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사상이 총집합된 ‘꿈의 비유’
법문이나 강연을 들으면 기쁨과 환희가 생겨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혼란만 일어나고 의구심만 든다면 역효과라 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 났을까요? 상근기의 수행자에게나 해당 되는 법문을 이제 갓 불교에 입문한 자에게 적용한다면 햇갈릴 것입니다. 마치 초심자에게 “색즉시공공즉시색”하며 반야심경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튜브에서 이중표 교수의 강연을 들어 보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다’는 공의 논리로 강연하기 때문입니다. 근본경전을 연구하는 학자라 하지만 용수의 중론에 입각하여 모든 것을 공의 논리로 해석하기 때문에 법문을 들어 보면 하늘나라도 없고 윤회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언어와 문자로 개념화 된 것이기 때문에 천상도 없고 윤회도 없습니다. 있다면 그 이름이 있을 뿐일 것입니다. 이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라는 논리입니다.
모든 것을 개념화 된 것으로 보아 분별하지 말라고 했을 때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언어와 문자로 된 경전을 볼 필요도 없고 힘들게 수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면 어느 때 문득 깨달을 것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강연을 듣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것이 있다면 ‘허(虛)’와 ‘무(無)’일 것입니다.
금수저 야사에게
부처님은 초심자나 재가불자에게 처음부터 심오한 법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듣는 자의 수준에 따라, 그리고 처한 상황에 따라 그에 걸맞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오늘날 재벌2세와 같고 ‘금수저’라 볼 수 있는 야사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Ekamantaṃ nisinnassa kho yasassa kulaputtassa bhagavā ānupubbīkathaṃ kathesi. Seyyathīdaṃ: dānakathaṃ sīlakathaṃ saggakathaṃ kāmānaṃ ādinavaṃ okāraṃ saṃkilesaṃ nekkhamme ānisaṃsaṃ pakāsesi.
“가까이 다가가서 자리에 앉은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에게 세존께서는 차제설법을 했다. 곧, 보시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타락-오염과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했다.”(Vin.I.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야사에게 법문한 것은 ‘차제설법(ānupubbikathā)’입니다. 차제설법을 영어로 ‘graduated sermon’이라 하며 경전적 근거는 ‘D.I,110; II,41 sq.; M.I,379; J.I,8; Miln.228; DA.I,277, 308; DhA.IV,199. (Page 101)’로서 위 문구처럼 정형화 되어 있습니다.
공(空)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님은 초심자에게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중론으로 설하는 자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하늘나라는 ‘본래 없는 것’이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도 본래 없다고 합니다. 다만 ‘명사로서만’ 있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하늘나라는 없는 것이 됩니다. 당연히 보시도 없고 지계도 없게 됩니다. 물론 ‘공’의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고집멸도’라 하여 사성제도 없습니다. 당연히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도 없습니다.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래서 능가경 게송에서는 부처님이 45년간 설법을 했지만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我都無所說)”라 했습니다. 과연 이런 가르침을 초심자들이 수용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 가르침을 모두 부정하고 모든 것이 개념화 된 것으로서 본래 없다고 했을 때 믿고 따를 대상도 없고 수행할 필요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식의 법문이나 강연은 초심자에게는 역효과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야사에게 차제설법으로 기쁨과 환희를 주었습니다.
차제설법(ānupubbikathā)으로
부처님은 재벌2세 금수저에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타락-오염과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한 법문을 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야사에게는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탐닉했으나 거기에서 재난에 대한 위험을 본 야사에게는 매우 시기적절한 법문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좀 더 수승한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율장대품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Yadā bhagavā aññāsi yasaṃ kulaputtaṃ kallacittaṃ muducittaṃ vinivaraṇacittaṃ udaggacittaṃ pasannacittaṃ, atha yā buddhānaṃ sāmukkaṃsikā3dhammadesanā taṃ pakāsesi - dukkhaṃ samudayaṃ nirodhaṃ maggaṃ. Seyyāthāpi nāma suddhaṃ vatthaṃ apagatakālakaṃ sammadve rajanaṃ patigaṇheyya. Evameva yasassa kulaputtassa tasmiṃ yeva āsane virajaṃ vitamalaṃ dhammacakkhuṃ udapādi
“그리고 세존께서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에게 건강한 마음, 유연한 마음, 열린 마음, 기뻐하는 마음, 청정한 마음이 생겨난 것을 알자, 모든 부처님들에게 핵심이 되는 법문을 설했다.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했다. 마치 청정하여 반점이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 들이는 것처럼,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Vin.I.1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야사에게 사성제를 설했습니다. 사성제를 설하기 이전에는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법문을 설했습니다. 이렇게 차제설법을 하자 야사는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게 됐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청정하여 반점이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 들이는 것처럼(Seyyāthāpi nāma suddhaṃ vatthaṃ apagatakālakaṃ sammadve rajanaṃ patigaṇheyya)”라 했습니다. 깨끗한 천에 물감이 베이는 것처럼 가르침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
야사는 부처님의 차제설법으로 진리의 눈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무엇이든 생겨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습니다. 생성과 소멸에 따른 연기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의 입장에서 ‘무고집멸도’라 하여 사성제를 부정한다면 진리의 눈이 생겨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괴로움의 소멸도 없고 열반도 없고 윤회의 종식도 없습니다.
한자경교수의 꿈의 비유
여기 두 갈레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처님의 길’이고 또 하나는 ‘용수의 길’입니다. 부처님의 길로 가는 자는 사성제를 실현하여 열반의 길로 가는 자이고, 용수의 길을 가는 자는 사성제는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꿈인 줄 알아 꿈을 깨는 것입니다.
용수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꿈의 세상입니다. 모두가 언어와 문자로서 개념화 되어 있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음으로서 꿈꾸고 있는 세상임을 알아 꿈에서 벗어나자고 합니다. 한자경 교수는 꿈의 비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뢰야식은
우리가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든 못하든
언제나 현행식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즉 현상 세계의 영상을 산출한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산출된 영상 세계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므로,
그렇게 영상 세계를 산출하는 식의 활동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활동 결과의 영상 세계를
식과 무관한 것으로,
마음 밖의 실재로 간주하게 된다.
수행을 통해
아뢰야식의 활동을
그런 것으로 자각하기 전에는
비록 아뢰야식의 활동을 통해 영상의 세계를 그려내고
그 안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가 식이고 영상인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의식에서의 '깨달음의 전도' 양상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꿈의 모습이다.
그래서 유식은 우리의 일상 의식을 늘 꿈에 비유한다.
깨어 있는 일상의 의식이
꿈의 의식에 비유되는 것은
꿈의 세계를 산출하는 의식과
현상세계를 산출하는 아뢰야식의 공통의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꿈꾸는 의식이 그려놓은
꿈의 세계 속에서 꿈속의 나는
그 세계를 객관 실재라고 착각한다.
꿈속의 자아의식이
꿈꾸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면서도
그 소의처를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꿈 속의 나는
너와 自他로 대면해 있고
세계와 主客으로 대립해 있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나와 무관하게 내 바깥에 있으며
나는 그것들과 외적인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꿈속의 너 그리고 꿈의 세계 자체가
꿈속의 나와 마찬가지로
실은 하나의 꿈꾸는 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꿈에서 깨어남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꿈의 순간에 꿈꾸는 의식이 전혀 활동하지 않았다거나
꿈에서 내가 그 꿈꾸는 의식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꿈 자체가 꿈꾸는 의식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다만 꿈꾸고 있는 한
그것이 내가 넘어설 수 없는 전체이기에,
내가 그 밖으로 나가설 수가 없기에,
내가 바로 그 전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그 전체 의식인 꿈꾸는 의식으로 알지 못하고,
그 전체 중의 일부인 꿈속 나의 자아의식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전체를 자기로 자각할 수 없으므로,
그 안에서 스스로 경계짓고
그 경계지어진 것만을 나로 여기는 것이다.
깨어 있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나의 마음인 아뢰야식이 그려내는 세계,
즉 영상이며 식이다.
그런데 내가 그 마음 밖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그 전체를 나의 마음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그 안에 경계를 그어
경계지어진 나만을 나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의식된 영상 세계 전체를
나와 너, 나와 세계로 나누는 것은
결국 그 세계를 그리는 마음 자체(아뢰야식)를
구획지어진 나와 그 밖의 세계로 나누는 것이 된다.
반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실은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음(아뢰야식)이 그린 세계라는 것,
그 세계 속의 나와 너가
실은 그 하나의 마음(아뢰야식)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내가 표층적 자아 의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경계 너머의 전체의 마음 심층에 도달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하다.
표층의 분별적인 자아 의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마음 심층의 미세한 아뢰야식의 활동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자각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일체가
식이 그린 영상이라는 것, 유식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실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
자기 자신과 세계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유식성의 자각, 불교의 무아론, 한자경교수)
한자경교수는 꿈의 비유를 들어 깨달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꿈을 꿀 때 두 개의 나가 있습니다. ‘꿈꾸는 나(I, 大我)’와 ‘꿈속의 나(i, 小我)’가 있습니다. 꿈속에서는 꿈속의 나와 대상인 기세간이 있습니다. 꿈속의 나는 꿈속에서 마치 현실처럼 살아 갑니다. 그런데 꿈속은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현실 같습니다. 꿈속에서 몽정을 하는 것도 느낌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꿈속의 나는 꿈꾸는 나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다만 꿈을 깨고 나면 꿈속의 나와 꿈속의 기세간은 모두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꿈의 비유를 들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 역시 꿈속과 같은 세상이라 합니다.
이 세상이 꿈의 세상이라면 나와 기세간은 꿈꾸는 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이 꿈임을 알아 꿈을 깨었을 때, 즉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의 마음’이 있을 것이라 합니다. 그 마음을 ‘일심(一心)’이라 하는데 원효의 ‘일심사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참나’라고 하는 것도 일심을 인격화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심사상과 여래장사상
메일에서 여래장사상과 관련된 질문을 받았습니다. 법우님은 만나서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불자로서 수행과 교학이 미천해서 사양한 바 있습니다. 그 대신 블로그 검색창에서 키워드 ‘여래장’을 집어 넣고 검색하면 혹시 원하는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법우님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진흙 속의 연꽃 님께 여쭤 보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승기신론에서 설명하는 '진여법신'과 '불성', 그리고 '본각'이 힌두교의 브라만-아트만과 너무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불교인들의 숫자가 꽤 많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유명한 불교학자였던 평천창 교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불교학자 중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흙 속의 연꽃 님께서는, 대승기신론의 깨달음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M법우님)
원효의 일심사상은 여래장사상에서 근거합니다. 그런데 그 일심이라는 것이 인격화 되면 브라만교에서는 ‘브라흐마(Brahma)’가 되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 되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가 되고, 대승불교에서는 ‘바이로차나’가 되어 ‘존재의 근원’ 개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래장사상이나 일심사상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오히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영원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브라흐마에 대하여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M49) 라 하여 정형구로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창조신 개념의 브리흐마는 오늘날 유일신교의 유일신과 같은 개념입니다.
한자경 교수의 꿈의 비유에 따르면 꿈꾸는 나, 대아가 있다고 합니다. 이를 ‘큰마음’이라 합니다. 또는 한마음이라 합니다. 한자어로는 일심이라 합니다. 꿈속의 나가 소아라면, 꿈꾸는 나는 대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꿈속인 것을 안다면 이 세상을 꿈꾸게 만든 커다란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심사상이고 여래장사상에서 기인합니다. 그런데 여래장 사상은 유일신교 사상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세상이 근원이 되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의 근원이 인격화 되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꿈의 비유는 결국 존재의 근원, 한마음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당연히 꿈의 비유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꿈속이라면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하여 꿈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방대한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우리가 꿈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으로 이 세상을 설명했습니다. 연기법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꿈속으로 본다면 행위한 것에 대하여 책임이 없을 것입니다. 꿈속에서 살인을 저지르거나 강간짓을 했어도 꿈에서 깨어나면 처벌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꿈으로 본다면 어떤 행위를 해도 업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참으로 업을 짓거나 업을 짓도록 시켜도, 살육하거나 살육하도록 시켜도, 학대하거나 학대하도록 시켜도, 괴롭히거나 괴롭도록 시켜도, 억누르거나 억누르도록 시켜도, 협박하거나 협박하게 시켜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절도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면도칼처럼 예리한 바퀴로써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조각조각 고깃덩이로 잘라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남쪽을 다니면서 살육하거나 살육을 시키며, 절단하거나 절단하도록 시키며, 학대하거나 학대하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없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북쪽을 다니면서 보시하거나 보시하도록 시키고, 제사지내거나 제사지내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 없으며 또한 공덕의 과보도 없다. 보시에 의해서도 수행에 의해서도 계행을 지키더라도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란 없으며 또한 그 공덕의 과보도 없다.” (M60, 전재성님역)
이 견해는 도덕부정론자 ‘뿌라나 깟싸빠’의 견해입니다. 인과를 부정하는 견해입니다. 마치 꿈속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처럼, 살인을 저질러도 아무런 죄악이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뿌라나 깟싸빠의 견해를 예로 든 것은 부처님의 연기사상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뿌라나 깟싸빠의 견해는 ‘무인론’입니다. 모든 원인과 결과는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처럼 초월적이고 완전히 우연적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무법칙적으로 변하므로 인과관계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다고 합니다. 마치 꿈속에서 꿈꾸는 자가 살인을 하고 강간을 해도 꿈을 깨고 나면 아무론 처벌을 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작론자(kiriyavādīn)
뿌라나 깟싸빠의 견해는 ‘허무주의’에 속합니다. 인간행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감은 성립될 수 없어서 ‘무작설’에 속합니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은 스스로 ‘작론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웨란자의 경(A8.11)’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라문 웨란자가 부처님에 대하여 “존자 고따마께서는 무작을 설합니다.”라고 비난했습니다. 뿌라나 깟싸빠나 막칼리 고쌀라 처럼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를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나는 신체적인 악행, 언어적인 악행, 정신적인 악행의 무작을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무작을 설합니다.” (A8.110)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무작은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고 동시에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과를 인정하지 않는 도덕부정론자의 견해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뿌라나 깟싸빠에 대하여 무작론자(akiriyavādīn)라 하고, 부처님 자신은 작론자(kiriyavādīn)라 했습니다.
머리털옷의 비유와 최악의 가르침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무작론자들의 견해로는 청정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머리털로 만든 옷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직조된 옷들이 있더라도 그 가운데 머리털로 만든 옷을 최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머리털로 만든 옷은 추위 속에서 춥고 더위 속에서는 덥고, 추하고, 냄새가 나고, 거친 감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많은 수행자와 설법자의 가르침 가운데 막칼리 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보기 때문이다.”(A3.135, 전재성님역)
추운 겨울철에 모피로 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머리칼로 된 옷을 입고 다닐 때 어떤 느낌일까요? 경에 따르면 ‘추위 속에서 춥고 더위 속에서는 덥고, 추하고, 냄새가 나고, 거친 감촉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뿌라나 깟싸빠와 막칼리 고쌀라의 견해가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하여 ‘최악’이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무작론을 설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무작론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가르침이라면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단멸할 것이기 때문에 청정한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수행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꿈의 비유를 들어 깨달음을 설명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현실이 꿈속의 세상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꿈이 깨면 그만입니다. 마치 막칼리 고쌀라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청정해집니다.”(D2)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막칼리 고쌀라에 따르면 청정한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뭇삶이 청정해지는데는 아무런 원인도 조건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는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되기 때문이라 합니다. 따라서 청정해지기 위하여 그 어떤 애씀이나 정진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마치 요즘 유튜브에서 현존을 말하는 자들 같습니다. 막칼리 고쌀라의 일부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뭇삶이 오염되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뭇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됩니다. 뭇삶이 청정해지는데도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뭇 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청정해집니다. 거기에는 힘도 없고 애씀도 없고 사람의 노력도 없고 사람의 열성도 없습니다. 모든 뭇삶,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영혼은 자유가 없이 힘도 없이 노력도 없이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변이하며 여섯 가지 종에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습니다.” (D2, 전재성님역)
막칼리 고쌀라에 따르면 청정한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뭇삶이 청정해지는데는 아무런 원인도 조건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는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되기 때문이라 합니다. 따라서 청정해지기 위하여 그 어떤 애씀이나 정진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마치 요즘 유튜브에서 현존을 말하는 자들 같습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본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가 연기의 실상이기 때문에 따로 노력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견해는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막칼리 고쌀라는 “일곱 가지의 꿈, 칠백 가지의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팔백사십만 대겁이 있는데, 그 동안 어리석은 자도 슬기로운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에 이릅니다.”(D2)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꿈의 비유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꿈속에서는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꿈 깨면 그만입니다. 따로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를 뒷받침 하는 말이 “예를 들어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똑같이 유전하고 윤회하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D2) 라고 구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아침이 되면 눈을 뜨듯이, 누구나 언젠가는 꿈에서 깨어 날 테니 굳이 애써 수행할 필요도 없고 청정한 삶을 삶을 살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외도사상이 총집합된 ‘꿈의 비유’
무작론자들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에 대하여 실타래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 까지 굴러가다가 멈추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아침이 되면 눈을 뜨듯이, 윤회하다가 괴로움을 끝낼 것이라 합니다. 이를 막칼리 고쌀라의 ‘윤회청정설’입니다.
막칼리 고쌀라의 윤회청정설에 따르면 우리는 애써 수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임을 알아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청정하게 되어 윤회를 끝내게 될 것이라 합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 역시 이런 견해와 비슷합니다. 그냥 내 버려 두라고 합니다. 애쓸 것도 노력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사상과 너무나도 유사합니다.
이중표 교수는 ‘니까야로 읽는 중론’강좌에서 꿈의 비유를 들어 윤회와 깨달음을 설명했습니다. 이중표 교수는 유튜브 강연에서 “그러니까 금강경에 ‘일체유위법’ 하며 꿈과 같고 아지랑이 같고 나오죠? 윤회가 바로 꿈 같은 거에요. 그래 꿈깨자는 이야기라니까. 불교가. 그래서 윤회가 있습니다. 어떻게 있냐? 꿈처럼.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20161014 니까야로 읽는 중론1 4 2) 라 했습니다.
유튜브에는 현존을 설하는 자들과 무작을 설하는 자들로 넘쳐 납니다. 그 중에는스님도 있고 학자도 있습니다. 대게 꿈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현실은 꿈의 세계이기 때문에 꿈을 깨는 것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꿈속의 나(I, 小我)’가 ‘꿈꾸는 나(I,大我)’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꿈의 비유는 일심사상으로서 여래장사상이라 볼 수 있어서 유일신교 견해와 매우 유사합니다. 또 한편으로 꿈의 비유는 뿌나라 깟싸빠의 도덕부정론, 그리고 막칼리 고쌀라의 윤회청정설과 같은 견해입니다. 한마디로 꿈의 비유는 육사외도의 사상이 총 집합 되어 있는 듯합니다.
믿고 의지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불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을 말하는 자들, 무작을 설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혼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일까 메일을 주신 법우님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공부해야할지를 모르겠습니다.”라 했습니다. 또한 믿고 따를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얘기하는 어느 교수의 금강경 강의를 듣고 ‘허망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본래 없는 것이라 말하는 법문이나 강연에서 건질 것은 없습니디. 있다면 ‘허’와 ‘무’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꿈의 비유로 깨달음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무작을 설한다고 하여 “가르침 가운데 막칼리 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 한다.”(A3.135) 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꿈의 비유는 최악의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유튜브에서는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나 무작을 말하는 자들로 넘쳐 납니다. 여기에 스님들과 학자들도 가세하여 불자들을 큰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메일을 주신 법우님은 모교수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강의를 듣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문이나 강연을 들었을 때 기쁨과 희망을 주어야 하나 정반대로 “무엇을 믿고,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라 했습니다. 또 믿고 따를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얘기하는 어느 교수의 금강경 강의를 듣고 ‘허망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외도의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부처님은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부터 시작 하여 차츰 심오한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이렇게 차제로 설했을 때 기쁨과 환희에 가득찼을 것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육사외도의 견해는 모두 논파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 할 수 없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 라 했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습니다. 믿고 의지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 초기경전에 의지하면 됩니다.
2017-02-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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