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 스승의 주먹(師拳)과 비밀의 가르침(密語)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어느 스님은 법상에서 부처님은 단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경전에 의지하여 신행생활하고 있는 불자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 옵니다.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를 보면 아름다운 게송으로 가득한데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부처님이 말년 열반에 들 때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이 팔만사천법문을 설했지만 한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언설로 진리를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언어와 문자에 매이면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법문을 보면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말씀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은 마치 암호문과 같아서 해독할 수 없고, 설령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더라도 그 뜻이 너무 심오해서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의 언어로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설법했습니다. 이를 기록해 놓은 것이 빠알리니까야 입니다.
빠알리 니까야는 구전 된 것을 문자화 해 놓은 것입니다. 진리를 언어와 문자로표현 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방대한 니까야는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되어 있어서 언어와 문자로 된 것으로도 대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언어와 문자로 된 것을 전면 부정하여 “부처님은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라 한 것은 무책임해 보입니다.
누군가 부처님은 한말씀도 설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불자들은 햇갈릴 것입니다. 경전에 의지하여 신행하는 불자라면 경전공부를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경전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불자라면 수행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부처님은 한마디도 말씀 하지 않으셨을까요? 대체 무슨 근거로, 대체 어떤 경전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능가경에 이런 게송이
부처님은 수 많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그 방대함에 놀라게 됩니다. 해인사에 가면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서고에 가득합니다. 이렇게 많은 말씀을 남긴 부처님에 대하여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빠알리 경장과 율장, 그리고 아비담마 논장 그 어디에도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라는 문구를 보지 못했습니다. 대체 이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찾아 보니 능가경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某夜成正覺,
某夜般涅槃,
於此二中間,
我都無所說。
自證本住法,
故作是密語,
我及諸如來,
無有少差別。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
이 사이에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자증과 본주의 법인 까닭에
이 밀어를 한 것이니
나와 모든 여래
조금도 차별이 없다네.”(능가경 7권, 楞伽經之四)
대승경전에 능가경이 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능가성(楞伽城)에서 설하였다고 전하는 경전으로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형성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불경”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래장사상 계통의 경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최초의 한역본은 443년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능가아발타라보경’이라 합니다. 513년 보리유지가 번역한 ‘입능가경’이 있고, 704년에 실차난타가 ‘대승입능가경’이라 하여 7권으로 번역했습니다. 여래장사상의 능가경은 대승기신론에 앞선 선구적 경전이라 합니다. 원효는 능가경소와 능가경요간을 주석한바 있지만 현존하지 않습니다.
능가경 게송을 보면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我都無所說)”라 했습니다. 아마 이 구절이 부처님은 한말씀도 설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근거가 되는 문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초기경전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방대한 빠알리 니까야는 물론, 위나야, 아비담마 논장 그 어느 곳에서도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띠붓따까에도 이런 게송이
초기경전에 ‘이띠붓따까’가 있습니다. 한자어로 ‘여시어경’이라 합니다. 쿳다까니까야에 소속된 경전으로서 ‘이와 같이 말해 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짧은 산문과 게송이 곁들여진 112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띠붓따까는 숫따니빠따, 법구경, 우다나 등과 함께 대체로 고층의 경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띠붓따까는 주로 윤리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 수행에 알맞은 심리적 분석을 보여 주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띠붓다까 ‘세계에 대한 이해의 경(Lokāvabodhasutta, It121)’에는 능가경 게송과 유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능가경 게송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가르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Yañ-ca bhikkhave rattiṃ Tathāgato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jjhati,
yañ-ca rattiṃ anupādisesāya nibbānadhātuyā parinibbāyati,
yaṃ etasmiṃ antare bhāsati lapati niddisati,
sabbaṃ taṃ tatheva hoti no aññathā tasmā Tathāgato ti vuccati.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 전재성님역)
이띠붓따까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능가경에서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某夜成正 某夜般涅槃)”구절과 동일 합니다. 더구나 “그 사이에(yaṃ etasmiṃ antare)”와 “이 사이에(於此二中間)”도 일치 합니다. 이를 우연의 일치라 해야 할까요?
이띠붓따까는 고층의 경전으로서 부처님 당시의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에 대하여 산문과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시기적으로 능가경 보다 훨씬 더 앞선 경전입니다. 그런데 능가경 게송 구조를 보면 이띠부따까 ‘세계에 대한 이해의 경(It121)’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 능가경 게송의 원형이자 오리지널 버전으로 봅니다. 그러나 중간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와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는 구절입니다.
구분교(九分敎: navaṅga-buddha sāsana)
능가경에서는 부처님이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라 했습니다. 이에 반해 이띠붓따까에서는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 했습니다. (bhāsati lapati niddisati, sabbaṃ taṃ tatheva hoti no aññathā)”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띠붓따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bhāsati lapati niddisati, sabbaṃ taṃ tatheva hoti no aññathā tasmā Tathāgato ti vuccati : ItA.II.190에 따르면, 그 사이에 가르친 일체의 경과 게송 등의 아홉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의 부처님의 말씀은 의미상으로 형식상으로 비난의 여지가 없고,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이 없으며 일체의 형태를 갖추고, 탐욕의 광기, 성냄의 광기, 어리석음의 광기를 쳐부수고, 털끝만큼도 잘못도 없이, 설해진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고,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니다.”(이띠붓따까 1568번 각주, 전재성님)
부처님의 팔만사천 가르침은 아홉 가지로 구분됩니다. 이를 ‘구분교(九分敎: navaṅga-buddha sāsana)’라 하여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구분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비난의 여지가 없고,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이 없으며 일체의 형태를 갖추고”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그것 자체로 완전하고 완성된 가르침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털끝만큼도 잘못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다(taṃ tatheva hoti)’라 한 것은 구분교의 가르침을 말하고, 또한 그 가르침에 대하여 ‘다른 것과 같지 않다(no aññathā tasmā)’라 한 것은 구분교의 가르침외 다른 것이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후대 대승경전 능가경에서는 마치 비밀스런 가르침이 별도로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스승의 주먹(師拳)과 비밀의 가르침(密語)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그날 밤부터 열반에 든 그 밤에 이르기까지 45년 동안 설한 것을 모두 구분교의 형태로 남겼습니다. 이를 집대성한 것이 오늘날 보는 방대한 빠일리니까야입니다.
만일 부처님이 비밀스런 가르침을 남겼다면 스승에서 제자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이어지는 비밀스런 가르침이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단호하게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디가니까야에서 ‘스승의 주먹(師拳)’비유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스승이 있습니다. 임종에 이를 때 까지 꽉 쥔 주먹을 펴지 않습니다. 꽉 쥔 주먹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비밀스런 가르침을 기대합니다. 스승의 주먹안에는 무언가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을 것이라 봅니다. 그 가르침은 너무나 수승하기 때문에 언어나 문자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스승과 제자사이에 마음과 마음으로, 뜻과 뜻으로만 전승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죽을 때까지 꽉 움켜진 주먹을 펴지 않습니다. 대체 스승의 주먹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스승의 꽉 움켜진 주먹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보여 줄 것이 없음에도 마치 무슨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죽을 때까지 꽉 움켜진 주먹을 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감추어진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이르렀을 때 “아난다여,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 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이르렀을 때 “가르침을 다 설했다.”라고 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그리고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라 했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되는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 외 다른 것은 없다
부처님은 열반에 이른 그 날 밤 가르침을 다 설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능가경에서는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我都無所說)”라 했습니다. 더구나 “자증과 본주의 법인 까닭에 이 밀어를 한 것이니(自證本住法,故作是密語)”라 하여 마치 ‘비밀스런 가르침(密語)’이 있는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능가경에서는 자증법과 본주법에 대하여 ‘밀어’라 합니다. 자증법은 ‘자신의 내증으로부터 얻은 법’을 말하고 본주법은 ‘본래부터 있어온 법’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비밀스런 법(밀어)에 의지하여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45년동안 설한 법문은 방편이기 때문에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라 한 것입니다.
능가경에서는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我都無所說)”라 하여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모두 부정해 버립니다. 언어와 문자로 된 것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표현 할 수 없다고 하여 마음과 마음으로, 뜻과 뜻으로 전승되는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띠붓따까에서는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 하여, 부처님이 설한 것 외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여래는 설한 것과 같이 행하고”
부처님은 팔만사천 법문 외 다른 것이 없다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밤에서부터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 라고 선언했습니다. 능가경에서 말하는 자증법과 본주법이라는 밀어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누구나 알 수 있게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구분교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Yathāvādī bhikkhave
Tathāgato tathākārī,
yathākārī Tathāgato tathāvādī,
iti yathāvādī tathākārī,
yathākārī tathāvādī,
tasmā Tathāgato ti vuccati,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설한 것과 같이 행하고,
행한 것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설한 것과 같이 행하고,
행한 것과 같이 설한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불린다.”(It.121)
2017-02-04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도사상이 총집합된 ‘꿈의 비유’ (0) | 2017.02.10 |
---|---|
우빠까(Upaka)는 인연 없는 중생이었을까? (0) | 2017.02.07 |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일곱 가지 재물 (0) | 2017.01.30 |
“모르면 가만있어라!”현존(現存)을 말하는 자들과 깨달음 사칭 (0) | 2017.01.21 |
쌓아 두면 썩는다 (0) | 2017.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