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진리의 세계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8. 26. 11:17

 

진리의 세계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싸가지 없다고 하는데

 

흔히 하는 말 중에 싸가지 없다라 합니다. 싸가지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어원을 따져 보면 아지가 합쳐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사전에 따르면 동물의 새끼나 작은 것을 가리키는 접미사아지과 결합하여, 싹이 막 나오기 시작하는 처음 상태인 싹수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라 합니다. 어원적으로 본다면 긍정적입니다이 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될 때는 어떤 일이나 사람이 앞으로 잘될 것인지 아닌지를 나타내는 낌새나 징조를 가리키는 속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싸가지 없다라 하면 일반적으로 예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싸가지라는 말은 전라도나 강원도 등에서 쓰이는 말이지만 이제 전국적인 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까지는 언론의 영향도 큽니다. 진보지식인 강준만은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싸가지 없는 진보란 무례함, 도덕적 우월감, 언행불일치 등을 말합니다. 또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며 담론에만 집중한 나머지 가르치려는 듯한 진보주의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런 범주에 유시민이나 진중권 같은 사람을 넣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도 싸가지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2004년 작품 내사랑 싸가지가 그것입니다. 하지원 주연의 코믹영화입니다. 영화내용을 떠나서 영화타이틀이 독특하여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싸가지 없는 부처님제자라고

 

일반적으로 싸가지 없다라는 말은 버릇없다” “위 아래도 모른다등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원래 싸가지가 낌새나 징조를 뜻하지만, 누군가 싸가지 없다라 말 했을 때 이는 싹수가 노랗다거나 버릇없이 위아래도 모른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도 싸가지 없다라는 말을 연상케 하는 경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깐다라야나의 경(A2.37)’이 그것입니다. 8월 첫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독송했는데 싸가지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라문]

존자 깟짜야나여, 수행자 깟짜야나는 늙고, 원숙하고, 연로하고, 만년에 이른 바라문에게 인사하지 않고 일어서서 맞이 하지 않고 자리를 내 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존자 깟짜야나여, 수행자 깟짜야나가 늙고, 원숙하고, 연로하고, 만년에 이른 바라문에게 인사하지 않고 일어서서 맞이 하지 않고 자리를 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존자 깟짜야나여, 그렇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A2.37)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은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고 최고의 지식인이자 사회의 리더이었습니다. 더구나 나이 든 바라문은 제자들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바라문은 초기경전에서 때로 오만하고 무례한 바라문으로도 묘사되고 있습니다.

 

율장대품 아자빨라니그로다이야기에 따르면 그때 어떤 흥흥거리는 오만한 바라문이 세존께서 계신곳으로 찾아왔다.”(Vin.I.2) 라고 묘사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흥흥거린다(Huhuka)’는 말은 바라문은 자신들의 긍지를 나타내기 위해 훙 또는 훔(Hum)이라는 소리를 내는 자이다. 부처님은 흠흠하고 말하는 것을 여윈자이다.”라고 주석에서는 설명되고 있습니다.

 

흠흠거리는 것은 다름 아닌 바라문의 자부심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만심과 자부심, 프라이드로 가득찬 바라문들이 부처님 제자 깟짜야나에게 싸가지 없다라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연로한 바라문이 왔을 때 일어서서 맞이 하지도 않고 자리를 내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싸가지 없이 보이는 젊은 부처님제자에게 바라문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누가 슬기로운 장로인가

 

바라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젊은 부처님 제자는 한마디로 싸가지 없게 보였을 것입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한 빅쿠가 머리가 허옅게 센 늙은 바라문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목에 힘주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을 때 버릇없이 위아래도 모르는 싸가지 없는 자이다라 했을 겁니다. 이에 깟짜야나 존자는 바라문 깐다라야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Atthi brāhma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PTS Page 068] sammāsambuddhena vuddhabhūmī ca akkhātā, daharabhūmī ca. Vuddho cepi brāhmaa hoti āsītiko vā nāvutiko vā vassasatiko vā jātiyā, so ca kāme paribhuñjati, kāmamajjhāvasati, kāmapariāhena pariayhati, kāmavitakkehi khajjati, kāmapariyesanāya ussukko. Atha kho so bālo(33) tveva sakha gacchati. Daharo cepi brāhmaa, hoti yuvā susukālakeso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o pahamena vayasā. So ca na kāme paribhuñjati, na kāmamajjhāvasati, na kāmapariāhena pariayhati, na kāmavitakkehi khajjati, na kāmapariyesanāya ussukko. Atha kho so paṇḍito therotveva sakha gacchatīti.

 

[깟짜야나]

바라문이여, 그 세상에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장로의 지위와 청년의 지위에 대하여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바라문이여, 태어난 이래 여든 살, 아흔 살, 백 살의 노인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한다면, 그를 어리석은 장로라고 합니다. 바라문이여, 검은 머리를 하고 꽃다운 청춘이고 초년의 젊음을 지니고 나이 어린 청년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를 슬기로운 장로라고 부릅니다.” (A2.37)

 

 

 

 

 

 

여기서 키워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kāma)’입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극복한 자는 슬기로운 자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으로 사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 합니다. 나이가 백 살이 되어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감각적 욕망을 극복한 나이 어린 자 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법구경에서도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 단지 나이가 들었으나 헛되이 늙은이라 불리운다.(Dhp.260) 라 했습니다.

 

행위에 의해서 신분이 결정됩니다. 그가 바라문이라도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라 하고, 그가 바라문이라도 농사를 짓는 다면 농부가 됩니다. 바라문이라 하여, 나이가 들었다고 하여, 머리가 희다고 하여 다 원로가 될 수 없습니다. 원로가 될 수 있는 행위를 해야 원로로서 대접받습니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욕망으로 분노로 어리석음으로 산다면 여전히 어린 아이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가 검은 소년일지라도 감각적 욕망을 극복한 자라면 장로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앙굿따라니까야 우르벨라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비록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은 인생의 초년생일지라도 때 맞춰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의미 있는 말을 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고, 기억에 남는 말을 하고, 알맞은 말을 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고, 한계가 있는 말을 하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한다면, 그를 두고 ‘슬기로운 장로’라고 한다.” (A4.22) 라 했습니다.

 

고행을 잘못 하면

 

어느 사회에나 어느 시대에서나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습니다. 비록 유교적 가르침이긴 하지만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서는 통용되는 말입니다. 만일 나이 어린 자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인사도 하지 않고 본체만체 한다면 비난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회사에서 인사 하나만 잘 해도 회사생활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노인이 있을 때 존경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욕망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욕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세계에 빠져 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먹는다고 하여, 노인이라 하여 욕망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어쩌면 고행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비파의 비유로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과 고행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쏘나의 경에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쏘나여, 너무 지나치게 열심히 정진하면 흥분으로 이끌어진다. 너무 느슨하게 정진하면 나태로 이끌어진다. 그러므로 쏘나여, 그대는 정진을 조화롭게 확립하고, 능력을 조화롭게 수호하고, 거기서 명상의 인상을 파악해라.”(A6.55)

 

 

비파의 줄을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지 않고 반대로 너무 타이트하게 잡아 당기면 끊어져 버립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느슨한 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 사는 것과 같고, 타이트하게 당겨진 것은 고행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비파줄은 적당하게 당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사람들은 두 가지 극단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행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쾌락을 추구하면 반드시 영원주의적 관점에 도달하고 반대로 고행을 추구하면 반드시 단멸론적 관점에 도달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단멸론적 관점과 관련하여 비파줄을 팽팽하게 당긴 것으로 설명합니다. 비파줄을 너무 팽팽하게 당기면 끊어지고 맙니다. 줄이 끊어지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고행은 줄이 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왜 있는 그대로 보아야하는가

 

정진이 너무 지나치면 흥분으로 이끈다고 했습니다. 이는 비파줄을 지나치게 팽팽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파줄을 지나치게 당기면 끊어지듯이, 잘못된 고행에 몰두하면 파국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에서는 고행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도 고행의 숲이라 하여 따뽀바나(tapovana)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고행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자제하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고통을 감수해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억제됨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부정관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정관이라는 말은 고행과 동의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단지 감각적 쾌락을 억압하기 위해 부정관을 본다면 엄청난 부작용이 따를 것이라 합니다. 마치 비파줄을 팽팽하게 하여 끊어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고행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회피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합니다. 꼭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습니다. 부정관이라 하여 관념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함을 말합니다. 시궁창 같은 몸 속을 들여다 보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테라가타에서는 몸안에 대하여 고름과 피로 가득차고 똥오줌 구덩이로 찌드는 이 몸은 수액을 유출하니, 항상 부정(不淨)한 수액이 흐른다.”(Thag.568) 라 했습니다.

 

부정관과 관련하여 전재성박사는 현재 번역중에 있는 청정도론의 한구절을 인용해서 설명했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빅쿠가 탁발 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옷 입는 것에 대하여 종기를 숨기는 사람처럼 하의를 단단히 입고 상처를 붕대로 감듯이 그의 허리를 묶는다. 뼈 무더기를 덮듯이 윗옷을 입고” (Vism.11.9) 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종기, 상처, 뼈무더기는 혐오스런 것을 의미합니다. 혐오스런 것을 옷으로 숨기는 것입니다. 이는 음식에 대한 혐오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황제식과 같은 먹음직한 음식도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똥이 되어 나옵니다. 음식을 입안에서 씹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침이 적시는 그 순간에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 특별한 모양과 냄새의 혼합물은 개 밥그릇에 개가 토해 내놓은 것처럼 극도로 혐오스러운 상태에 이른다.”(Vism.11.14)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 내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사랑스런 몸매도 속을 들여다 보면 혐오스러운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고 포장하고 감추려 하는 것입니다. 빅쿠가 탁발하러 떠날 때 종기를 숨기는 사람처럼 하의를 단단히 입고 상처를 붕대로 감듯이 그의 허리를 묶는다. 뼈 무더기를 덮듯이 윗옷을 입고라는 말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기도로 해결되지 않는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을 억제하기 위해 고행을 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계금취견을 말합니다. 잘못된 수행방법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기 싫다고 포장해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을 때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합니다. 잘못된 고행으로 인하여 위험에 빠지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런 예 중에 기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이 괴로우면 교회나 절에 가서 기도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 생겼을 때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매달립니다. 또 그들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일시적 위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본질을 외면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내면을 감추고 겉으로 포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현실도피와 같습니다.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욕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램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초월적 존재에게 공물을 바치고 찬양을 하는 것도 이기적 욕망에 따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작은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지만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은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하고 초월적 존재를 찬양한다고 해서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실도피수단은 될지언정 또다시 고통스런 현실과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부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을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기도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강력한 위빠사나를 필요로 합니다.

 

누가 최상자(jeṭṭho seṭṭho)인가

 

바라문들에게 부처님 제자는 싸가지 없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싸가지 없다는 말은 부처님도 들었습니다. 율장 비구계에 따르면 바라문 베란자가 부처님에게 싸가지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연로한 장로 바리문이 와도 일어서서 맞이 하지도 않고 자리도 권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나는 무명에 빠진 계란의 존재와 같은 뭇삶들을 위하여, 둘러싸인 무명의 껍질을 깨고 홀로 세상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고 원만히 깨달았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

 

(Verañjakaṇḍo-베란자의 이야기, 1장 승단추방죄법, 율장비구계 90P, 전재성님역)

 

 

이 경은 앙굿따라니까야 베란자의 경(A8.11)’과 일부 병행합니다. 경에서 부처님은 자신을 세상의 최상자(jeṭṭho seṭṭho lokassa)’라 했습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 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은 장로 바라문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이 최상자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계란 부화 비유를 들었습니다. 순차적으로 낳은 여러 개의 계란이 있지만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최상자라는 말입니다. 이는 깨달음과 관련된 말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대하여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 sammāsambodhiṃ: 無上正等正覺) 라 합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있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이 나이든 장로 바라문들 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깨달은 자입니다. 그래서 최상자라 했습니다. 최상자으로서 부처님은 나이 든 바라문에게 머리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율장비구계에서는 “바라문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내가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에 초대할 만한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문이여, 여래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를 권한다면, 그의 머리가 부수어질 것이다. (율장비구계 90P, 전재성님역) 라 했습니다.

 

무릎 꿇은 바라문 깐다라야나

 

부처님의 제자 깟짜야나존자는 바라문 깐다라야나에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극복한 자가 장로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단지 나이만 먹었다고 해서, 머리만 희다고 해서 장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려도, 머리가 검어도 감각적 욕망을 극복한 자가 슬기로운 장로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라문 깐다라야나는 깟짜야나 존자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경에서는 깐다라야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에 웃옷을 걸치고 아주 젊은 수행승의 발에 머리를 조아렸다.”(A2.37) 라고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문 깐다라야나는 존자께서는 성숙한 사람으로 장로의 지위에 서 있습니다. 저는 미성숙한 사람으로 청년의 지위에 서 있습니다.” (A2.37) 라 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고합니다. 깨달음은 나이 순이 아닙니다. 순서대로 낳은 계란이 있지만 먼저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최상자이듯이, 부처님은 깨달은 자로서 최상자라 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 사는 자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청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극복한 청년은 나이가 적어도 어른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구분은 연령이 아니라 정신적 성숙에 따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애어른인 자가 나이 먹은 노인에게 무례하기 하지 않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비록 먼저 깨달았지만 자신을 깨달음으로 이끈 앗사지존자를 경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의 세계에 있어서 나이는

 

먼저 출가한자가 상석에 앉습니다. 나중에 출가하여 깨달은 자라 하더라도 출가순이 우선이기 때문에 먼저 출가한 자가 상석입니다. 진지를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에서는 먼저 출가한 자들을 존중해줍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이 먹은 자가 상석입니다. 그러나 나이만 먹었다고 해서 공경받지 않습니다.

 

공경받으려면 공경받을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삶을 살았는지로 알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든 살, 아흔 살, 백 살이 되었음에도 청년 시절처럼 여전히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산다면 아이와 같아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나이가 어린 청소년이나 청년일지라도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사라졌다면 장로와 같아서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세계에 있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2017-08-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