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을 가는 수행자
불교TV사이트를 즐겨 보고 있습니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고 보았으니 올해로 13년째 입니다. 십년 넘게 사이트를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스리랑카 아상가교수의 강연을 녹취하여 글을 여러 개 썼습니다.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특강, 김종욱 교수의 특강 등 주옥 같은 불교강좌를 들었습니다. 들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녹취를 하여 글쓰기 소재로 활용했습니다. 이렇게 십여년 동안에 염주알이 11,020개에 달했습니다.
요즘 불교TV사이트에서 볼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대승불교위주의 편성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불자들 상당수가 대승불교 영향권에 있어서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종종 볼만한 프로는 있습니다. 그런 프로 중의 하나가 ‘진명스님의 지대방’입니다. 최근 방송을 보다가 ‘지화(紙花)’를 만드는 비구니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종이로 꽃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비구니스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지화전문가 스님입니다.
지화전문가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머리 깍고 출가한 스님이 해야 할 공부도 많은데 하필이면 취미생활에 올인 하는 것일까에 대한 것입니다. 대승불교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출가자가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출가자의 본분사는 오로지 수행과 포교이기 때문입니다.
노래 하듯이 독송하면
한국불교 스님들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비구니스님은 가수입니다.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성악스님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교TV사이트을 보면 재가불자들에게 노래 지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출가자가 노래 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경전을 노래 하듯이 독송하면 악작죄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왜 노래하듯이 길게 읖조리는 것을 금했을까요? 앙굿따라니까야 ‘노랫소리의 경(A5.209)’에 따르면 “법문을 길게 노랫소리로 암송하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재난이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자신도 그 소리에 애착되고, 타인도 그 소리에 애착되고, 재가자들은 ‘우리가 노래하듯, 똑같이 이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도 노래한다.’라거 비난하고, 음조에 매혹되어 삼매를 잃고, 다음 세대들이 범례를 따르는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법문을 길게 끄는 노랫소리로 암송하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재난이 있다.”(A5.209)
유명 선사들이 법문을 할 때 “나무아미타불~”하며 게송을 멋드러지게 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게송을 길게 끌어 장단과 고저를 주어 노래하듯이 읊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장에 따르면 이런 행위는 악작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경에 따르면 “음조에 매혹되어 삼매를 잃고, 다음 세대들이 범례를 따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노래 하는 스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국불교에는 노래하는 스님, 그림 그리는 스님, 춤추는 스님, 음식만드는 스님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기는 스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일까 공중파방송에서 ‘별난사람’으로 다루어지는가 하면 특종이 되기도 합니다. 머리깍고 출가한 스님들이 취미활동을 넘어 전문가로 행세 했을 때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출가자의 도를 벗어난 행위에 대하여 엄격하게 규제했습니다.
일하려고 출가했나?
출가자가 해서는 안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초기경전에는 매우 상세하게 표현 해 놓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에서 계행의 다발입니다. 계행의 다발을 보면 짧은 크기의 계행에서 “노래, 춤, 연극 등을 보는 것을 여윕니다.”(D2)라 되어 있습니다. 이는 취미생활을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직업으로 삼아서는 더욱더 안될 것입니다. 중간크기 계행을 보면 좀더 구체적입니다. 보시로 살아 가는 출가수행자에게 “종자와 식물을 해치는 것을 여윕니다.”(D2)라 했습니다. 출가수행자는 숲속에 있는 열매를 함부로 따 먹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수행자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일하기 위해 출가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노래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고, 음식을 만든다면 스님이라 볼 수 없습니다. 행위에 따라 농부가 되기도 하고 기술자가 되기도 합니다. 스님이 농사를 짓는다면 농부라 할 것입니다. 스님이 점을 봐준다면 점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긴 크기의 계행에서는 ‘점괘, 해몽, 관상과 같은 저속한 지식에 의한 삿된 삶을 여윕니다.’라 했습니다.
그 사람의 행위가 그 사람의 위치를 결정합니다. 아무리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어도 그림을 그린다면 화가라 할 것입니다. 삭발한 스님이 농사에 열중한다면 농부입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출가수행자에게 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은 세속사람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도들의 보시로 살아가는 수행자가 세속의 일을 했을 때, 더구나 이득을 취하려 했을 때 신도들을 대상으로 이중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이 됩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현상이 비일비재합니다.
달마도를 그려서 파는 스님이 있습니다. 신도들의 보시로 유지하는 스님이 신도들을 대상으로 해서 달마도를 팔았을 때 이득을 취하는 것이 됩니다. 그 달마도라는 것이 전문가 수준도 아니고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할지라도 스님이 그렸기 때문에 사주는 것입니다. 출가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음에도 취미생활에 올인하거나 본업으로 삼았을 때 초기경전에 따르면 악작죄에 해당됩니다.
노래는 울음, 춤은 광기
한국불교에서는 취미생활하는 스님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합니다. 그림을 그리고,노래하고, 음식을 만드는 행위에 대하여 그러려니 합니다. 더구나 본업으로 삼아 활동하면 포교를 위한 방편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 됩니다. 부처님은 출가자가 노래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노래도 계율의 파괴이고, 춤도 계율의 파괴이다.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 전재성님역)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출가자가 노래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웃으려거든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래 부르는 것도 춤을 추는 것도 계율의 파괴라 합니다. 그림 그리는 스님, 음식만드는 스님 역시 계율의 파괴라 볼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시간이 많이 남아 무료한 것일까요?
시간이 무한정 남아서?
요즘 종편채널에서 자연인을 즐겨 봅니다. 산중에서 홀로 살아 가는 자연인은 모두 도인처럼 보입니다. 욕망을 초월한 도인으로 삶입니다. 그런데 어느 자연인은 “이곳에서 시간은 무한정 남습니다.”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시의 생활과 비교됩니다. 산중에서 남는 것은 시간 밖에 없을 때 시간을 때우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인은 홀로 살기에 늘 분주합니다.
산속에서 홀로 사는 사람들은 부지런해야 살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과 입을 것등이 보장 되어 있는 사람이 산중에 있다면 매우 무료하고 심심해 할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죄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장기수들은 남는 것이 시간 밖에 없어서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자에게 시간은 무한정입니다. 돈은 많고 할일은 없는 부자의 최대 고민거리는 밥먹는 일이라 합니다. 맛집에서 가서 밥먹는 것이 하루 일과 중에 가장 큰 행사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차를 타고 두세시간 걸리는 맛집을 찾아 가기도 합니다.
출가수행자들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거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출가자가 시간이 남아 돌아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서 그림, 노래, 음식, 춤 등 취미 생활에 열중한다면 시주에게 빚지는 것이 됩니다.
시주들은 시주할 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시주합니다. 그런데 시주밥을 먹고서 취미생활에 열중하거나 취미를 본업으로 삼았을 때 이는 시주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고 부처님 공덕에 대한 배신이기도 합니다. 농사 짓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부처님은 출가수행자들에게 직업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출가자가 농사를 지으면 농부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행위에 따라 수행자가 되고 농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숫따니빠따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Sn1.4)’에 따르면 부처님도 농사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한 바라문 마을에 계셨을 때 입니다. 부처님은 탁발을 위해 농사를 짓는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가 일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바라문은 인부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는 곳에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바라문 까씨는 음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바라문은 부처님에게“수행자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그대 수행자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드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음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도 농부들처럼 밭을 갈기도 하고 씨도 뿌리는 등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밭을 가는 수행자
출가수행자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농부처럼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라문은 “그대는 밭을 가는 자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대가 밭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밭을 가는 자라면 묻건대 대답하시오. 어떻게 우리는 그대가 경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라며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stn77)
“몸을 수호하고 ,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stn78)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stn79)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stn80)
(숫따니빠따,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 Sn1.4, 전재성님역)
부처님도 밭을 갈았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밭입니다. 마음의 밭을 갈기 위하여 믿음, 감관의 수호, 지혜, 새김, 진실, 온화함, 정진 등의 수단이 등장합니다. 농부가 농사도구를 이용하여 밭을 갈듯이, 부처님도 마음의 도구를 이용하여 마음을 계발했습니다. 농부나 부처님이나 밭을 가는 것에 있어서는 같은 농부라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결실
부처님은 마음의 밭을 가는 방법에 대하여 초기경전에 상세하게 설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초기경전만 열어 보면 마음의 밭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출가수행자가 진짜 밭을 간다면 농부이지 더 이상 출가수행자라 볼 수 없습니다.
백장청규에 따르면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라 하여 “하루 동안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식사하지 않는다.”라 했습니다. 인도와 환경이 다른 중국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이 직업을 갖는 것에 대하여 당연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찰음식을 만들어 파는 어느 스님은 백장청규정신을 들먹이며 ‘생활선’을 한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르면 보시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출가수행자는 어떤 일도 해서 안되고 어떤 직업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일을 하고 직업을 갖는다면 악작죄에 해당됩니다. 밭에 나가 일할 시간에 마음의 밭을 가는데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의 밭을 가는 것에 대하여 마음을 계발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세상사람이 보기에 출가자가 하는 일 없이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치열하게 마음의 밭을 갈고 있는 것입니다.
농부가 농사지으면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출가수행자가 마음의 밭을 갈면 역시 결실을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 (stn80)라 했습니다.
2017-07-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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