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물질문명시대에 천수념(天隨念)하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7. 7. 17. 12:33

 

물질문명시대에 천수념(天隨念)하는 이유

 

 

불편을 감수하며

 

멀고 먼 길입니다. 니까야강독이 열리는 고양시 삼송역까지 가려면 전철로만 거의 한시간 반가량 걸립니다. 도중에 버스를 타고 걸어 가는 시간 등을 감안하면 넉넉 잡고 두시간 반 전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차가 있음에도 굳이 전철로 가는 것은 전철만큼 정확한 교통수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자발적으로 불편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마트에 가도 차를 끌고 가는데 가까운 곳은 걸어가거나 버스를 탈 수 있을 것입니다. 먼거리지만 전철이나 지하철을 타는 것은 도반들과 함께 담소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독모임이 끝나고 귀가길에 도반들과 함께 전철역으로 향합니다. 종로까지 삼십여분 걸리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거리이지만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 등 잡담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법과 관련된 법담이 대부분입니다. 만일 차로 왔다가 차로 가버린다면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 대화도 없이 차로 와서 차로 간다면 마치 학원생이 학원강의 듣고 귀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이 멀리 있어서 차를 필요로 한다면 예외일 것입니다. 가급적 자발적 불편을 감수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서로 소통하는데 있어서 지하철 만한 교통수단이 없을 것이라 봅니다.

 

한어깨에는 번역물 등이 들어 있는 가방을 둘러매고 또 한손에는 물건을 들었습니다. 한물건은 세라믹전기포트입니다. 커피나 차를 끊여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공장도 가격으로 싸게 살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여러 번 산 바 있습니다. 사서 존경하는 분들에게 선물했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값싼 전기포트와 달리 도기형태로 되어 있어서 고급이미지가 풍길 뿐만 아니라 세라믹이기 때문에 위생적입니다.

 

집단지성의 힘으로

 

7월 들어 처음 열리는 강독모임에 가는 날 짐이 많았습니다. 가방에는 교정작업을 한 인쇄물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앙굿따라합본교정물입니다. 이미 출간 된 것이기 때문에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결과 꽤 있었습니다. 이를 스티커 처리 하여 찾아 보기 쉽게 했습니다.

 

이번 교정에서 무엇 보다 탈역을 발견한 것에 있습니다. 사실 탈역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빠알리원문과 비교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타번역서와 비교해 읽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탈역을 발견한 것은 경의 내용이 좋아 글을 쓰는 과정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타반역서와 비교하는 과정에서 한줄 빠진 것이 발견된 것입니다. 모두 두 곳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메일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탈역은 번역과정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이라 합니다.

 

니까야는 방대합니다. 거의 한수레에 달하는 니까야에서 오자나 탈자, 오역과 탈역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발견하여 알려 준다면 점점 완성도 높은 번역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번역비교를 해 보는 것이 최상입니다. 빠알리원문과 두 번역서, 여기에다 영역까지 함께 하면 드러납니다. 오류를 발견하면 알려 주어 교정 되었을 때 번역은 완성되어 갑니다. 어쩌면 번역은 집단지성의 힘으로 완성되는지 모릅니다.

 

멀리 대전에서

 

이번 모임에는 두 명이 새로 선보였습니다. 한분은 멀리 대전에서 왔습니다. 승용차로 찾아 온 것입니다. 거의 다와서 헤메이는 바람에 약 이십여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차라리 KTX타고 지하철로 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다음 번 모임에는 기차로 오겠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 귀가길에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길 것입니다.

 

이번 모임은 유월한달 건너 띄었기 때문에 두 달만입니다. 불과 한달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익숙한 얼굴들을 보니 반갑습니다. 서로 소통했기 가능한 일입니다. 자주 보긴 하지만 소통하지 않는다면 지나가는 객에 불과합니다. 마치 학원에서 강의만 듣고 흩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모인 모임은 활기가 넘쳤습니다. 참여한 사람들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충전된 분위기도 감지 됩니다. 장교수님은 고급실론티를 박사님에게 선물했습니다. 박사님은 초코렛 한상자를 개봉하여 맛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법우님들과 차를 나무며 잠시 차담시간을 가졌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 흘렀습니다. 도현스님 일행이 도착하자 곧바로 강독에 들어 갔습니다.

 

왜 기록하는가?

 

이날 강독은 새김(sati)’에 대한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하나 모아엮음에서 하나의 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십수념(十隨念)’이라 합니다. 십수념은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중의 일부로서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계수념, 시수념, 천수념, 출입식념, 사수념, 신수념, 적정념을 말합니다. 이들 수념은 공통적으로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멸, 곧바로 앎, 완전한 깨달음,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원리로 설명됩니다. 어느 수념을 적용해도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됨을 말합니다.

 

전재성박사의 이야기를 모두 노트 해 두었습니다. 예불을 제외한 한시간 반 가량 쉼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받아 적다 보니 12페이지 가량 되었습니다. 모두 생생한 체험과 교리에 바탕을 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전에 듣지 못하던 것입니다. 몇 번 들은 것도 있지만 들을 때 마다 새롭습니다. 한시간반 동안 쉼 없은 이야기를 모두 다 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 해 둡니다.

 

기록해 두지 않으면 그때 뿐입니다. 몇 시간 달려 와서 들을 때 뿐이라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들은 것을 기억하고, 기억한 것을 되새기어 사유해 보아야만 내것으로 될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부처님도 장려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으면 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뿐니야의 경(A8.82)’에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찾아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 뿐니야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출 때, 오로지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A8.82)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강독모임에서 주옥 같은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했습니다.

 

손이 아프도록 한시간 반동안 줄기차게 썼던니 엄청난 피로가 몰려 오기도 했습니다. 필기 하지 않으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기억에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기록해 놓은 것을 다시 읽어 보고, 읽은 것을 글로 다시 정리 해 본다면 확실히 내것으로 될 것입니다.

 

왜 천수념(天隨念: devatānussati) 하는가?

 

십수념 중에 천수념(天隨念)’이 있습니다. 이를 ‘devatānussati’라 하여 신들에 대한 새김이라 합니다. 경에 따르면 천수념에 대하여여 이것이야말로 닦고 익히면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멸, 곧바로 앎, 완전한 깨달음,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원리이다.”(A1.309)라 했습니다. 다른 수념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정형구입니다. 하늘사람에 대하여 계속 해서 생각하면 염오, 이욕, 해탈에 이름을 말합니다.

 

오늘날 천수념이 필요한 때라 합니다.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특히 과학의 시대에 필요한 것입니다. 대개 과학자들은 업이나 내세,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에 기반한 학문이기 때문에 정신적 영역까지 다루지 않습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천신이야기는 생뚱맞은 것일지 모릅니다.

 

물질을 우선적 가치로 여기는 자들을 유물론자들이라 합니다. 과학자들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요즘 말하는 무신론자들도 유물론자의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유물론자는 대체로 정신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로지 물질만이 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인지하는 정신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보는 눈은 단지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고 인지하고 인식하는 정신적 작용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물론자들은 이런 정신적 영역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물론자나 무신론자들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이외는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물론자나 무신론자들은 사후의 세계나 내세, 윤회에 대하여 말하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만 인정하기 때문에 하늘나라나 하늘나라의 천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허황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듯합니다. 지나치게 물질에 의존하는 것에서 떠나기 위해서라도 천수념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남한테 돈을 꾸어 갚지 않는 자

 

오로지 물질만이 있다라고 여겼을 때 단멸론자가 되기 쉽습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부처님당시 유물론자의 최고 목표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스개 소리같지만 유물론자의 최고목표는 남한테 돈을 꾸어 갚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이라 합니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심지어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다른 사람의 목을 벤다고 해도 그 목숨은 빼앗을 수 없고 그 칼은 단지 일곱 요소 사이의 공간을 통과한 것뿐이다.”(S24.8)

 

 

이 말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까꾸다 깟짜야나의 견해입니다. 빠꾸다 깟짜야나의 견해를 절대적인 도덕부정론이라 합니다. 그의 도덕부정론에 따르면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계를 어겨도 죄가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각자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는 육도를 윤회한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도덕부정론자들은 내세와 윤회를 믿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지옥이나 하늘나라도 믿지 않았습니다. 유물론자나 도덕부정론자들은 물질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자는 업과 내세를 부정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덕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없이 어깁니다. 유물론자들의 최대목표가 돈을 꾸어 갚지 않는다라 하는 것이 실감납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신들은 존재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수 없이 신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는 다릅니다. 불교에서 신은 윤회하는 존재이고 실제로 있는 것이라 합니다. 천신도 등급이 있어서 욕계천신이 있는가 하면 더 수승한 색계와 무색계천신도 있습니다. 특히 색계와 무색계천신을 범천이라 하여 선정의 경지에 이른 자가 가는 곳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신들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육도도 있고 삼계도 있는 것입니다.

 

육도가 있고 삼계가 있는 것은 정신적 영역입니다. 물질에 기반한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기독교처럼 창조론을 기반한 것도 아니고 우연발생한 것도 아닙니다. 업과 업의 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세계, 그 중에서 가장 수승하다는 범천의 경지는 깊은 명상으로 체험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명상을 하면 마음은 맑아지고 거친물질세계가 사라지면서 청정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초기경전에 언급된 명상의 세계가 실제로 신들의 세계를 말하며 신들은 있다는 것입니다.

 

시공을 떠나서 위대한 존재는 영향을 줍니다. 과거 위대한 존재가 현재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이는 신들의 세계를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합니다. 다만 믿지 않으니까 받아 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세계는 수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수행을 통하여 들어가면 시공간이 개념이 사라지면서 의식이 고양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렇게 시공간이 함축되면 지금 이시점에서 지나간 과거 뿐만 아니라 미래도 리얼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머나먼 과거도 먼 미래도 현재 시점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불수념(buddhānussati)에 대하여

 

십수념 중에 불수념(buddhānussati)’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극한 존경의 마음을 가졌을 때 선정삼매에 들어 갈 수 있다.”라 했습니다. 부처님을 지극히 염하는 마음을 가지면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불수념과 관련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하나마의 경(A6.10)에 따르면 부처님은 불수념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한 님이다.”라고 새김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불수념하면 탐욕에 사로잡힌 마음이 없어지고, 성냄에 사로잡힌 마음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마음이 없어지고, 그때에 여래에 관하여 마음이 올바로 정초됩니다.”(A6.10)라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올바로 정초되면 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마하나마여, 마음이 올바로 정초되면 고귀한 제자는 목표에 대한 감동을 얻고, 가르침에 대한 감동을 얻고, 가르침에 대한 기쁨을 얻습니다. 기쁨이 있으면 희열이 생겨나고, 희열이 있으면 몸이 고요해지고, 몸이 고요해지면 지복이 체험되고, 지복이 있으면 마음이 집중됩니다.”(A6.10)

 

 

부처님을 늘 새김함에 따라 선정에 들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이라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런 집중의 대상은 부처님을 포함하여, 가르침, 승가 등 열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10가지 수념에 대하여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중의 일부라 합니다.

 

수행은 나홀로, 법문은 다함께 모여

 

혼자하면 수행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모여서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 합니다. 전재성박사는 승수념(saghānussati)’을 설명하면서 수행은 나무 밑이나 빈집 등에서 흩어져서 하고 배우고 듣는 것은 함께 모여서 합니다.”라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니 요즘과는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요즘 선방을 보면 커다란 방에 모여서 함께 수행합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보면 나홀로 수행했습니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수행승이여, 여기 나무 아래 주처들이 있고 여기 빈집들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A5.73)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은 나홀로 하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수행은 빈집에서 홀로 합니다. 그러나 법문을 들을 때는 모두 모였습니다. 경전의 정형구를 보면 부처님이 법문할 때 수행승들을 모아 놓고 내가 설하겠다. 잘 새겨들어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한국불교에서는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수행은 모여서 하는 것이고 공부는 각자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수행은 있지만 가르침에 대한 공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된 이유는 법을 설할 자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W스님은 안거기간에 경전공부를 함께 하며 토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 공부방법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법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을 장려 했습니다. 율장대품과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아누룻다는 부처님에게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M31) 라 했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원래 홀로 하는 것이라 합니다.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것은 함께 하지만 수행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하는 것이 초기경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수행은 나홀로 하지만 다 함께 모여서 점검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나(dāna)가 아니라 짜가(cāgā)인 이유

 

십수념 중에 시수념(施隨念: cāgānussati)’이 있습니다. 이를 보시에 대한 새김이라 합니다. 보시에 대한 새김을 하면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명상주제로서 시수념은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보시와는 다른 것이라 합니다.

 

초기경전에서 보시라는 말은 다나(dāna)’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은 계를 뜻하는 실라(sīla)’와 함께 쓰여 다나실라(dānasīla)’라 하여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조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시계생천(施戒生天)’의 가르침입니다. 이때 다나는 일종의 공덕쌓는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시수념에서 보시를 뜻하는 말은 다나가 아니라 짜가(cāgā)’입니다. 그래서 ‘cāgānussati’라 합니다. 보시라는 것이 단지 공덕쌓기를 넘어 아낌 없이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시수념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보시하는 것은 버리는 것이며, 남에게 보시하는 것은 버리기 연습하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불자들이 생각하는 보시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대부분 대가를 바라며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절에 시주하는 것도 자신과 가족의 사대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명상주제 중의 하나인 시수념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이를 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짜가는 포기하는 것(abandoning; giving up)’에 더 가깝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마하나마의 경(A6.10)’에 따르면 시수념, 즉 보시에 대한 새김에 대한 방법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재가신자 마하나마에게 고귀한 제자에게 보시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인색의 때에 사로잡힌 사람들 가운데서 인색의 때를 제거하여 관대하게 주고 아낌없이 주고 기부를 즐기고 요구에 응하고 베풀고 나누는 것을 좋아하며 집에서 사는 것은 참으로 나에게 좋은 일이고, 참으로 나에게 훌륭한 일이다.”라며 사띠 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런 시수념은 청정도론 보시를 계속 생각함’(Vism.7.113)에서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한마디한마디는 놓칠 수 없는 것

 

니까야강독시간에 수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번 듣고 잊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해 놓으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나중에 노트를 열어 보면 어떤 이야기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말입니다. 특히 수행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수행은 직접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체험해 보고 이야기 하십시오라 합니다.

 

먼 길을 오랜 시간 걸려 불편함을 감수하며 갔지만 오랜 만에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한시간 반동안 메모한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나중에 메모노트를 열어 보면 기억날 것입니다. 들은 것을 들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하는 것은 부처님도 장려한 것입니다. 사부니까야와 쿳다까니까야일부, 그리고 율장을 꿰뚫고 있는 전재성박사의 한마디한마디는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2017-07-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