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마음은 빛나는가? 본래마음과 존재지속심
매일 맞는 아침입니다. 매일 해는 떠 오르고 매일 똑 같은 일상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이전날과 다름이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습니다. 만일 프로그램된 로보트처럼 똑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지옥이 있다면 매일 똑 같은 일상이 반복일 것입니다. 마치 같은 영화를 백 번, 천 번 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멀고 먼 거리
니까야강독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오후 7시에 시작 되는 시간에 맞추어 출발했습니다. 안양에서 고양 삼송역까지는 전철과 지하철로 한시간 반 가량 걸립니다. 그러나 도중에 버스를 기다리고 식사하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최소한 세 시간 전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참으로 멀고 먼 거리입니다. 이제까지 구파발역에서 내려 버스를 탔으나 어찌 된 일인지 버스가 오지 않는 것입니다. 안내전광판을 보아도 소식이 없습니다. 할 수없이 다시 지하철을 타고 삼송역에서 내렸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다지 멀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강독모임이 끝나고 법우님들과 이야기하 하면서 걸을 때는 금방 역에 도착했지만, 홀로 가는 길에 보는 삼송테크노밸리는 아득한 곳에 있었습니다.
도착하여 우동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들어가니 7시가 약간 넘었습니다.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정혜사 신도 두 형제거사님과 블로그 법우님들이 와 있었습니다. 마침 스님이 가져 온 떡을 먹으면서 이야기 꽃이 피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안선생님이 나왔습니다. 나중에 J교수님과 학생이 합류하여 모처럼 꽉 차는 분위기였습니다.
“번뇌의 부숨을 열망했을 뿐”
사람들은 안락을 추구합니다. 대부분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합니다. 아무 움직임이 없을 때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법구경에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라 했습니다. 게으른자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라 합니다. 반면에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라 했습니다.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에 불사(不死)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수행승들은 불사(不死)를 위하여 수행했습니다. 그것도 목숨 걸고 수행했습니다. 테라가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빠라싸리야 존자의 게송이 있습니다.
“번뇌의 부숨을 열망했을 뿐,
생활의 필수품이나
약품이나 그 밖의 물품에 대해서도
그들에게는 강한 열망이 없었다.”(Thag.924)
이 게송은 빠라싸리야 장로가 그 때 당시 수행승들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하며 읊은 게송입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수행승들에게 ‘위의(威儀)’가 있었지만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난 다음 일종의 도덕적 해이가 일어 났습니다. 이전에는 어떠한 것이든 만족하는 삶을 살았고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개탄입니다. 출가수행자가 잘 입고, 잘 먹고, 편한한 잠자리를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번뇌의 부숨을 위해 출가 해야 함을 말합니다.
테라가타에 등장하는 장로들의 게송을 보면 비장한 각오와 다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과 같이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처럼 살면 결국 죽음을 맞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온을 내것으로 여기는 한 오온의 죽음과 함께 정말 죽게 됩니다. 이전에 지은 업식으로 인하여 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프로그램된 로보트가 또 다시 작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멀리 여읨을 닦으며 그것을 궁극으로 지냈다.”(Dhp.925) 라든가, “번뇌를 여읜 님은 형장에서 풀려난 것처럼 목숨이 다한 것을 기뻐한다.”(Dhp.711)라며 이번 생에서 끝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 순간에 죽는다면
이번 주 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진도를 많이 나갔습니다. 함께 읽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홀로 경전을 읽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홀로 경전을 읽을 때 주석을 참고하여 읽는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큼,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것 이상 알 수 업습니다. 그럴경우 많이 아는 자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나의 인식을 뛰어넘는 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인식의 지평은 확장될 것입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문구는 부처님이 심혈을 기울여 설한 것이라 했습니다. 흘려 버리고 말 내용이 아니라 파고 들어 가다 보면 부처님이 어떤 의도로 말씀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는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을 때 더 확실하게 다가 올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사악한 마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는 나의 마음을 미루어 그의 마음을 안다. 만약 이때 그 사람이 죽는다면 그 과보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사악해졌기 때문이다.”(A1.43)
사악한 마음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한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합니다. 이는 화생을 의미합니다. 화생은 부모 없이 즉각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청정한 마음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면 하늘나라에서 태어날 것이라 합니다. 하늘나라 역시 화생입니다. 선정을 닦은 자가 죽으면 마지막 순간에 해당 선정에 있게 되면 해당 선정의 세계에 곧바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늘 사악한 마음 상태를 가진체 죽음을 맞이 한다면 틀림 없이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이때 그 사람이 죽는다면 그 과보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보입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S35.235)
여섯 가지 감역을 다스리지 않으면 그 과보로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문구는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입니다. 이 말은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만약 이때 그 사람이 죽는다면 그 과보로 지옥에”로 표현된 것과 유사합니다.
같은 표현이 니까야 마다 다르게 표현된 것은 송출자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 난 후에 결집이 있었는데 앙굿따라니까야는 아누룻다가 전했고, 상윳따니까야는 마하 깟싸빠가 전했습니다. 또 디가니까야는 아난다가, 맛지마니까야는 사리뿟따가 전했습니다. 이렇게 송출자 그룹이 다르다 보니 니까야에 중복되는 가르침이 많습니다. 마치 기자들이 인터뷰 기사를 쓸 때 같은 내용이지만 다르게 표현 한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니까야가 틀림 없는 부처님 원음임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되었을 때
강독모임에서 두 번째로 읽은 것은 호수의 비유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물이 가득 찬 호수가 혼탁하고, 혼란되고, 흙탕물이라면, 눈 있는 사람이 물가에 서서 움직이거나 서 있는 굴과 조개, 자갈과 돌, 물고기와 수초를 볼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물이 혼탁하기 때문이다.”(A1.45)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거울과 같이 맑은 물이라는 뜻입니다. 물이 거울과 같이 맑으면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오장애’에 대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오색물감으로 물들은 물로, 분노를 부글부글 끓는 물로, 해태와 혼침을 이끼 낀 물로, 흥분과 회환을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로, 의심을 흐린 흙탕물로 비유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장애가 있을 때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라 했습니다.
고요한 마음에서 지혜가
파도치는 물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없습니다. 흥분 했을 때 실수합니다. 파도치는 물에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 앉히면 보입니다. 경에서는 흙탕물이 가라 앉으면 물속의 굴과 조개, 물고기, 수초 등이 보일 것이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가라 앉히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마음이 청정하면, 자신의 이익을 알 수 있고, 타인의 이익을 알 수가 있고, 그 양자의 이익을 알 수 있고 인간의 성품을 뛰어넘는 고귀한 앎과 봄을 실현할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다.”(A1.46)
마음이 청정하면 이익이라 했습니다. 혼란스럽고 혼탁한 마음에서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이익도 얻을 수 없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자는 순간순간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취합하여 내린 판단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최고경영자가 혼란스런 마음에서 결정을 내렸다면 모두에게 불이익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일까 선수행을 했다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결정을 내릴 때는 골방에 들어 가서 마음을 비웠다고 합니다. 이는 선정에서 지혜, 즉 고요한 마음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연성과 적응성에 대하여
마음이 호수와 같이 맑아졌을 때 지와 견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를 말합니다. 수행을 하면 지혜로운 자가 되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닦고 익힌 마음은 유연성과 적응성을 갖춘다.”라 했습니다.
유연성과 적응성에 대하여 토론이 있었습니다. 어떤 법우님이 ‘계금취견’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계금취견은 유연성과 적응성이 없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잘 지적했다고 칭찬하면서 오계를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초기불교에서 오계를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불살생계와 관련하여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Pāṇātipāt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삼가다 (veramaṇī)’라는 말과 ‘학습계율(sikkhāpadaṃ)’이라는 말입니다. 삼가는 것은 ‘abstinence’ 의 뜻으로 범하지 않도록 억제하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습계율은 ‘steps of training’의 뜻으로 단계적으로 훈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를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오계는 물론 출가자의 구족계에 대하여 학습계율이라 했습니다. 이는 평생을 두고 지켜 나가야 하는 계율을 말합니다. 설령 번뇌 다한 무학의 아라한이라도 하더라도 지켜야 할 계율입니다. 이런 계율은 단계적으로 완성됩니다. 또한 죄의 경중에 따라 차별을 두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자자와 포살시간게 고백하도록 하여 마음의 부담을 덜어 주고자 했습니다. 바라이죄와 같은 큰 죄는 승단추방으로 다스렸습니다. 이러한 학습계율은 유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적응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도들의 계율을 보면 매우 경직되어 있습니다.
외도의 계율은 대부분 ‘해야 한다’ 라거나‘해서는 안된다’ 라 되어 있습니다.엄격한 계율이나 금기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십계 또한 계금취견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직된 계율은 심한 스트레스를 야기하고 말 것이라 합니다.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강요했을 때 모두 죄인으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정신병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 하신 계율은 유연성과 적응성이 있습니다. 이는 ‘삼간다’거나 ‘학습계율’이라 칭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불자라면 오계를 지키는 삶을 살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살아 가면서 오계를 어길 수 있습니다. 그때 마다 참회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계를 어기지 않겠노라고 다짐 하면 됩니다. 테라와다불교 법회의식에서 오계를 낭송하는 것도 평생 지키고 지녀야할 학습계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은 오계준수낭송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니까야강독 모임에서도 반드시 오계서약을 합니다. 이는 오계가 외도의 계금취견과 달리 유연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판다나 나무가 유연성이나 적응성에서 최상인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닦고 익힌 마음처럼 유연성과 적응성을 갖춘 다른 하나의 원리를 보지 못했다.”(A1.47) 라 했습니다.
닦아야 할 본래마음이 있을까?
앙굿따라니까야에서만 볼 수 있는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는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 오는 번뇌로 오염된다.”(A1.49)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 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A1.50)
매우 짤막한 이 게송은 ‘여래장사상’의 원류로 보기도 합니다. 능가경에 따르면 “여래장은 청정한 모습을 지녔지만, 객진번뇌에 의해서 오염되어 부정하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과 다른 것이라 합니다. 만일 여래장 사상대로 본래 빛나는 마음이 있어서 오염된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이라면 본래 있는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흔히 선가에서 말하는 ‘참나’ 같은 것입니다.
성자로 거듭태어 나지 않는 한
부처님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라 했을 때 주석가에 따르면 ‘바왕가찟따(bhavaṅga-citta)’를 말합니다. 이 말은 잠재의식 또는 유분심, 요새는 ‘존재지속심’ 등으로 불리웁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한존재의 기저에 있는 마음이라 합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릅니다. 또한 사람마다 성향이 다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설령 일란성 쌍둥이라 하더라도 자세히 살펴 보면 다르고 성향 또한 다릅니다. 이렇게 한존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마음이 바왕가의 마음, 존재지속심이라 합니다. 그런데 존재지속심은 ‘업’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재생연결의 순간에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다음 생을 위한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십이연기에서 ‘식’에 해당됩니다. 이를 ‘업식’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재생연결식은 한존재의 최초의 마음이자 동시에 한존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마음이고 동시에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개로 태어나면 도중에 다른 존재로 될 수 없어서 죽을 때까지 개로서 살아야 합니다.
한인간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얼굴과 성향으로 태어났다면 죽어서 다른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 한 얼굴이 바뀌지 않고 성향 또한 바뀌지 않습니다. 다면 성향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자가 되었을 때입니다.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었을 때 전혀 다른 삶을 살아 갑니다. 얼굴은 똑 같을지 몰라도 성향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거듭난 것입니다. 흉악한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아라한이 되었을 때 거듭난 것입니다. 이는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태어난 이래”(M86.24)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자가 되어 거듭태어나지 않는 한 한존재는 자신의 얼굴과 신체적 조건, 그리고 성향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사람이 ‘개과천선’했다고 하지만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않는 한 옛날 성질이 나오는 것도 바왕가찟따, 존재지속심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바왕가의 마음은 한존재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마음입니다. 재생연결의 순간부터 죽을 때 까지 지속 되는 이 마음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바왕가(bhavaṅga)에 대하여 ‘the sub- consciousness’라 합니다. 그런 바왕가의 마음이 번뇌로 오염되었다고 합니다.
마음의 오염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빛나는 마음에 대하여 대승에서 말하는 본래청정한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마음이 오염되어 있어서, 마치 얼룩진 거울을 수건으로 깨끗이 닦듯이,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하여 본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난다면 이는 본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참나’를 말합니다. ‘불성’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대승에서 참나나 불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 합니다. 그러나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말하는 빛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본래 있는 마음이 아니라 한 존재의 정체성을 말하는 바왕가의 마음, 즉 존재지속심을 말합니다. 그 마음이 오염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 오는 번뇌로 오염된다.”(A1.49)라 했습니다. 여기서 오염되었다는 것은 탐욕,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오염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번뇌와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삶의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라 끊임 없이 정보를 받아 들이는 과정에서 대상에 끌리게 되면 업이 형성되는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고 큰 대상만 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심코 지나치고 마는 것도 업이 됩니다. 누군가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마음을 내는 순간 업이 생성됩니다. 누군가 아름다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때 역시 업이 됩니다. 이는 바탕에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탐욕으로 분노로 어리석음으로 살기 때문에 무수한 업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바왕가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다가 오는 번뇌로 오염된다.”(A1.49)라 한 것입니다.
왜 마음은 빛나는가?
마음은 빛나는 것이라 합니다. 다만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되었다고 합니다. 대승에서는 마음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객직번뇌로 오염되었다고 합니다. 객진번뇌를 닦아내기만 한면 본래청한 마음이 될 것이라 합니다.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는 공통된 마음이라 합니다. 그러나 전재성박사는 빛나는 마음에 대하여 ‘비추는 마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드러나듯이, 마음을 청정하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사물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능력이나 인식작용이 빛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아비담마논장이나 청정도론의 인식과정과 맥을 같이 합니다.
마음은 번뇌로 오염됩니다.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로 마음이 오염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배운 제자들은 번뇌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그래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에게 마음의 수행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A1.52) 라 했습니다. 이는 “순간포착(javana)의 순간에 탐욕의 여읨, 분노의 여읨, 어리석음의 여읨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지혜에 상응하는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나타나면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Mrp.I.60) 라는 주석의 가르침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빛나기 때문에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계발하여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빛나는 것이라 했을 때 본래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빛나는 것이라 합니다.
청정도론 번역
전재성박사는 ‘빛나는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라는 가르침에 대하여 주석의 설명대로 바왕가의 마음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아비담마 인식과정 십칠단계에 있는 ‘자와나(javana)’에 대하여 ‘순간포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했습니다. 이런 설명은 논장 아비담마나 청정도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전재성박사는 청정도론 번역에 착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특히 스님들이 요청한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청정도론이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지만 어렵다고 합니다. 내용이 어렵기도 하지만 번역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좀더 알기 쉽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번역해 줄 것을 오래 전부터 요청받았다고 합니다. 마침내 이번에 청정도론 번역에 착수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에서 청정도론이 번역되어 세상에 나온다면 획기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사부니까야와 쿳다까니까야 중의 일부 번역, 그리고 율장이 번역되었으나 오직 논장만 번역서가 없습니다. 이번에 청정도론이 번역되어 세상에 나온다면 독자들은 두 종류의 번역서를 갖게 되는 행운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청정도론은 오부니까야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한 논서로서 방향을 잃고 헤메이는 불자들에게 나침반과 같고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참고서와 같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미 백년전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보다 무려 백년이 앞선 것입니다. 청정도론이 완역된다면 경장을 포함하여 율장, 논장까지 갖추게 되어 빠알리삼장까지 범위를 넓힐 것입니다.
세계최초의 합본화 작업
강독모임이 끝나고 선물을 한보따리 받았습니다. 그것은 앙굿따라니까야 교정본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니까야 합본에 대한 것입니다. 기출간된 앙굿따라니까야는 모두 열한개의 모음으로 책수가 모두 아홉 권에 달합니다. 아홉 권을 한권으로 만드는 ‘합본(合本)’ 작업을 작년부터 수 개월 진행했는데 완성된 것입니다. 출간을 앞두고 오자나 탈자, 오역, 탈역 등을 첵크 하는 교정작업은 필수 입니다.
교정작업은 다섯 모음에서부터 열모음까지 입니다. 모두 네 권으로 886페이지부터 2,261페이지까지 1,400페이지 가량됩니다. 앙굿따라니까야합본의 경우 3,000페이지가 넘을 것이라 합니다. 합본을 보면 두 칼럼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합본처럼 작은 폰트사이즈에 얇은 종이로 될 듯합니다.
아홉권을 한권으로 만드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앙굿따라니까야 합본이 성공하면 사부니까야는 모두 단행본이 됩니다. 사부니까야가 네 권으로 정리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아마 전세계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도 주석까지 모두 꼼꼼하게 읽기 힘듭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거나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사 놓은 책은 장식용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교정작업에 참여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가르침에 바다에 빠져 들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집니다.
선물 한보따리 받고
6월 한달간은 강독모임이 없습니다. 전재성박사가 가족이 있는 하와이에서 한달 가량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와이 불자들을 위하여 강연도 하고 논서도 번역하는 등 한국에서와 똑 같은 일상을 보낼 것이라 합니다.
강독모임이 끝나고 귀가하면 매우 늦은 시간이 됩니다. 전철운행에 이상이 있으면 더 늦어집니다. 세류역에서 화재사고로 인하여 전철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습니다. 귀가하니 거의 자정이 다 되었습니다. 갈때도 힘들었지만 올 때 힘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청정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즐거움입니다.
귀가길에 전철에서 나누는 이야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겁습니다. 무엇 보다 뿌듯한 것은 한보따리 선물입니다. 일을 하고 글을 쓰는 것에 더하여 교정작업이 하나 더 추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바쁜 한달이 될 것 같습니다.
2017-05-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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