접한 대상이라면 좋고 싫어함이 발생된다. 시각의 바다에 저장된 정보와 비교하여 호불호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대상이면 탐욕이 일어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성냄이 일어난다. 관심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평온상태로 견딘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시각의 바다에 빠져 버린 다(samunnā)”는 것이다. 빠져 버리기 때문에 바다(samudda)’라 하는 것이다. 경에서는 대부분 침몰하여 실타래처럼 엉키고라 했다.

 

여섯 가지 감각영역의 바다에 빠져 버리면 헤어나기 힘들다. 거센 흐름에 표류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낚시바늘을 삼킨 물고기로 비유하기도 한다. 어부가 먹이를 매단 낚싯바늘을 깊은 호수에 던졌을 때, 어떤 먹이를 탐하는 물고기가 이를 덮석 무는 것과 같다. 한번 물면 코 꿰이는 것이다. 물고기는 어부가 하자는대로 한다. 시각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매혹적인 대상에 즐거워하고 애착을 가진다면 악마의 낚싯바늘에 걸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수행승은 악마의 낚싯바늘에 걸려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 악마 빠삐만이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S35.230) 라 했다. 초기경전에서 여섯 가지 감각영역은 종종 악마에 비유된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단속하지 못했을 때 악마의 낚싯바늘에 꿰이는 것으로 본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

 

생각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전에 경험되었던 것들이 생각나는 것이다. 머리속에 입력되었기 때문에 생각나는 것이다. 정보가 입력되지 않았다면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I am think)”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라 했다. 왜 그럴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과 같다. 비가 오면 비가(It rains) 온다라고 말한다. 3인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생각 난다(It thinks)”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생각의 본질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빠알리어에서도 “It thinks”처럼 3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생각이 나 한테 떠 올랐다라는 것에 대하여 이것이 나에게 있었다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떠 올라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형 아호시(ahosi)를 사용하여 있었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생각은 내것이 아니다!

 

생각이 나의 것이 아닌 것은 초기경전에서도 알 수 있다. 무아의 가르침에서 부처님은 오온의 의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의식이 나라면 이 의식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의식에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S22.59, 전재성님역)

 

 

의식, 즉 마음에 대하여 통제할 수 없음을 말한다. 마음이 내 것이라면 나의 통제에 따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 먹은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타자에게 내 뜻대로 따를 것을 말한다면 갈등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내뜻대로 되어야 한다면 남편도 내 뜻대로, 아이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심지어 돈도 내뜻대로 벌려야 한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하물며 남도 내뜻대로 하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생각한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저장된 정보가 저절로 떠 오르는 것이다. 나의 의지하고는 무관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생각이 난다라고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주 다니다 보면

 

마음은 크게 두 가지 속성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마음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은 어딘가에 가 있다. 한번에 한곳에 가 있다. 한순간에 한 마음인 것이다. 현재 집중을 하는 것도 마음을 한곳에 가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마음을 한곳에 집중한다. 또 하나 마음의 속성이 있다. 그것은 마음의 길이다. 마음이 길이 남을 말한다. 마음이 어느 쪽으로 가면 그 쪽으로 길이 나는 것이다. 길이 나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가게 된다.

 

누군가 포르노를 매일 보았다면 그의 머리속에는 온통 포르노 장면으로 가득할 것이다. 누군가 주식투자를 전문으로 한다면 그의 머리속에는 온통 주식차트로 가득할 것이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보와 접촉하는 것이다. 주식하는 사람과 만나면 나도 주식이나 한번 해볼까?”라는 마음이 일어날지 모른다.

 

특정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되면 그쪽으로 길이 나게 되어 있다. 더 자주 생각하면더 큰 길이 나게 될 것이다. 마치 자주 다니는 곳에 길이 나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 더 큰 길이 날 것이다. 사람들 왕래가 많아지면 오솔길은 사람 다니는 길이 된다. 자동차가 다니면 자동차길이 된다. 차량이 더 많아지면 2차선 도로가 4차선 도로가 된다. 여기에 트럭이나 트레일러가 다니면 산업용도로나 고속도로가 된다. 마찬가지로 자주 생각하게 되면 생각의 길이 나게 되어 있다. 그 길은 점점 넓어져서 그 길로만 다니게 된다.

 

나쁜 생각은 우리 삶에 해로움을 준다. 좋은 생각도 한계가 있다. 현재 삶에 집중하는 것이 요청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명상을 해야 한다. 호흡에 집중하면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않게 된다. 명상의 반대편에 생각이 있다. 명상을 오래 하면 생각이 줄어 든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을 것인지 마음이 현재에 있을 것인지 선택의 삶을 살고 있다.

 

 

2016-10-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