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것 보다 더 큰 상실(喪失)은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2. 24. 11:56

 

이것 보다 더 큰 상실(喪失)은 없다

 

 

 

부가세신고를 했는데

 

막연하게 추측하는 것이 있습니다. 확인도 해 보지 않고 그럴 것이다라는 마음입니다. 불안정한 행동이 큰 사고로 이어지듯이, 막연하게 추측하는 것은 커다란 손실로 이어집니다. 부가세신고가 그렇습니다.

 

부가세신고를 했습니다. 막연하게 2월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부가세신고는 매년 1월과 7월 두 번에 걸쳐 신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2월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인하여 큰 손실을 보았습니다.

 

사업자라면 누구나 부가세 신고를 해야 합니다. 요즘은 전산화 되어 있어서 국세청 사이트에 접속하여 자신 신고하고 자진 납부하는 시스템이 정착 되어 있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잘 지켜 왔습니다. 어느 때인가 늦게 신고하여 크게 손실을 본 바 있습니다. 그런 아픈 기억이 있어서 부가세신고철만 되면 신경이 곤두서게 됩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줄 돈을 최대한 늦게 주고 싶어 합니다. 받을 돈은 빨리 받고 싶고 줄 돈은 늦고 주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세금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부가세 같은 경우 마감일이 임박 해서야 부랴부랴 사이트에 접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금은 하루라도 늦게 납부하면 벌금이 부과됩니다. 날자가 많아 질수록 누진되어 벌금은 더욱 크게 늘어납니다. 착오로 한달이 늦었을 때 내야 할 돈에서 거의 50%에 육박하는 금액이 벌금으로 부과되었습니다.

 

착오를 일으킨 것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11년 동안 아마 두 세 차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마다 상당한 금액의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럴 때 마다 후회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동시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후회에 따른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막연한 추측으로 인하여 손실을 보았을 때 아깝기도 하지만 마음속의 분노는 미리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상실의 시대

 

마음속의 분노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 한 켠에 짜증과 불만족으로 가득 차 있다면 속으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가면서 마음속으로 분노할 수 있는 대상은 부지기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분노일 것입니다. 살아 가면서 분노할 일은 너무도 많습니다. 대게 상실에 따른 것입니다.

 

언젠가 학의천 공원에서 우연히 들은 것입니다. 공원쉼터에서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던 사람 중의 하나가 “나는 억울해. 내 나이가 73세야. 이게 말이나 되. 엇그제 제대한 것 같은데 이게 말이나 되냐고?”라며 세월을 한탄했습니다. 세월이 자신을 늙은이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일종의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젊음이 상실된 것에 대한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상실의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영화제목이기도합니다. 그런데 상실과 시대라는 말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이 말이 강하게 각인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재산의 상실과 세월의 상실이 떠오르게 됩니다. 삶의 과정에서 상실하는 것이 너무 많고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잃어 버리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내적분노와 외적분노

 

상실이라는 말은 손해와도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잃어 버림과도 같은 말입니다. 이럴 때 손해 보고는 못살아!”라며 분노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았을 때 자책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분노입니다. 잃어 버린 것에 대하여 상대방의 탓이라 여겼을 때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상실로 인하여 내적분노와 외적분노가 일어납니다.

 

분노는 크게 내적분노와 외적분노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내적분노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것입니다. 후회의 마음이 일어날 때 내적분노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후회가 왜 성냄과 관련이 있을까요?

 

아비담마에 따르면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a)’이 있습니다.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불만족이 함께하는, 적의와 결합한, 자극받지 않은 마음과 또 하나는 불만족이 함께하는, 적의와 결합한, 자극받은 마음입니다. 공통적으로 불만족(Domanassa)’적의(paigha)’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표출되어 있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분노하는 마음 입니다.

 

보험과 관련하여

 

분노의 마음이 일어날 때는 대게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입니다. 특히 금전적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최근 보험과 관련하여 분노한 바 있습니다. 10년 동안 부은 암보험에 대한 것입니다. 매달 20여 만원에 달하는 금액을 10년 간 넣었습니다. 암이 걸릴 때 보상받는 보험입니다. 기한도 없습니다. 도중에 그만 두면 원금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암이 걸리면 보상받을 수 있지만 암이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 보험료는 평생동안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 두었습니다. 도중에 해약한 것은 반사기성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건강염려에 대한 심리를 이용하여 돈벌이 하는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암이 걸려서 보상 받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미래를 대비하여 미리 보험에 가입해 놓는 것은 현명한 삶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암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여 원금도 찾을 수 없는 보험료를 거두어 간다면 반사기 행각과 같은 것으로 봅니다.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받아 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불만족스러웠을 때, 더구나 손해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용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험과 관련하여 좋지 않은 기억이 많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찾아 와서 보험 권유를 할 때 난감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보아서 들어 주자니 영 내키지 않습니다. 아무리 보험의 장점을 새겨 보려 하지만 마음속에서 내키지 않는다면 받아 들이기 힘듭니다. 다른 것은 다 속여도 자신의 마음은 속일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보험이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보험으로 인하여 손해 보았다고 생각하니 아깝기도 하고 동시에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외적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분노에는 어떤 종류가

 

분노에는 내적분노와 외적분노가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불만족과 적의가 있다면 내적 분노에 해당됩니다. 상대방을 탓하여 분노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표출된다면 외적 분노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노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초기경전에 따르면 분노에 대한 표현이 여럿 있습니다. 가장 먼저 탐진치 삼독에서 ()’에 대한 것입니다. 한자어 진은 눈을 부릅 뜻 것을 말합니다. 분노가 표출된 상태입니다. 빠알리어로는 도사(dosā)라 합니다. 도사에 대하여 ‘hatred, anger’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성냄이라 번역합니다. 전형적인 외적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외적 분노가 있다면 내적 분노도 있을 것입니다. 내적분노와 관련된 단어는 불만족(Domanassa), 적의(paigha)가 있습니다. 빠알리어 도마낫사는 정신적 불만족을 의미하는 것이고, 빠띠가는 혐오나 반감을 뜻합니다. 짜증이나 싫어하는 마음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내적분노로서 악의가 있습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빠알리어로 뱌빠다(byāpāda)’라 합니다. 증오나 악심이 이에 해당되는데 내적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질투와 인색과 후회도 분노

 

분노와 관련하여 성냄(dosā), 불만족(Domanassa), 적의(paigha), 악의(byāpāda)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비담마에 따르면 분노라는 것이 반드시 내적으로 외적으로 성냄, 불만족, 적의, 악의에 대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는 놀랍게도 질투(issā)도 있고, 인색(maccharīya)도 있고, 후회(kukkucca)도 있습니다.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 질투, 인색, 후회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아비담마를 접하고 나서부터입니다. 경전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왜 경장과 논장을 함께 보아야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질투와 인색과 후회가 성냄과 관련이 있을까요?

 

질투(issā)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번영을 시기는 하는 특성을 가진다.”라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좋아 하는 것을 지나치게 시기함이라고 국어사전에 표현되어 있는 것과 약간 다릅니다. 아비담마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합니다. 질투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번영을 시기는 하는 특성을 가진다.”라고 한 것은 사무량심에서 기쁨(muditā)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질투는 대상 지향적이어서 자신을 보지 않고 남을 본다.”라고 합니다. 일종의 외적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인색(maccharīya)이 왜 성냄과 관련 있을까요? 아비담마에 따르면 자신의 재산을 숨기는 특성을 가진다.”라 했습니다. 보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단순하게 국어사전적 의미에서 인색의 뜻이 아니라 가르침과 관련하여 인색에 대해 파악해야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A5.254)에 따르면 주거, 가정, 소유, 인기, 법에 대한 다섯 가지 인색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색은 질투와는 반대의 특징이 있습니다. 질투가 외적분노에 대한 것이라면, 인색은 내적분노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물욕입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 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물이나 재산이 상실되었을 때 마음 아파하는 것은 내적 분노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인색은 주관적이라 했습니다.

 

후회(kukkucca)도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에게 화내는 마음이 후회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후회는 행한 악한 것과 행하지 않은 선한 것에 대해 슬퍼하는 특성을 가진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치 엎질러진 물을 도로 담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일은 이미 벌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면 이는 자신의 대한 분노의 표출입니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분노는 성냄이라는 외적분노와 불만족, 적의, 악의라는 내적분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다 질투와 인색, 후회도 분노의 범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분노는 탐욕과 함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탐욕으로 살아 가고, 매일매일 분노로 살아 갑니다. 어리석은 삶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일 것입니다.

 

분노는 소멸의 대상입니다. 어떻게 해야 분노를 소멸해야 할까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사무량심을 닦는 것입니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이라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을 내면 분노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이루려고 집착하면 할수록 더 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내려 놓아라고 합니다. 원한 맺힌 자에게 억지로 자비의 마음을 내기 보다는 그 원한 맺힌 마음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 (Dhp.5)

 

 

노인의 분노

 

살아 가면서 수 많이 분노합니다. 외적으로 표현되어야만 분노가 아닙니다. 마음 속에서 삭이면 화병이 됩니다. 그런데 분노에는 상실에 따른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애써 모은 재물이 한순간의 실수로 손실 되었을 때 상심하게 됩니다. 상실에는 재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먹어 감에 따라 건강이 상실되고 늙어 감에 따라 기능이 쇠퇴할 때 그 상실감은 분노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노인들에게 분노가 많다고 합니다. 그것은 상실에 따른 분노입니다.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을 때 분노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 이 사회에서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역시 분노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만일 무시당한다고 생각했을 때 분노가 폭발할 것입니다. 자식이 버렸다는 생각으로 분노하고, 재산을 빼았겼다고 분노하고, 더구나 세월이 추한 늙은이로 만들었다고 분노합니다. 노인들이 침묵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분노로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상실로 인한 분노일 것입니다.

 

애써 모아 놓은 재산은 언젠가는 모두 흩어져 버립니다. 일생 모아 놓은 재산은 누군가 다 가져가 보립니다. 누가 가져갈까요?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나의 재산을 왕들이 빼앗지 않을까, 도둑들이 빼앗지 않을까, 불이 태워버리지 않을까, 홍수가 휩쓸지 않을까, 사랑하지 않는 상속자가 빼앗지 않을까”(M13)라 했습니다. 나의 재산은 왕, 도둑, , 홍수, 상속자라는 오적이 모두 빼앗아 가버립니다.

 

재산이 상실되었을 때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상실되지 않은 재산은 무엇일까요? 한번 형성되면 오적이 넘볼 수 없는 보물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그것은 믿음의 재물(saddhādhana), 계행의 재물(sīladhana),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hiri ottappiya dhana), 배움의 재물(sutadhana), 보시의 재물(cāgadhana), 지혜의 재물(paññādhana) 입니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재물에 대하여 부처님은 “불이나 물이나 왕이나 도둑이나 원하지 않는 상속자에 의해 약탈될 수 없는 것입니다.(A7.7) 라 했습니다.

 

인생은 제로섬게임과 같습니다. 지금 흑자인생인 것 같지만 언제 적자인생으로 전환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늙어서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선업 보다 악업이 더 많을 것입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악업이 많은 적자인생이 되기 쉽습니다. 노년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욕망으로 살고 분노로 살아 간다면 악처의 문이 더 넓게 열려 있을 것입니다.

 

이것 보다 더 큰 상실은 없다

 

부가세내는 달을 잘못 알고 있어서 커다란 손실을 보았습니다. 막연한 추측과 안이한 사고방식이 결국 큰 손실로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후회와 자책과 함께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건강이나 세월의 손실에 비하면 작은 것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모아 놓은 재산이 말년 병에 걸렸을 때 병원비로 다 소진된다고 합니다. , 도둑, , 홍수, 상속자라는 오적에서 병원비라는 적이 하나 추가 되어 육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만큼 큰 상실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손해 보고 있는 것은 작은 상실에 해당됩니다. 가장 큰 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섯 가지 상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친족의 상실, 재산의 상실, 건강의 상실, 계행의 상실, 견해의 상실”(A5.130) 라 했습니다. 이 중에서 친족의 상실, 재산의 상실, 건강의 상실은 작은 상실입니다. 큰 상실은 계행의 상실, 견해의 상실입니다. 작은 상실은 죽어서 악처에 태어나지는 않지만 큰 상실은 죽어서 악처에 태어나는 조건이 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립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큰 상실입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계행을 지키지 않아 탐욕으로 분노로 어리석음으로 살았다면 지옥문이 열려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것 보다 더 큰 상실은 없을 것입니다. ‘계행의 상실입니다.

 

견해의 상실도 악처에 태어나는 조건이 됩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영혼의 영원한 삶을 바라는 영원주의적 견해를 가졌거나,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졌다면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합니다. 이것 보다 더 큰 상실은 없을 것입니다. ‘견해의 상실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건강의 상실은 작은 것입니다. 계행을 지키지 않아 욕망으로 분노로 살았을 때 악처에 떨어진다면 큰 상실입니다. 무작론, 우연론, 숙명론, 단멸론, 존우론 등 삿된 견해를 가진 채 임종을 맞았을 때 역시 큰 상실입니다.

 

 

 

 

많이 잡아 일곱 번 더 윤회하더라도

 

사람들은 작은 상실로 분노합니다. 금전적 손실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고 아까워합니다. 그러나 더 큰 상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평생 욕망과 분노로 살았을 때 운명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일곱 가지 재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산입니다.

 

일곱 가지 재물은 닳아서 없어지지도 않고 오적이나 육적이 가져 가지 못합니다. 일곱 가지 재물을 가지면 성자의 흐름에 들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은 삶입니다. 그것은 윤회를 끝내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성자의 흐름에 들면 많이 잡아 일곱 번 더 윤회한다.(sattakkhattuparamatā)”라 했습니다.

 

 

Evameva kho bhikkhave, ariyasāvakassa diṭṭhisampannassa puggalassa abhisametāvino etadeva bahutara dukkha yadida parikkhīa pariyādinna, appamattaka avasiṭṭha, sakhampi na upeti

Upanidhimpi na upeti kalabhāgampi na upeti purima dukkhakkhandha parikkhīa pariyādinna upanidhāya yadida sattakkhattuparamatā. Yo "ida dukkha"nti yathābhūta pajānāti "aya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 pajānāti "aya dukkhanirodhoti" yathābhūta pajānāti "aya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ti yathābhūta pajānāti. Tasmātiha bhikkhave, "ida dukkha"nti yogo karaīyo "aya dukkhasamudayoti" yogo karaīyo "aya dukkhanirodhoti" yogo karaīyo "aya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ti yogo karaīyo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고귀한 제자가 참사람으로서 올바른 견해를 갖추고 진리를 꿰뚫으면, 그에게는 아미 부서져 소멸해 버린 괴로움이 많고 남은 것은 적어서 많이 잡아 일곱 번 더 윤회하더라도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수량에도 미치지 못하고 비교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명상해야 하고,‘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 라고 명상해야 하고,‘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명상해야 하고,‘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라고 명상해야 한다.”(S56.49, 전재성님역)

 

 

 

2017-02-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