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면 가만있어라!”현존(現存)을 말하는 자들과 깨달음 사칭
고요한 새벽입니다. 새벽에 눈을 감고 단 10분 만이라도 앉아 있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대신 갖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새벽에 떠오른 생각은 망념이 아닙니다. 좋은 생각들 입니다. 생각은 떠 올랐다가 곧바로 사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유합니다.
좋은 생각은 한마디로 지혜 입니다. 법구경에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 라는 말이 있듯이, 깨끗한 마음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물이 정화되면 얼굴이 비치듯이 고요한 마음에서 좋은 생각이 떠 오르는데 그것은 지혜라 볼 수 있습니다.
고요함에서 지혜가
혼탁하고 산란한 마음에서 좋은 생각이 떠 오를 수 없습니다. 두 눈과 두 귀, 하나의 코 등 다섯 감각기관에서는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 들입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기에 두 눈을 뜨고 있으면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각으로 인하여 일어난 마음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청각입니다. 시각과 청각으로 인하여 일어난 마음이 약 70%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눈만 뜨면 보이고, 귀는 늘 열려 있어서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과 달리 TV를 시청하는 것도 끊임없이 마음이 일어 나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한순간에 오로지 하나의 마음만 일어납니다. 한 순간에 두 마음일 수 없습니다. 한순간에 욕심내면서 동시에 화를 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마음이 매우 빨리 일어나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마치 컴퓨터에서 멀티태스킹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지 한순간에 마음은 한번만 일어납니다. 그것도 대상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대상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명상을 할 때 조용한 곳에 가서 눈을 감는 것은 오감을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들 존자들은 한적한 숲이나 깊은 숲속이나 외딴 곳에 거처를 마련하는데, 그곳에는 보고 자꾸 봐서 즐길 수 있는 그러한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들이 없고, 그곳에는 듣고 자꾸 들어서 즐길 수 있는 그러한 청각에 의해 인식되는 소리들이 없고..”(M150) 수행처가 왜 조용한 곳에 있는지에 대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렇게 오감을 차단하라 했습니다. 다만 의문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는 생각은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사마타이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고요함 속에서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고요함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고요함속에서 좋은 생각이 떠 오릅니다. 그러나 마음이 산란하면 악하고 불건전하 생각에 지배되기 쉽습니다. 의사결정권자가 중대한 결정을 할 때 마음이 산란하다면 잘못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차라리 조용히 눈을 감고 가만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문득 좋은 생각이 떠 오를 수 있습니다. 마치 혼탁한 물이 정화 되었을 때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것과 같이,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아이디어가 떠 오를 수 있습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선수행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잡스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홀로 조용히 참선을 했다고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 갑니다. 대부분 즐기는 삶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귀한자나 천한자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각자 즐길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S56.11) 라고 묘사 되어 있습니다. 결국 새로운 태어남을 야기하고 말 것입니다. 즐기는 삶은 갈애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갈애로 인하여 미래의 존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즐기는 삶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즐기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 나들대로 즐길거리가 있습니다. 즐기는데 있어서 돈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즐긴다는 것은 다름 아닌 욕망에 기인합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하여 호감을 갖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시각적으로 매혹적인 대상을 접하였을 때 갈애가 일어난다면 거머 쥐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대상에 대하여 싫어 하는 마음이 생겨 났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밀쳐 내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냄입니다. 대상에 대하여 호불호의 마음이 매 순간 발생합니다. 밀고 당기듯이 밀당하는 것이 탐욕과 성냄입니다.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 갑니다. 거의 본능으로 살아 갑니다. 한마디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아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외부 대상에 동요되면 호불호가 일어납니다. 한번 싫은 사람은 죽어도 싫은 것이고, 한번 좋아하면 ‘죽어라 좋아’ 하는 것도 느낌에 대한 갈애에 따른 것입니다. 이는 “그 즐거운 느낌에 닿아 그것을 기뻐하고 환영하고 탐착하면, 탐욕에 대한 경향이 잠재한다.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미혹에 빠져 분노의 성향이 잠재하게 된다.”(M148)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쥐려 하고, 괴로운 느낌이 발생되면 밀쳐 내려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느낌대로 살고, 느낌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연기가 회전되어서 업을 짓게 됩니다.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르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선업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악업을 행했다면 괴로움과 불만족과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은 말씀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되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욕망대로 살아 갑니다.
왜 기억해야 하는가?
혼탁한 마음에서 지혜가 나올 수 없습니다. 마음을 맑게 해야 좋은 생각이 떠 오릅니다. 그러나 떠 오른 생각을 흘려 버린다면 매번 똑 같은 생활패턴일 것입니다. 이럴 경우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조용한 마음이 되었을 때 가르침의 한구절이 떠 오른다면 바로 그것이 지혜가 됩니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 법문은 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지혜의 말씀이라 합니다.
지혜의 말씀은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방대한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지혜의 보고 입니다. 평생가도 다 읽어 보지 못할 정도로 우주적 지혜로 가득합니다. 비록 한 구절이라도 고요한 마음 가운데 기억 된다면 이를 사유해야 합니다. 가르침은 한번 보고 흘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여 되새기고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어느날 자신의 삶과 견주어 보았을 때 틀림 없음을 확인한다면 비로소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됩니다. 이때 확신이 생겨납니다.
모든 공부는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구구단을 알아야 산수를 할 수 있고, 주기율표를 외워하여 화학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운동의 법칙에 대한 공식을 외워야 물리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려면 단어를 외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불교수행도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부처님은 가르침을 잘 기억할 것을 말씀 했습니다. 오력에서는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 라 했습니다. 사띠하는 것에 대하여 기억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불교수행은 시작됩니다. 또한 칠각지에서도 “그는 그와 같이 멀리 떠나서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때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S46.3) 라 했습니다. 여기서 멀리 떠난다는 것은 몸의 멀리 떠남과 마음의 멀리 떠남을 말합니다.
칠각지에서 사띠보장가가 가장 앞에 나와 있습니다. 깨달음의 고리라 하여 일곱가지가 고리를 만들어 마치 염주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가장 앞선 것이 사띠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염각지에 대하여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이라 했습니다. 가르침을 늘 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수학공식을 알아야 문제를 풀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구구단을 알아야 산수를 할 수 있고, 수학공식을 알아야 미적분을 풀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사유해야 다음 단계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김을 닦으면서 그 가르침을 지혜로 고찰하고 조사하고 탐구하면. 그때 탐구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된다.”(S46.3) 라 했습니다. 염각지에 이어 택법각지가 시작됨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각지의 연결고리를 보면 정진각지, 희각지, 경안각지, 정각지, 사각지 순으로 진행됩니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해야 합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뿐니야의 경’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부처님은 어떤 때는 가르침을 기꺼이 설했지만 떠 어떤 때는 설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여덟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더라도,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때 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 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설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기억할 뿐 만 아니라 그 위미를 탐구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르침을 사유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씀 했습니다.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 찾아 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여래가 기꺼이 설한다. 뿐니야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출 때, 오로지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A9.82, 전재성님역)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
자칭 타칭 깨달은 자들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클릭 몇 번 하면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촬영한 동영상법문을 보면 모두 자신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부처님 가르침이 없습니다. 경전을 무시하고 자신의 입만 바라 보고 있으면 언하에 대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존을 말하며 자신의 입만 바라보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이기 쉽습니다.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는 율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율장에 따르면 어떤 빅쿠들이 “자, 우리가 재가자들에게 서로서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한 것에 대해 이와 같이 ‘저 수행승은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단추방죄법 제4조, 율장비구계) 라고 말합니다. 흉년이 들어 탁발이 어렵게 되자 배를 채우기 위해 거짓으로 ‘인간을 뛰어 넘는 경지(Uttarimanussadhamma)’, 즉 깨달음을 사칭한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현존을 말하는 자들 역시 깨달음 사칭이기 쉽습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 중에는 “함이 없는 함”이나 “오직 그러할 뿐”이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대체로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하여 말하는 듯 하지만 결국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깨달은 자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깨달음을 사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존(現存)을 말하는 자들
부처님도 깨달은 자이고 자신도 깨달은 자라면 동급일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경전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경전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한마디로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입니다.
최근 교계신문에 칼럼을 쓰는 포항의 모교수는 “불경에 담긴 내용 중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인 것들은 부처님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환공망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들이다.”라 했습니다. 경전을 다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서는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의 발전으로 나타났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미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이 불완전한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현존(現存)을 말하는 자들은 경전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다만 수행과 관련된 몇 가지만 취할 뿐입니다. 또한 비과학적인 것은 모두 배제합니다. 경전에서 보는 브라흐마, 제석천, 마라 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나오면 모두 후대에 편집된 허구라 합니다. 하지만 이는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되는 오류라 봅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두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미적분을 모르는자가 미적분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전을 믿지 않는 자들은 법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법이라 하면 대게 연기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 전체를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을 말씀 하셨음에도 “정말 열반이 실현 가능한 것일까?”라고 의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에 대해 의문한다면 성자의 문턱에도 들어 가지 못할 것입니다. 책상을 탕탕치며 현존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모르면 가만있어라!”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 비록 무아를 말한다고 하지만 법을 의심 하기 때문에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잘못된 수행방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결국 법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은 깨달은 자일 수 없음을 말합니다. 깨달음을 사칭할 수 있어도 깨달은 자일 수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들 세치혀의 현란한 말솜씨에 넋을 잃고 입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모른다고 하여 모두 부정하기 보다 유보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과학적 잣대로 재단하려 하거나 자신의 오감으로 확인 된 것 이외에는 믿지 않는다면 자신만 손해일 것입니다. 더구나 가르침을 부정하려 하려 한다면 가르침을 훼손하는 훼불행위와 같은 것입다. 모르면 알아야 합니다. 아비담마 논장이 아무리 해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여 전면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모르면 차라리 가만 있는 것이 낫습니다.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
불교계에는 회의주의자들로 넘쳐 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게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자들 입니다. 논장을 이해 했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깜냥(感量)으로 가르침을 판단합니다. 유튜브 동영상 법문이 그렇습니다.
요즘 개나 소나 유튜브 법문 하는 것 같습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 중에는 “함이 없는 함”이나 “그러할 뿐”이라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오직 그러 하기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애써 경전을 볼 필요도 없고 힘들게 수행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마치 노자의 ‘무위자연’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아비담마 논장에서 ‘작용심’을 말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마음을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선심, 불선심, 작용심, 과보심입니다. 이 중에서도 작용심을 아라한의 마음이라 합니다. 단지 작용만 하기 때문에 작용심이라 합니다. 대상에 대하여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 줄 알고, 대상에 대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러다 보니 업을 짓지 않습니다. 행위는 하지만 업을 짓지 않는 마음이 작용심(作用心: kiriya-citta)입니다.
아라한의 마음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미래 태어날 일이 없습니다. 현재 오온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열반입니다. 이를 ‘유여열반’이라 합니다. 그러나 오온이 소멸되면 더 이상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갑니다. 이를 ‘무여열반’이라 합니다.
미소 짓는 마음(hasituppāda-citta)
작용만 하는 마음을 아름다운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늘 미소를 짓습니다. 이를 ‘미소 짓는 마음’이라 합니다. 미소 짓는 마음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붓다나 아라한이 미소 지을 때 그들에게만 일어난다.”(붓다아비담마, 89쪽)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미소 짓는 마음은 원인 없이 작용만 하는 마음으로서 ‘기쁨과 함께한 미소 짓는 마음(Somanassa-sahagataṃ hasituppāda-cittaṃ)’이라 합니다.
번뇌 다한 자를 아라한 이라 합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무학(無學)이라 합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미래에 태어날 업을 짓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단지 “그렇네”할 뿐 좋아 하거나 싫어 하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밀고 당기는 탐진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이것이 불교인들에게는 최종 목표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전과 함께 하는 삶
부처님 당시에는 제자들이 잘 경청 했을 것입니다. 경청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의미의 ‘사띠(sati)’일 것입니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가르침은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 됩니다. 전승된 빠알리 삼장을 읽고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유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른 새벽 마음이 고요 해져 있을 때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반드시 다리를 꼬고 죄선만이 능사가 아니라 가르침을 읽고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아라한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돠었을 때 “함이 없이 함”이 되고 오직 “그럴 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의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미소 짓는 마음입니다. 기쁨과 함께 미소 짓는 마음입니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가져도 “그러할 뿐” 하며 미소 짓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깨달은 자들은 언제나 기쁨으로 미소 짓습니다. 그 첫 출발점은 잘 기억하고 잘 사유하는 것입니다. 항상 경전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믿을 것은 가르침 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2017-01-21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 스승의 주먹(師拳)과 비밀의 가르침(密語) (0) | 2017.02.04 |
---|---|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일곱 가지 재물 (0) | 2017.01.30 |
쌓아 두면 썩는다 (0) | 2017.01.19 |
“부처인 내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했다고? 개나 소나 유튜브법문 (0) | 2017.01.16 |
물에 의한 청정은 없다 (0) | 2017.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