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육입처는 마음의 영역

담마다사 이병욱 2016. 9. 29. 14:10

 

육입처는 마음의 영역

 

 

사람이 본 것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 기억에 의존하지만 기억이 가물가물 하면 어떤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기억은 조작된다는 사실이다. 기억 속의 사건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어서 전혀 다르게 인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기억은 마음의 영역에 있다.

 

대상을 보면 마음이 일어난다. 눈이 있으면 보이고 귀가 열려 있으면 듣게 된다. 마음을 포함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만나면 여섯 가지 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시각의 경우 시각대상과 만나면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경에서는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M148) 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시각과 시각대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삼사화합이라 한다.

 

삼사화합을 접촉이라 하는데,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발생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 이 모두가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사람이 본 것도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이 본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일까?

 

마음의 영역이 있는데

 

부처님은 제자들이 물어 보지 않았음에도 일부러 불러서 설법하는 경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여섯의 여섯에 대한 경(M148)’도 그런 예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을 불러서 여섯의 여섯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겠다. 잘 듣고 마음에 새겨라. 내가 설하겠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nabbāni. Cha viññāakāyā veditabbā. Cha phassakāyā veditabbā. Cha vedanākāyā veditabbā. Cha tahākāyā veditabbā.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iti kho paneta vutta. Kiñceta paicca vutta. Cakkhāyatana sotāyatana ghānāyatana jivhāyatana kāyāyatana manāyatana.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iti ya ta vutta, idameta paicca vutta. Ida pahama chakka.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외적인 감역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의식의 무리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접촉의 무리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여섯 느낌의 무리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시각영역, 청각영역, 후각영역, 미각영역, 촉각영역, 정신영역이 있다.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의 여섯이다.

 

‘여섯 가지 외적인 감역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형상영역, 소리영역, 냄새영역, 맛영역, 감촉영역, 사물영역이 있다. ‘여섯 가지 외적인 감역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의 여섯이다.”

 

(Cha chakka sutta-여섯의 여섯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8, 전재성님역)

 

 

경에서 여섯의 여섯(Cha chakka)’이라는 말은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전재성님은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여섯 가지 외적인 감역으로 번역했다. 여기 감역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일반적으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만나서 감각의식이 생겨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서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안이비설신의가 단순한 감각기관이 아니라 내적 영역(ajjhattikāni āyatanāni)’ 이라 했다. 눈이라 했을 때 이는 단순한 감각기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육입처는 몸 어디엔가 영역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하나의 인식영역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육입처에서 눈은 단순히 눈이 아니라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갖는 정신적 영역을 말한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안의 감각장소라 했다. 색성향미촉법에 대해서는 외적 감역(bāhirāni āyatanāni)’이라 했다. 초불연에서는 밖의 감각장소라 번역했다. 이렇게 육내입처는 안이비설신의라는 내적영역들과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외적영역들로 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정신영역들로서 인식된 것임을 말한다.

 

마음을 하트로 표현 하였을 때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S6.1) 라 했다. 특히 심오하다는 말에 주목한다. 육입처도 심오한 가르침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육입처는 내입처와 외입처로 구성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안이비설신의라는 육내입처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외입처이다. 그런데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는 모두 마음의 영역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하트로 표현 하였을 때 한편은 육내입처이고 또 한편은 육외입처인 것이다. 이를 분별하는 마음이 있다. 이를 그림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그림은 법륜법사의 법륜 맛지마 니까야 149 위대한 여섯 가지 감각장소 유튜브강좌에서 캡쳐해 온 것이다하트모양의 마음영역 안에 육내입처와 육외입처가 모두 함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영역들이 다를 뿐이다. 모두 12가지 영역이 있어서 이를 12처라 한다.

 

육내입처가 육외입처와 만나면 여섯 가지 분별의식이 생겨난다. 육내입처 6가지와 육외입처 6가지, 그리고 6가지 분별의식을 모두 합하여 18계라 한다. 이들 모두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5, 12, 18계의 세상에 사는 것이다.

 

육입처는 마음의 영역

 

지나가면서 대상을 볼 때 흔히 눈이 따로 있고 색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예를 들어 물병을 볼 때 내가 물병을 본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물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나를 본다라고 보는 것이 다. 내가 물병을 보고 있다고 했을 때 내 눈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전도몽상이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본다면 나의 눈은 독립적 존재이고 물병 또한 독립적 존재이다. 모두 따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간적으로 보는 방식이다. 물병을 보았을 때 내가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이 있어 물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인식작용에 따른 것이다. 눈은 단순하게 받아 들이는 작용만 한다. 받아 들인 신호가 뇌로 전달되면 이를 인식하는 작용이 일어난다. 따라서 물병을 마음으로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대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망막에서는 대상이 거꾸로 되어 뒤집힌 채 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눈에 포착된 신호가 뇌에 전달될어 인식될 때 다시 한번 거꾸로 뒤집히기 대문에 원래 형상대로 보인다고 한다. 두 번의 조작과정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두 번에 걸쳐 조작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 눈으로 본 것과 두 번째로 마음으로 본 것은 다르다. 마음으로 본 것은 분별해서 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는 것은 물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분별한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다.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대상은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이를 육입처라하여  마음영역안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속에 여섯 가지 외적감역(bāhirāni āyatanāni)’여섯 가지 내적감역(ajjhattikāni āyatanāni)’이 있다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영역안에 들어와 있어서 마음영역이라 볼 수 있다.

 

같은 보름달이라도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시각의식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때 시각의식은 단지 순수하게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분별의식이 생겨나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별의식의 과정에서 좋고 싫음의 느낌이 일어난다. 대상을 보았을 때 그 대상과 관련된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반면 좋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보름달을 바라 볼 때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 어떤 이는 보름달을 보면서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을 떠 올린다. 또 어떤 사람은 쓰리고 아픈 기억이 생각날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커다란 빵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같은 대상을 놓고 천차만별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상에 대하여 인식하는 것이 모두 다름을 말한다. 달은 하나이지만 그 달을 바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제각각 달라서 천개의 달, 만 개의 달이 있는 것이다.

 

같은 초록이라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여 안온하게 보는 이도 있다. 군대에서 고생한 사람이라면 한강이북 접경지역 부대를 지날 때 초록은 남다를 것이다. 백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흰색이 순결을 상징한다 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병원에서 주사에 대한 공포가 있는 사람이라면 간호사의 흰 가운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다.

 

같은 대상이라도 사람들마다 보기에 따라 다르다. 이는 마음속에 이미 분별의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게 과거의 기억에 따른다. 대상을 보았을 때 과거의 기억과 비교하여 즐겁거나 괴로움 느낌이 일어난다. 그도 저도 아니면 무덤덤한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일어난다. 이것이 연기의 회전이다.

 

보름달을 보았을 때 보름달은 이미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그것도 분별되고 조작된 형태로 마음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나만의 보름달이 되는 셈이다. 같은 물을 보아도 아귀가 보면 피고름이고, 천신이 보면 금은보석이라 한다.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달리 보는 것은 마음이 대상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만들어낸 형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

 

살아 가면서 보거나 듣는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눈이 있는 한 보지 않을 수 없고, 귀가 있는 한 듣지 않을 수 없다. 이때 강한 대상에 대해서는 분별심이 일어난다. 그것은 좋거나 싫은 것이다. 좋으면 죽어라좋아하고, 싫으면 죽어라싫어한다. 대상은 그대로이지만 받아 들이는 마음에 따라 호불호가 명백히 갈리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듣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마음이 대상을 조작하고 자기가 만들어낸 형상을 즐기는 것이다. 이는 자아에 기반한다.

 

모든 것을 독립적인 실체로 보았을 때 자아관념이 생겨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시각을 예로 들어 누군가 시각이 자아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Cakkhu attāti yo vadeyya ta na upapajjati.)”(M148) 라 했다. 여기서 자아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attā이다. 앗따라는 말이 자아를 뜻하긴 하지만 여기서는 실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시각이라는 독립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마음의 영역에 있는 시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 지어진 것이다.

 

마음의 영역 안에 있는 시각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고 했다. 만일 독립된 실체라면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각영역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Cakkhu attāti yo vadeyya ta na upapajjati. Cakkhu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 hoti. Tasmā ta na upapajjati, cakkhu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누군가 ‘시각이 자아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그 시각의 생성과 소멸이 시설된다. 그 생성과 소멸이 시설되기 때문에, ‘나의 자아가 생성되고 소멸된다.’라는 생각이 그에게 따라온다. 그러므로 누군가 ‘시각이 자아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시각은 자아가 아니다.”

 

(Cha chakka sutta-여섯의 여섯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8, 전재성님역)

 

 

시각영역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누군가 시각이 자아라 하여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로 본다면 이는 잘못 본 것이라 했다. 경에서는 시각을 시발점으로 하여 형성, 시각의식, 시각접촉, 느낌, 갈애 이렇게 여섯 개의 단어가 반복구문형식으로 소개 되어 있다. 그리고 청각영역, 후각영역, 미각영역, 촉각영역을 포함하여 여섯 가지 영역을 오개조로 하여 모두 30가지가 반복구문 형태로 설명되고 있다. 공통적으로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생성과 소멸되는 것으로써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일어나는 원리

 

12처는 마음의 영역이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았을 때 마음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감각영역 안에서는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보름달이라는 대상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 영역 안에 들어 오면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시각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기고, “(M148) 라 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의 영역 안에 있는 보름달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각과 형상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Cakkhuñca bhikkhave, pa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a. Tiṇṇa sa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 sukha vā dukkha vā adukkhamasukha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a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ikandati sammoha āpajjati. Tassa paighānusayo a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añca yathābhūta nap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anuseti.

 

 수행승들이여, 시각을 조건으로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서, 이 세 가지가 만나는 것이 접촉인데,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난다. 그 즐거운 느낌에 닿아 그것을 기뻐하고 환영하고 탐착하면, 탐욕에 대한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미혹에 빠지면,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 그 느낌의 생성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그것에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 무명의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

 

 (Cha chakka sutta-여섯의 여섯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8, 전재성님역)

 

 

이 정형구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잘 알려준다. 원리는 간단하다. 삼사가 화합하여 접촉이 발생하는데, 그 접촉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느낌이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다. 여기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어떤 마음이 들까? 아마 거머쥐려 할 것이다. 이것이 탐욕이다. 그래서 그 즐거운 느낌에 닿아 그것을 기뻐하고 환영하고 탐착하면, 탐욕에 대한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라 했다. 반대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밀치려 한다. 이것이 성냄이다. 이에 대하여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미혹에 빠지면,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라 했다. 이렇게 탐욕과 성냄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강한 대상이 있을 때 마음은 크게 동요하게 된다. 더구나 대상과 관련된 과거의 기억이 가미 된다면 좋아함과 싫어함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느낌이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느낌이 싫으면 밀쳐내려 한다. 이것이 탐욕과 성냄이다. 그런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이 있다. 일종의 중립적 느낌이다. 평온한 것 같아 보이지만 조건만 형성되면 언제든지 탐욕이나 성냄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마음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 그 느낌의 생성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그것에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 무명의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라 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생성과 소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라 했다. 어리석음은 무명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부처님은 늘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볼 것을 말씀 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현상에 대하여 독립된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온에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본다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 밖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에서 보는 것이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Cakkhuñca kho bhikkhave, pa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a. Tiṇṇa sa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 sukha vā dukkha vā adukkhamasukha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ābhinandati, nābhivadati, nā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nā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ikandati, na sammoha āpajjati, tassa paighānusayo nā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añca yathābhūta 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nānuseti.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 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ighānusaya pa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 samūhanitvā avijja pahāya vijja 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 hānameta vijjati.

 

수행승들이여, 시각을 조건으로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서, 이 세 가지가 만나는 것이 접촉인데,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난다. 그 즐거운 느낌에 닿아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으면, 탐욕에 대한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지 않게 된다.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슬퍼하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고 비탄해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고 미혹에 빠지지 않으면, 분노의 잠재적경향이 잠재하지 않게 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 그 느낌의 생성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그것에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 무명의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지 않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그가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적 경향을 없애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분노의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적 경향을 근절하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킨다면, 현세에서 괴로움의 종식을 성취하겠다는 것이 타당하다.”

 

(Cha chakka sutta-여섯의 여섯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8, 전재성님역)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거머쥐려 하면 탐욕이다. 이럴 때는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네.”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면 거기서 멈춘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밀쳐 내려 하면 성냄이다. 이럴 때는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네.”라고 알아차리면 그뿐이다. 이는 생성과 소멸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봄을 말한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관찰했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살았다

 

부처님은 일체를 설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M35.23)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일체는 바로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세상이다. 구체적으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이는 인식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몸 밖의 외부적 세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일까?

 

어떤 이는 일체를 이야기 하면서 외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로지 마음으로 인식하는 세상만 있을 뿐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세상에 대하여 환영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금강경 대미를 장식하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는 게송을 들어 우리가 사는 세계를 과 같다고 말한다.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환영이고 꿈속일까?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하여 환영이라거나 꿈속으로 말한 적이 없다. 금강경의  환포영이라는 말도 오온에 한정되어 있다.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S22.95)라 했다. 어디까지나 오온에 한정한 것이다. 이는 우주론적으로 확장한 금강경과 다르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Nāha, lokena vivadāmi)”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loka)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 즉 중생계 (Sattaloka)를 뜻한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살다가 열반했다. 이는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세상에 오염되어 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S22.94)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산 것이다. 그런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고 보통우리가 말하는 물질적 세상이다. 이를 현상계(器世間, Cakkavālaloka) 라 한다.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중생계에서도 살았고 현상계에서도 살았다. 그런데 부처님은 일체라 하여 인식론적 세상을 말씀하셨다. 이는 조건계(Sakhāraloka)를 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또 오취온의 세상이다.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세상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런 세상에서 벗어나자고 했다.

 

어떻게 해야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괴로움을 끝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윤회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하여 환영 또는 꿈으로 보아야할까? 세상을 한바탕 꿈으로 보아 꿈만 깨면 되는 것일까?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임을 자각하면 모두 깨닫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진리는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론적 세계 즉, 조건계를 말한다.

 

이 세상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삼계와 육도 역시 존재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세 가지 세상 중에서 조건계를 강조하신 것일까? 그것은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서라 볼 수 있다. 오온에 대하여 생성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관찰했을 때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했을 때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탐, , 치가 소멸된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관찰하면 세계의 끝,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가르칩니다.”(S2.26)

 

 

2016-09-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