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소라고동의 비유와 자심해탈(慈心解脫)

담마다사 이병욱 2017. 2. 13. 18:11

 

소라고동의 비유와 자심해탈(慈心解脫)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합니다. 지관쌍수라 하여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듯이, 지혜와 자비는 함께 닦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에게 자비가 있으며, 자비로운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으면 반쪽에 지나지 않고, 자비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역시 반쪽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초기 경전 도처에서 지혜와 자비를 함께 닦을 것을 말씀 했습니다.

 

자비와 관련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사무량심 형태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애( mettā), 연민( karuā), 기뻐함( muditā), 평정( upekkhā)이라 하여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내는 자는 거룩한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사무량심에 대하여 네 가지 거룩한 마음(brahma-vihāra: 四梵住)’라 합니다.

 

사무량심은 닦아야 하는 마음입니다. 단지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닦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로 선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네 가지 마음이 모두 사선정 상태에 까지 이르지 못합니다. 평정의 마음은 사선정에 이를 수 있지만 나머지 자애와 연민과 기쁨은 삼선정까지가 한계 입니다. 사선정에서는 평정이 함께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자애와 연민과 기쁨은 평정의 요소가 없기 때문에 희열과 행복까지만 있는 삼선정까지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닦을 것인가?

 

사무량심에서 가장 핵심은 자애(mettā)입니다. 자애를 닦아야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는 초기경전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된다. (A5.161)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애를 닦아야 하는 목적은 악의, 분노, 원한 등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원한 맺힌 자에게 원한으로서 갚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애의 마음을 내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역발상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된다.”라 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본인만 힘들 뿐입니다. 그러나 미워 하는 마음을 내려 놓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원한 맺힌 자에게 원한으로 앙갚음 하는 것 보다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었을 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 자심해탈(慈心解脫, mettācetovimutti)’일 것입니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된다.(A5.161)라 했습니다.

 

먼저 계청정을

 

자심해탈이라는 선정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선행 되어야 할까요? 자애를 방사하기 전에 먼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소라고동 소리의 경(Sakhadhamasutta, S42.8)’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So pāātipāta pahāya pāātipātā paivirato hoti adinnādāna pahāya adinnādānā paivirato hoti, kāmesu micchācāra pahāya kāmesu micchācārā paivirato hoti, musāvāda pahāya musāvādā paivirato hoti, pisuāvāca pahāya pisuāyavācāya paivirato hoti, pharusavāca pahāya pharusāya vācāya paivirato hoti, samphappalāpa pahāya samphappalāpā paivirato hoti, abhijjha pahāya anabhijjhālū hoti, vyāpādadosa pahāya abyāpannacitto hoti, micchādiṭṭhi pahāya sammādiṭṭhiko hoti.

 

그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버리고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그만둡니다.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것을 버리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것을 그만둡니다.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버리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그만둡니다. 거짓말 하는 것을 버리고 거짓말 하는 것을 그만 둡니다. 이간질 하는 것을 버리고 이간질 하는 것을 그만 둡니다. 욕지거리 하는 것을 버리고 욕지거리 하는 것을 그만 둡니다. 꾸며대는 말 하는 것을 버리고 꾸며대는 말 하는 것을 그만 둡니다. 탐욕을 버리고 탐욕없이 지냅니다. 성냄을 버리고 성냄없이 지냅니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어리석음 없이 지냅니다.”(S42.8, 전재성님역)

 

 

나팔소리 고동의 경에 따르면 자심해탈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십선법을 들고 있습니다. 열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법을 끊어 버려야 하는 것이 전제조건입니다. 이는 계청정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합니다.

 

정학의 단계

 

불교수행에 대하여 계온, 정온, 혜온이라 계정혜삼학으로 설명합니다. 자심해탈을 닦는 첫 번째 조건으로서 계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정학의 단계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Sa kho so gāmai ariyasāvako eva vigatābhijjho vigatavyāpādo. Asammūho sampajāno patissato mettāsahagatena cetasā eka disa pharitvā viharati, tathā dutiya, tathā tatiya, tathā catutthi; iti uddhamadhotiriya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 loka mettāsahagatena cetasā vipulena mahaggatena appamāena averena avyāpajjhena pharitvā viharati.

 

촌장이여, 그 고귀한 제자는, 탐욕을 떠나고 성냄을 떠나고 어리석음을 떠나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서,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 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S42.8, 전재성님역)

 

 

자심해탈 두 번째 단계는 정학의 단계입니다.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정에 들어야 하는데 경에서는 선정에 드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떠나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서(sampajāno patissato)’라 했습니다. 자애명상의 대상에 대하여 집중하여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을 시방으로 가득채운다(pharitvā viharati)’고 했습니다.

 

소라고동의 비유

 

시방을 가득채운다는 것은 남김 없이 채움을 말합니다. 그래서 일체 세계를 자애와 함께 하는 마음으로 광대하고 무량하게 가득 채운다라 했습니다. 이는 하나도 남김 없이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나와 가까운 자뿐만 아니라 원한 맺힌 자도 해당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사람이나 지옥중생도 해당됩니다. 이와 관련된 말이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vipulena mahaggatena appamāena)’라는 말입니다. 이어 지는 문구는 소라고동을 예를 들었습니다.

 

 

Seyyathāpi gāmai balavā sakhadhamo appakasireneva catuddisā viññāpeyya, evameva kho gāmai eva bhāvitāya mettāya cetovimuttiyā eva bahulīkatāya ya pamāakata kamma na ta tatrāvasissati, na ta tatrāvatiṭṭhati.

 

“촌장이여, 예를 들어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 촌장이여, 자애의 마음의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성장되면, 유한한 업의 세계는 거기에 남아있지 않고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S42.8,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자애와 함께 하는 마음을 우주에 가득 채우는 것에 대하여 소라고동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이라 하여, 자심해탈하면 유한한 업의 세계는 남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자심해탈수행을 하여 자애의 마음을 우주에 가득 채우면 더 이상 탐욕이나 성냄 등의 해로운 마음이 발 붙이지 못함을 말합니다.

 

자심해탈(慈心解脫: mettācetovimutti)하면

 

경에 따르면 자심해탈하면 유한한 업(pamāakata kamma)이 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유한한 업의 세계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임을 말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말이 무한한 업의 세계일 것입니다.

 

무한한 업의 세계는 색계를 말합니다. 자심해탈수행을 했을 때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욕계의 찌꺼기가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심해탈수행을 하면 수승한 선정상태가 되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의 세계를 넘어설 것입니다. 선정상태의 마음이 욕계의 마음 보다 더 수승하기 때문에 선정상태에서는 욕계의 탐욕, 성냄 등의 마음이 작용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왜 소라고동은 강력한가?

 

소라고동의 비유와 관련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 번역과 차이가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balavā sakhadhamo appakasireneva catuddisā viññāpeyya’에 대하여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고둥을 부는 자가 힘이 세면 별 어려움 없이 사방에서 다 들을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차이는 ‘balavā sakhadhamo’에 대하여 강력한 소라고동이고둥을 부는 자가 힘이 세면이라 한 것입니다.

 

빠알리 ‘balavā’‘Strong’의 뜻입니다. ‘sakhadhama’‘one who blows a conch shell’로서 소라고동을 부는 자입니다. 전재성님이 소라고동이라 한 것은 소라에서 길게 나오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소라고동은 입으로 불었을 때 적은 힘으로도 큰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는 소라고동의 특이한 구조로 인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린다라고 번역한 것은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각묵스님이 고둥을 부는 자가 힘이 세면이라 번역한 것은 소라고동의 특이한 구조를 감안하지 않고 힘차게부는 자를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입의 힘이 좋아도 소라고동을 통하여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맨입으로 고함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찾아 보았습니다. 관련구절을 보니 Just as a strong conch blower can easily send his signal to the four quarters”라 되어 있습니다. 번역해 보면 강력한 소라고동을 부는 자가 쉽게 사방으로 그의 신호를 보낼 수 있다.’가 될 것입니다. 이는 각묵스님이 고둥을 부는 자가 힘이 세면라고 번역한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소라고동은 관악기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소라고동자체에서 강력한 힘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고둥을 부는 자가 힘이 센 것으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이는 소라고동의 특징을 감안하지 않은 적절치 못한 번역으로 봅니다.

 

빅쿠보디는 소라고동의 비유와 관련한 자심해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를 해 놓았습니다.

 

 

Cp. AN V 299-301. Spk: When (simple) "lovingkindness" is said, this can be interpreted either as access concentration or absorption, but when it is qualified as "liberation of mind" (cetovimutti) it definitely means absorption. It is sense-sphere kamma that is called limited kamma (pamanakatam kammam); form-sphere kamma is called limitless (or measureless, appamanakatam) kamma. This is called limitless because it is done by transcending the limit, for it is developed by way of specified, unspecified, and directional pervasion (see Vism 309-11; Ppn 9:49-58).

 

Does not remain there, does not persist there (nu tam tatavavasissati, na tam tatravatiṭṭhati). Spk: That sense-sphere kamma does not linger on, does not stay on, in that form sphere or formless-sphere kamma. What is meant? That sense-sphere kamma is unable to overpower the formsphere or formless sphere kamma or to persist and gain the opportunity (to yield its own results); rather, as a great flood might inundate a little stream, the form-sphere or formless-sphere kamma overpowers the sense-sphere kamrna and remains after having made an opportunity (for its own results). The superior kamma, having prevented the sense-sphere kamma from producing its result, on its own leads to rebirth in the brahma world.

 

(CDB Vol.II, 346번 각주, 빅쿠보디)

 

 

 

취타대의 나각(螺角)

 

소라고동은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관현악기처럼 입을 대고 불면 힘들이지 않고도 원하는 소리를 크게 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심해의 신비로운 울림이라 하여 취타대에서 나팔고동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취타대에서 사용되는 가장 원시적인 악기에 대하여 나각(螺角)’이라 합니다. 멀리까지 깊게 울려 퍼지는 나각의 소리는 바다에서 얻어 온 것입니다. 나팔을 껍질로 지고 다니는 연체동물 나팔고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심해의 신비로운 울림, 나팔고둥 / YTN 사이언스

 

 

 

나각에 대하여 법라(法螺)’라고도 합니다. 절에서 의식을 행할 때 사용되는 관악기의 하나로 소라 끝부분에 피리를 붙인 악기를 말합니다. 불교용어사전에 따르면 법라는 사찰의 의식행사 이외에도 승려가 좌선을 할 때 졸음을 막기 위한 경우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볍게 운동을 하는 등 경행을 할 경우에도 사용된다. 부처님의 설법을 소리에 비유할 때 쓰이기도 한다.”(법라)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소라고동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전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악기입니다. 특히 불교의식에서 사용할 때는 병을 치료하는데도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라고동에 대한 이야기는 천수경에도 등장합니다.

 

상카섭나네 모다나야 사바하

 

천수경 신묘장구대다라니 끝 무렵에 상카섭나네 모다나야 사바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상카 삽다 니보다나야 쓰와하(sankha-sabda-nibodhanaya svaha)”라 하여 그 뜻은 소라고동에서 소리가 울릴 때 깨어난 님을 위하여 쓰와하라 합니다.

 

천수경에서 소라고동을 뜻하는 말이 상카(sakha)’입니다. 전재성님이 지은 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상카에 대하여 소라고동은 다름 아닌 창조-유지-파괴로 상징되는 성스로운 삼박자의 우주적 진동음으로서 옴소리를 상징한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소라고동이 옴소리와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수경에서는 옴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옴이라는 말은 성스런 음이라 하여 성음(聖音)이라 합니다. 깨달은 자가 성취한 지복의 성음이 모든 존재에게 차별 없이 자비의 진동파로 발산되기 때문이라 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사무량심으로 나타납니다.

 

초기경전에서 사무량심 정형구는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로 시작됩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무한편만, 한정편만, 방향편만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자애와 연민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전 우주를 가득 채웠을 때 초기경전에서는 소라고동의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Om)에 대하여 성스런 진동파라 합니다. 이 말이 힌두교에서 유래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받아 들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천수경을 들 수 있습니다. “상카섭나네에서 상카라는 말이 소라고동을 뜻하는 말로 옴소리와 같은 의미로 봅니다.

 

왜 해조음(海潮音)인가

 

소라고동은 일종의 관악기라 볼 수 있습니다. 소라고동은 힘들이지 않고도 힘찬 소리를 뿜어 낼 수 있습니다. 그 소리는 매우 신비해서 심해 해저의 신비로운 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신비로운 소리를 내는 소라고동에 대하여 우주의 시작과 유지와 끝을 나타내는 성음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리라 합니다.

 

우주의 성음(聲音), 옴소리에 대하여 해조음(海潮音)’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법화경에 따르면 옴소리는 묘음, 관세음, 범음, 해조음, 승피관세음으로 불리웁니다. 이중에서 해조음은 우주적인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들린다고 합니다. 이때에 그 소리는 쓰와하(svaha)’라고 표현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에서 상카 섭나네 모다나야 사바하가 있습니다. 이말은 소라고동에서 소리가 울릴 때 깨어난 님을 위하여 쓰와하라는 뜻입니다. 소라고동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우주적 성음 을 일컫는 말이라 합니다. 또한 쓰와하라는 후렴구는 해조음을 나타난 말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소라고동을 뜻하는 상카라는 말은 초기경전에도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우주 가득 채우는 자비의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소라고동소리는 자비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힌두신 찬양일색의 경전

 

옴과 같은 의미의 소라고동은 자비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옴에 대하여 우주적 성음이라 하여 창조, 유지, 파괴로 설명합니다. 옴을 뜻하는 AUM에서, A는 창조신인 브라흐마신의 현현이라하고, U는 유지신인 비슈누신의 현현으로, 그리고 M은 파괴신인 시바신의 현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옴은 우주의 시작과 유지와 파괴를 뜻하는 우주적 음으로서 성스런 진동파라 합니다. 그렇다고 소라고동의 비유가 힌두교에서 유래한 것은 아닙니다. 힌두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후대에 성립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천수경은 생활경전입니다. 그 중에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매우 신비한 주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석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석을 해 보면 놀랍게도 힌두신 찬양일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밀교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는 언제 성립되었을까?

 

힌두교는 언제 성립되었을까요? 미즈노 고겐의 인도불교사(경서원)’에 따르면 “힌두이즘 형성에 대응하여, 혹은 자극을 받아 불교 내에서도  B.C 2세기 무렵부터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힌두이즘에 자극받아 새로 생겨난 불교운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대승불교 보다 먼저 생겨난 것이 힌두이즘입니다.

 

힌두이즘은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불교가 융성할 때 위기감을 느낀 브라만교에서 새로 만든 것이 힌두교라 합니다. 브라만왕조 슝가왕조 성립시기인 ‘B.C 2세기’부터 힌두이즘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교의 위세에 억눌려 있었던 브라만교에서 각 지방의 부족신앙이나 민속신앙을 흡수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교이념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것이 힌두이즘입니다.

 

힌두이즘은 브라만교를 뿌리로 하여 환골탈태한 것입니다. 성립시기가 BC 2세기 이므로 대승불교운동 보다 약간 앞서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운동이 힌두이즘의 발흥에 자극받아 성립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후대 대승불교에서는 힌두교의 사상을 받아 들여 불교와 접목했습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신묘장구대다라니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혜학을 닦을 것인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정혜삼학을 닦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계학을 닦아야 하고, 다음을 정학을 닦아야 합니다. 자애의 마음으로 온 우주를 가득 채우는 것은 정학에 대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혜학을 닦아야 합니다. 자심해탈에 따른 혜학은 어떻게 닦아야 할까요? 초기경전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첫 번째 선정도 형성되고 의도된 것이다.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무상하고 소멸하는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러한 상태에서 번뇌의 소멸을 성취합니다. 만약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가르침에 대한 욕구와 가르침에 대한 희열로 다섯 가지 낮은 경지의 장애를 끊고 홀연히 다시 태어나 그 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저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자가 됩니다.”( M52, 전재성님역)

 

 

맛지마니까야 앗타까나가라 경(Aṭṭhakanāgara sutta, M52)’에 따르면 선정도 의도된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애의 마음으로 선정에 들었다면 의도된 것입니다.

 

선정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위빠사나를 닦아야 합니다. 자심해탈했다는 것은 위빠사나를 닦은 것입니다. 자애의 마음으로 세 번째 선정에 들 수 있지만 거기에서 머문다면 정학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학을 넘어 혜학단계로 가려면 자심해탈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애의 마음에 의한 선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경에서는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무상하고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통찰해야 함을 말합니다. 다름 아닌 위빠사나수행을 말합니다.

 

아라한이 되거나 못되도 아나함

 

자심해탈은 선정과 지혜수행에 대한 결과의 산물입니다. 자애관 수행은 선정수행이라 볼 수 있고, 선정수행에서 벗어나 무상으로 관찰하는 것은 지혜수행입니다. 선정이라는 것이 조건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 무상하고 변하는 현상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자애수행이 세 번째 선정까지 가능하므로 사마타(초선)-위빠사나, 사마타(2)-위빠사나, 사마타(3)-위빠사나 순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했을 때 아라한이 되거나 못되도 아나함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2017-02-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