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7. 7. 29. 10:58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배움을 열망하는

 

요즘 서울 갈 일이 많아졌습니다. 각종 행사에 참여하다 보니 1호선 전철 탈 일이 많아진 것입니다. 행사나 모임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귀가 하다 보면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20대 대학생이 많은 것 같습니다. 주로 10시 반 이후 마지막 전철이 있을 때까지 거의 대부분 대학생등 20대 젊은층이라 보면 틀림 없습니다.

 

늦은 시간 전철안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입니다. 아마 공부를 마치고 늦게 귀가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즐기다가 늦게 전철 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전철안이 북적거려도 활기가 넘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젊은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생동감과 생명력입니다.

 

니까야강독모임에 모임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 왔습니다. 배움을 열망하는 30대 젊은이 두 명입니다. 요즘 불교계 어느 모임이든지 고령화 되는 추세인데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들어 오니 모임이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활력 있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젊은 피 수혈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사 하나만 잘 해도

 

칠월 니까야강독 첫번째 모임에 사람들로 꽉 차는 것 같습니다. 그래 보았자 십명이 역간 넘은 숫자입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착되어 가는 듯합니다. 한번 보면 초면이지만 두 번째 보면 구면이라 합니다. 세 번, 네 번 그 이상 보면 이제 익숙해집니다. 만나면 반갑게 맞이 해 주고 간단한 인사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는 맛입니다.

 

자주 보는 얼굴임에도 멀뚱멀뚱 하거나 인사도 없다면 분위기가 어색해집니다. 인사해서 나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약속 잘 지키면 비즈니스의 반은 성공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사 하나만 잘 해도 사회생활 반은 성공이라 합니다.

 

성찰의 힘에 대하여

 

빠알리로 나모땃사 바가와또로 시작되는 예경문과 삼귀의, 그리고 오계를 낭송하고 10분간 입정에 들어간 후 강독이 시작되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둘 모아 엮음편에 있는 성찰과 수행의 힘입니다. 부처님은 두 가지 힘(bala)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찰의 힘과 수행의 힘입니다. 먼저 성찰의 힘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와 같이 신체적인 악행을 하면 현세와 미래세에 악한 과보가 생겨나고, 언어적인 악행을 하면 현세와 미래세에 악한 과보가 생겨나고, 정신적인 악행을 하면 현세와 미래세에 악한 과보가 생겨난다.’라고 성찰한다. 그는 이와 같이 성찰하여 신체적인 악행을 끊어 버리고 신체적인 선행을 닦고, 언어적인 악행을 악행을 끊어 버리고 언어적인 선행을 닦고, 정신적인 악행을 끊어 버리고 정신적인 선행을 닦아 자신의 청정을 수호한다.”(A2.11)

 

 

성찰은 빠알리어 ‘paisakhāna’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 ‘discrimination; consideration; mindfulness’의 뜻입니다. 또한 ‘carefulness’의 뜻도 있습니다. 잘 분별하고 고려하고 주의한다는 뜻입니다.

 

성찰의 힘은 빠알리어로 ‘paisakhānabala라 합니다. 성찰하는데 힘이 붙은 것을 말합니다. 힘이 있으면 강력해 져서 남들 보다 몇 배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찰의 힘과 관련된 초기경은 많습니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A.I,52, 94; II,142; D.III,213, 244; Ps.II,169, 176; Dhs.1354’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paisakhānabala에 대하여 숙고의 힘이라 번역했습니다. 성철과 숙고의 차이입니다. 성찰은 반성의 의미가 큽니다. 반면 숙고는 생각의 의미가 큽니다. 두 번역이 다르긴 하지만 같은 뜻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paisakhāna’에 대하여 뉘우치고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성찰이라는 번역어가 더 타당한 듯 보입니다.

 

신구의 삼행은 원환고리구조

 

경을 보면 신체적인 악행을 하면 현세와 미래세에 악한 과보가 생겨나고라 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 올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현재의 행위로 인하여 미래에 겪게 될 과보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인과법입니다.

 

현재의 행위로 인하여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신체적인 것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늘 언어와 정신이 함께 하여 이른바 신, , 의 삼업으로 작용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초기불교 가르침의 특징입니다.

 

선행을 하면 선과보를 받고, 악행을 하면 악과보를 받는 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신, , 의 삼행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관절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환고리구조라 합니다.

 

원환고리구조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맞물려 돌아 가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체적 행위가 정신적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정신적 행위에 영향을 주는 것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거친 말을 했을 때 신체적인 행위로 연결되고 그에 따라 정신이 황폐화 됩니다. 이렇게 신, , 의 삼행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

 

모든 행위의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크게 신, , 의 삼행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행위에 대하여 알아차리지 못하면 시간만 흘러간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정신적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이 있습니다. 한이 맺힌 자도 해당됩니다. 누군가 증오하는 마음도 해당됩니다.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십년, 이십년, 아니 평생  귀중한 시간을 빼앗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에 대한 분노, 세상에 대한 분노 같은 것입니다.

 

분노가 마음에 잠재 되어 있으면 시간을 앗아가 버립니다. 귀중한 시간을 분노의 세월, 한의 세월로 보냈을 때 이는 정신적 악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분노, 세상에 대한 분노로 세월을 보내는 자는 지금 이 세상에서도 괴롭고 죽어서 저 세상에서도 괴롭습니다.  이는 성찰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꾸살라(kusala)에 대하여

 

성찰의 힘이 없으면 착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기 힘듭니다. 설령 그것이 착한것일지라도 성찰의 힘이 없으면 악행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착한 것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빠알리어 꾸살라(kusala)로 설명합니다.

 

빠알리어 꾸살라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 번역했습니다. 꾸살라에 반대되는 것이 아꾸살라(akusala)입니다. 아꾸살라에 대해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꾸살라에 대하여 유익함, 아꾸살라에 대하여 해로움이라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꾸살라는 단지 착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밝고 능숙한 것이고, 둘째 착한 것이고, 셋째 건전한 것이라 했습니다.

 

꾸살라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 'kammically wholesome' or 'profitable', salutary, morally good, (skillful) Connotations of the term, according to Com. (Aṭṭhasālinī), are: of good health, blameless, productive of favourable kamma-result, skillful. It should be noted that Com. excludes the meaning 'skillful', when the term is applied to states of consciousness.”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꾸살라의 뜻에 능숙함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능숙한 자가 있습니다. 일에 능숙한 자는 그 일에 밝은 자입니다. 일종의 전문가라 볼 수 있습니다. 전문가는 자신의 분야에서 프로페셔널입니다. 오래 하다 보니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해 낼만한 힘이 있습니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꾸살라는 “It is defined in M. 9 as the 10 wholesome courses of action”라 되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올바른 견해의 경(M9)’에 꾸살라가 10가지로 정의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십선행입니다. 다만 열 번째 항목은 천수경에서 말하는 치암중죄금일참회라 하여 어리석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견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착하게 살자고 하는데

 

착하게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릅니다. 조직폭력배도 팔에 차카게살자라는 문신을 새겨 놓은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조폭이 생각하는 착하게 살자와 일반이 생각하는 착하게 살자’,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착하게 살자는 그 뜻이 다 다릅니다.

 

일반인들이 말하는 착하게 살자의 의미는 오로지 자신과 관계가 있습니다. 자신만 착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탐욕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 . 치로 살아 가는 일반사람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착하게 살자는 다릅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착하게 산다는 것은 나에게도 이익이고 타인에게도 이익인 것이라 했습니다.

 

무상정득각을 이루기 위해

 

착하게 산다는 것은 자타이익이 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타인에게는 이익이지만 자신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은 행위를 하는 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일에는 열심히 도와 주지만 집에 와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예가 활동가들에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종교단체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나 절 일에 매우 적극적이고 열성적입니다. 남을 위하는 아름다운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했을 때 이는 착하게 사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나 절은 도피처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단체나 조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활동가들도 해당될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자신도 이익이고 타인도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같은 케이스입니다. 부처님이 보살로 살 때 남을 위해 희생을 많이 했습니다. 자타까을 보면 남을 위해 스스로 먹이가 되는 장면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보살행을 했습니다. 그것은 무상정등각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사람이나 정반대로 타인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경우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자타가 이익 되는 삶입니다.

 

계율의 방향성에 대하여

 

전세계적으로 선악의 기준은 다릅니다. 기독교의 경우 하늘이 십계명 등으로 정해 주었으나 불교에서 선악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착하고 건전한 행위는 증대시키고, 악하고 불건한 행위는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방향성으로 설명합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계율에 대하여 방향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지키지 못할 계율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계율을 못지킬 것을 감안해서 계율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 모릅니다. 이는 계율을 지켜 내기가 쉽지 않음을 말합니다.

 

불살생 등 오계를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일신교의 경우 하늘이 정해 주어서 지키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전쟁등으로 표출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키지 못한 계에 대한 죄책감으로서 전쟁을 찬양하고 고무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전쟁의 순결한 피로 우리를 정화시키자라 하여 전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를 순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성전을 외치며 자살폭탄을 감행하는 것도 지키지 못한 계에 대한 죄책감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계를 지키느니 차라리 계를 파하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는 장기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 지키기 힘들더라도 나중에는 지킬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계율의 방향성이라 합니다.

 

여기 술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음주라 하여 오계로 금하고 있지만 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안마시는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이럴 때 속으로 술은 좋아하지만 안마시는 방향으로 가겠다라는 다짐입니다. 그래서 술을 줄여 나갑니다. 이렇게 했을 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불음주로 향하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개선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학습계율입니다. 이에 대하여계율의 방향성이라 했습니다.

 

수행의 힘(bhāvanābala)에 대하여

 

부처님은 두 가지 힘이 있는데 그것은 성찰의 힘과 수행의 힘이라 했습니다. 이번에는 수행의 힘에 대한 것입니다. 수행의 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 어떠한 것이 수행의 힘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1) 멀리 여읨에 기초하고 사라짐에 기초하고 소멸에 기초해서 완전히 버림으로써 열반으로 회향하는 새김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다.

2) 멀리 여읨에 기초하고 사라짐에 기초하고 소멸에 기초해서 완전히 버림으로써 열반으로 회향하는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다.

1) 멀리 여읨에 기초하고 사라짐에 기초하고 소멸에 기초해서 완전히 버림으로써 열반으로 회향하는 정진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다.

1) 멀리 여읨에 기초하고 사라짐에 기초하고 소멸에 기초해서 완전히 버림으로써 열반으로 회향하는 희열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다.

1) 멀리 여읨에 기초하고 사라짐에 기초하고 소멸에 기초해서 완전히 버림으로써 열반으로 회향하는 안온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다.

1) 멀리 여읨에 기초하고 사라짐에 기초하고 소멸에 기초해서 완전히 버림으로써 열반으로 회향하는 집중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다.

1) 멀리 여읨에 기초하고 사라짐에 기초하고 소멸에 기초해서 완전히 버림으로써 열반으로 회향하는 평정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수행의 힘이라 한다.”(A2.11)

 

 

부처님은 수행의 힘(bhāvanābala)’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힘이 생겨남을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칠각지를 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칠각지는 새김, 탐구, 정진, 희열, 안온, 집중, 평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마음챙김, 법을 간택, 정진, 희열, 경안, 삼매, 평온이라 번역했습니다.

 

칠각지 역시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마치 마디가 관절로 연결된 것처럼 원환고리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신구의 삼업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각지는 그 자체로 깨달음의 요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수행으로 완성됩니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반복하는 것

 

빠알리 바나나(bhāvanā)를 수행이라 번역합니다. 수행이라는 말이 마치 더러워진 거울을 닦듯이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바나나는 되어감의 의미라 합니다. 되어가게 하는 것이 수행이라 합니다. 이는 반복적인 행위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반복하지 않으면 수행이 안된다라 했습니다.

 

수행이란 백번이고 천번이고 반복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백번이고 천번이고 반복 했을 때 경지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행위를 반복했을 때 달인이 됩니다. 일본 NHK 대하드라마 아츠히메에서 사츠마무사는 통나무치기를 하루 만번 반복합니다. 목봉으로 만번 통나무치기 했을 때 연기가 날 정도라 합니다. 오로지 내려베기 기술하나로 도쿠가와막부를 타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어느 것이든지 똑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 경지에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경을 보면 칠각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반복정형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에서는 단지 단어만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재성박사의 번역 특징입니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반복정형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독송하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 합니다. 반복정형구를 반복하여 독송하고 암송하는 것도 수행임을 말합니다.

 

악행은 큰 못박기 선행은 작은 못박기

 

칠각지에 대하여 긴 설명이 있었습니다. 한시간사십분 가량 쉼없이 말한 것을 받아 적다 보니 12페이지가 되었습니다. 이를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 몇 가지만 가능합니다. 칠각지에서 정진각지 설명에서 인상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행을 하면 큰 못이 박히고 선행을 하면 작은 못이 박힌다는 말입니다. 선행을 하면 다 좋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선행을 했다는 마음이 남아 있는 한 마음에 못이 박힘을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쐐기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M20)’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마치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

 

 

여기서 큰 쐐기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akusala)를 말하고, 작은 쐐기는 착하고 건전한 것(kusala)를 말합니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로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물리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역시 못이 박힙니다. 비록 악하고 불건전한 것과 같은 대못은 아니지만 대못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소못이 박히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면 대개 내가 선행을 했다는 자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자만(mana)은 악하고 불건전한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공덕을 쌓았지만 공덕을 쌓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작은 쐐기가 박힌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은 쐐기마저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윳따니까야 케마까의 경(S22.89)에 따르면 향기박스가 등장합니다.

 

케마까의 경에 따르면, 세탁한 옷의 비누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향기박스에 넣으면 비누냄새마저 제거됩니다. 그 향기박스는 다름 아닌 무상, , 무아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자아개념이 떨어져 나갈 때 자만 역시 사라집니다. 이것은 명상수행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명상하면 무수하게 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사라지고 무수하게 많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 생겨난다라 했습니다.

 

선행에도 위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행을 했다는 뿌듯함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만입니다. 명상을 통해서 자만마저 제거했을 때 무소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소유의 삶은 팔정도의 길을 감으로써 실현됩니다. 이와 같은 무소유의 삶은 계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소유의 삶에 대하여 계율을 지키는 것이 무소유의 삶이다.”라 했습니다.

 

한번 듣고 흘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1시간 40분동안 수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를 전부 다 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는 반복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주로 수행에 관한 것입니다. 모두 열심히 받아 적기에 바쁜 것 같습니다. 간간히 질문하지만 매우 짤막합니다. 모두 체험에 경전과 체험에 바탕을 둔 이야기들입니다.

 

노트에 기록하다 보니 12페이지가 되었습니다. 작은 노트에 써 놓은 것이 한가득 됩니다. 글을 쓰기 위하여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읽고 글을 쓰면 자기 것이 됩니다. 한번 듣고 흘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유하는 것입니다.

 

 

2017-07-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