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무작론, 무인론, 단멸론을 말하는 자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2. 16. 16:33

 

무작론, 무인론, 단멸론을 말하는 자들

 

 

무여열반이 단멸론이라고?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이 단멸론입니다. 강병균교수는 불교닷컴 환망공상시리즈에서 무여열반(번뇌가 다해 몸과 마음이 둘 다 삼계에서 사라지는 것)에 들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자라는 교리는 결과적(혹은 궁극적) 단멸론(斷滅論)이다.” (2014-11-10) 라 했습니다.

 

강병균교수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에 대하여 글의 모두에서 단멸론이라 규정했습입니다. 그러면서 말미에서 결론적으로 ‘궁극적 단멸론’이건 ‘현실적 단멸론’이건, 이 세상에 ‘단멸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 했습니다. 이런 말은 단멸론을 정당화 하는 것입니다. 물질에 기반한 유전자연기론의 정당성 주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질에 기반하는 어떤 이론도 단멸론으로 귀결됩니다. 과학을 바탕으로 이론 역시 단멸론으로 귀결됩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을 탐구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물질에 기반한 유전자윤회론에 대하여 강병균교수는 진화생물학에 의하면 도도한 유전자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라 하는가 합니다. 생체유전자이든 문화유전자이든 유전자를 남기고 죽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전형적인 단멸론입니다.

 

부처님도 단멸을 설했다

 

강병균교수는 무여열반에 대하여 단멸론이라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외도의 견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바라문 웨란자가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께서는 단멸을 설합니다. (Ucchedavādo bhava gotamoti)라 했습니다. 부처님에게 단멸론자(Ucchedavāda)’라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무여열반을 이야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부처님은 단멸을 설하는 자이었을까요? 웨란자의 도발적인 질문에 부처님은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Atthi khvesa brāhmaa, pariyāyo, yena ma pariyāyena sammā vadamāno vadeyya, ucchedavādo samao gotamo' ti. Aha hi brāhmaa, uccheda vadāmi rāgassa dosassa mohassa, anekavihitāna pāpakāna akusalāna dhammāna uccheda vadāmi. Aya kho brāhmaa, pariyāyo, yena ma pariyāyena sammā vadamāno vadeyya ucchedavādo samao gotamo' ti, no ca kho ya tva sandhāya vadesi.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단멸을 설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말하는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합니다.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단멸을 설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말하는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A8.1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단멸을 설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탐욕(ragas)과 성냄(dosa)과 어리석음(moha)의 단멸이라 했습니다. , , 치로 대표 되는 오염원을 남김 없이 소멸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단멸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단멸을 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무작론, 무인론, 단멸론

 

강병균교수는 부처님의 무여열반에 대하여 유전자연기론에 따른 한존재의 소멸과 같은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존재가 유전자를 남기고 육체적으로 무너졌을 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과 무여열반이 다르지 않음을 말합니다. 강병균식 논리라면 탐, , 치를 소멸하기 위한 교리공부나 수행, 그리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유전자연기론은 단멸론입니다. 단멸론의 특징은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유전자연기론은 단멸론일 뿐만 아니라 무작론이고 무인론입니다. 그래서 유익한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효험이 없다는 견해(akiriyā-diṭṭhi), 뿌리를 부정하고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뿌리가 없다는 견해(ahetuka-diṭṭhi), 그리고 어떠한 결과의 원인도 부정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antthika-diṭṭhi)가 됩니다. 이 세 가지 견해는 사견입니다. 사견은 오역죄 또는 오무간업과 함께 확실하게 지옥으로 안내한다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견해가 최악일까요?

 

효험이 없다는 견해(akiriyā-diṭṭhi)

 

먼저 효험이 없다는 견해(akiriyā-diṭṭhi)’입니다. 이를 무작론이라 합니다. 바라문 웨란자가 존자, 고따마께서는 무작을 설합니다. (Akiriyavādo bhava gotamoti.)”(A8.11)라 했습니다. 이 말은 업지음 없음을 말하는 도덕부정론자라는 뜻입니다. 정말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도덕부정론을 설하였을까요? 부처님은 웨란자의 질문에 나는 신체적인 악행, 언어적인 악행, 정신적인 악행의 무작을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무작을 설합니다. (A8.11) 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무작론은 신구의 삼업에 대한 소멸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무작론은 어떤 것일까요? 초기경전에 따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땅의 생명체들을 면도날 테로 만든 수레바퀴로 조각내어 부수고, 한 덩어리로 만든다고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악은 없으며,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다.”(S24.50,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견해는 행위를 부정하는 견해입니다. 생명을 해치고 타인의 아내를 농락하는 등 오계를 어겨도 전혀 죄가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계를 어김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악은 없고 악에서 오는 과보가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보시하는 공덕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풀고, 수양하고, 자제하고 진실을 말해도, 생겨나는 공덕이 없으며, 공덕의 과보도 없다.”고 합니다. 외도스승 뿌라나 깟싸빠의 견해입니다.

 

뿌라나 깟싸빠의 도덕부정론에 대하여 무작론이라 합니다. 원인과 결과, 업과 업의 과보가 작용하지 않아 무작론(akiriyā-diṭṭhi)이라 합니다. 해롭거나 유익한 업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유업보이무작자 (有業報而無作者)”라는 말도 역시 무작론입니다. 반면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을 설했기 때문에 스스로 작론자(kiriyavādin)’라 했습니다.

 

뿌리가 없다는 견해(ahetuka-diṭṭhi)

 

두 번째로 뿌리가 없다는 견해(ahetuka-diṭṭhi)가 있습니다. 이를 무인론이라 합니다. 무인론은 파아옥 사야도의 책에 따르면 현상들은 운명적으로 결정지어진다. 혹은 환경이 결정한다. 혹은 자연(생태)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결정론에 속하기도 합니다. 결정론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1)운명론, 2) 결정론, 3) 생물학적 결정론이 있습니다. 강병균교수의 유전자연기론은 생물학적 결정론의 범주에도 해당된다고 봅니다.

 

무인론, 운명론, 결정론은 공통적으로 뿌리가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 현존 하는 것에 대하여 뿌리나 원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있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견해 역시 무인론에 속합니다. 윤회를 인정하지 않지만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받아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대개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이런 논리를 전개합니다.

 

생물학적 결정론

 

법륜스님은 즉문즉설에서 윤회를 부정했습니다. 법륜스님은 부처님이 내생이 있느니 업느니 이런 얘기 하는 게 부처님이겠어요? 그러면 천당이 있느니 없으니 하는 거와 차이가 뭐가 있어요? 똑 같은 얘기지. 천당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고 그러면 증명을 하겠어요? 내생이 있다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는 것을 증명을 하겠어요? 이런 걸 뭐라 그런다? 믿음에 속한다. 알았습니까?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있는 줄 아는 거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는 줄 아는데. 있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없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거요 이거는.”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82) 불교의 환생 법륜스님_즉문즉설(2010))라 했습니다. 이는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법륜스님은 윤회를 증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법륜스님 역시 윤회를 부정하며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생이 있다 없다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불교를 전혀 모르는 소리다.”라 했습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륜스님은 윤회관은 무엇일까요? 이는 그러나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현생이고, 이렇게 전생후생을 따지면 ‘그것은 일체유심조의 도리에 어긋난다’ 이말이에요.” (법륜스님, 즉문즉설, 439 윤회에 대하여)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존하는 것은 부모님 때문에 있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물학적 결정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보아 무인론의 범주에 해당합니다

 

자연의 흐름에 맡기라고

 

무인론은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견해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이렇게 소개 되어 있습니다.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 sakililesāya, ahetu appaccayā sattā sakilissanti,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 visuddhiyā, ahetu appaccayā sattā visujjhanti

 

뭇 삶이 오염되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뭇 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된다. 뭇 삶이 청정해지는데도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뭇 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청정해진다. (S24.51, 전재성님역)

 

 

 

 

 

육사외도 스승중의 하나인 막칼리 고쌀라의 견해입니다. 오염과 청정에 대하여 원인도 조건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견해라면 굳이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청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침이 되면 눈을 뜨듯이, 윤회하다가 원인도 조건도 없이 청정해진다고 합니다.

 

무인론에 따르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살면 됩니다. 애써 수행하거나 청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언젠가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언젠가는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자연의 흐름에 맡겨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뭇 삶,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영혼은 자유가 없이 힘도 없이 노력도 없이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변이하며 여섯 가지 종에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는다. (natthi sattā sabbe pāā sabbe bhūtā sabbe jīvā avasā abalā aviriyā,  niyati sagatibhāvaparinatā chasvevābhijātisu sukhadukkha paisavedentī)” (S24.51) 라 했습니다. 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식입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윤회하면서 종극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자연 불변의 법칙으로

 

경에서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변이하며(niyati sagatibhāvaparinatā)” (S24.51)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운명과 우연의 일치와 천성의 틀에 짜여서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36~41쪽을 보라고 했습니다.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 따르면, 병렬복합어 ‘niyatisagatibhāvaparinatā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복합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붓다고사는 모든 존재는 운명과 기회와 본성에 의해 전개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는 운명론, 결정론, 무인론이 모두 포함되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모든 사건과 원인과 결과들이 강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을 너무 강조했다. 운명은 신들의 힘과 권능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노력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무조건적인 결정론으로 무인론이며, 결과적으로 무인무연론이 될 수밖에 없다.”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39)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자연의 불변의 법칙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적 견해를 접하는 것 같습니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으로 규정한 과학적 면모가 보입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스승 막칼리 고쌀라가 주장한 것입니다.

 

무인론, 결정론, 운명론, 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자연의 흐름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질량보전의 법칙대로

 

불교인들 중에는 자연회귀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업과 업의 작용에 따른 윤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대게 윤회를 부정합니다. 성법스님은 육도윤회를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 많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런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성법스님,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성법스님의 견해는 막칼리 고쌀라의 무인론을 연상케 합니다. 모든 것을 자연의 불변의 법칙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된 것도 부모님에 의해서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유전자를 남기기 때문에 윤회한다고 합니다. 이른바 유전자 윤회론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단멸론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말하지 않으면 외도의 견해입니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an-tthika-diṭṭhi)

 

세 번째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an-tthika-diṭṭhi)가 있습니다. 오로지 물질만이 참된 존재라는 견해로 행위들이 만드는 어떠한 과보도 부정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시 태어나는 것 역시 부정하고 다른 존재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부정합니다. 또한 이런 것들을 알고 있다는 부처님의 견해도 부정합니다. 한마디로 몸이 파괴도어 죽으면 정신도 죽어서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적 견해를 말합니다. 이론 견해는 다음과 같은 정형문이 대표적입니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다시 태어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설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인간은 네 가지 위대한 세계로 구성되어 죽은 뒤에는 땅은 땅의 세계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세계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세계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세계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관을 맨 네 사람이 다섯 번째의 사람의 시체를 실어 날라도, 묘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추도가를 불러도, 뼈는 회색으로 되고 바쳐진 공물은 재가 된다. 보시는 실로 어리석은 자들의 말이고, 사후의 존재를 설하는 사람들의 말은 오로지 공허한 거짓일 뿐이다. 어리석은 자이건 현명한 자이건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는 괴멸하여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4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와 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an-tthika-diṭṭhi)’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라 했습니다. 이런 견해를 단멸론이라합니다. 물질에 기반했기 때문에 유물론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물질에 기반한 과학 역시 유물론에 해당할 것입니다.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

 

이와 같은 단멸론에 대하여 파아옥 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습니다.

 

 

보시, 탁발 공양 올리기, 희생을 하지만 이러한 행위의 과보는 없다고 믿으며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혹자는 십선업과 십악업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이것들은 아무런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고 믿는다.

 

혹자는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다른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고집한다. 혹자는 부모에게 어떻게 대하든 차이가 없다고 믿는다. 혹자는 태어남은 없다고 믿는다. 혹자는 수행을 잘 하는 수행자나 브라만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혹자는 모든 존재는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끝이 난다고 믿는다. 이 세계 혹은 다른 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자는 업은 아무데도 인도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끝이 나고, 다시 태어나게 되는 어떤 곳도 없다고 믿는다.

 

혹자는 중생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거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믿는다. 혹자는 죽어서 여기 오지 않는다. 다른 곳에 가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바보만이 보시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믿는다.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고 믿는다.”

 

(파아옥 사야도의 업과 윤호의 법칙’, 393번 각주)

 

 

스님의 법문이나 교수의 강연에서 본래 아무것도 없다라고 합니다. 공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온통 무()자 아니면 비()자로 시작합니다. 반야심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단멸론적 견해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업습니다. 이 세상을 꿈속으로 보며 꿈깨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합니다. 천상이나 지옥은 말로 된 것이어서 개념일 뿐이라 합니다.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 온 사람이 없기에 육도윤회를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단멸론자들은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함께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정신이 물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어서 남는 것이 없는 것으로 봅니다. 또한 육체와 정신은 상호의존하고 있으므로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무너지는 것으로 봅니다, 이에 대하여 연기송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 하여 육체와 정신이 상호의존하는 것으로 보고, 또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라 하여 육체가 없으면 정신도 없는 것으로 봅니다. 부처님의 연기송 중의 일부만 취해서 단멸론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또 불교의 무아사상에 대하여 단멸론에 적용하여 무아이기 때문에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봅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무시하는 견해가 단멸론입니다. 단멸론자에게 있어서 남을 돕거나 베푸는 행위에 대한 공덕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라 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고 그에 대한 공덕, 예를 들어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고 합니다.

 

사성제를 모르면 사견

 

무작론, 무인론, 단멸론은 악처로 이끄는 사견입니다.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요인으로 사견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공통적인 정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입니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했을 때 사견이 발생됩니다. 그래서 물질이 있을 때 물질에 집착하고 물질에 탐착하면 이와 같이라는 정형구로 표현됩니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사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온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아는 자만이 사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오온의 생성과 소멸에 대하여 연기법으로 설했습니다. 연기법을 알아 괴로움과 윤회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곧 사성제를 알면 정견이고 사성제를 모르면 사견입니다.

 

 

 

2017-02-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