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깨달음과 기연(機緣), 바구존자의 문지방깨달음

담마다사 이병욱 2017. 5. 2. 12:12

 

깨달음과 기연(機緣), 바구존자의 문지방깨달음

 

 

4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은 4 28일에 열렸습니다. 멤버들은 점차 고정화 되는 듯합니다. 생업에 바쁜 것이 가장 큰 이유라 봅니다. 한달에 두 번 있기 때문에 편한 시간에 들으면 좋을 듯 합니다.

 

무명을 베는 명지의 피를

 

강독모임에 교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의미는 없습니다.  교재가 있어서 진도를 나가긴 하지만 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듣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말한마디가 중요합니다. 사부니까야는 물론 쿳다까니까야의 일부경전, 그리고 율장에 모두 있는 가르침입니다. 4월 두 번째 강독모임에서는 명지의 경(A1.42)’을 낭독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벼이삭이나 보리이삭이 올바로 놓였다면, 손이나 발이 스치면 손이나 발을 베어서 피가 흐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삭이 올바로 놓인 까닭이다.”(A1.42)

 

 

날카로운 풀에 스치면 상처가 납니다. 피를 흘리게 됩니다. 수확한 벼이삭이나 보리이삭이 눕혀 있다면 베지 않을 것입니다. 벼이삭이 올바로 세워졌을 때 베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바로 놓였을 때 지혜가 나옵니다. 경에서는 수행승들에게 마음이 올바로 놓이면, 무명을 베어서 명지를 흐르게 하여 열반을 실현시킬 수 있다.”(A1.42)라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벼이삭과 보리이삭의 비유를 든 것은 마음의 청정과 지혜를 계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볏단이 세워져서 올바로 놓여 졌을 때 손이 베여 피가 흐르듯이, 마음을 계발했을 때 무명을 베는 명지의 피를 흐르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피를 명지로 비유했습니다. 손이 베여 피가 흘렀을 때 이를 지혜의 피로 본 것입니다. 지혜의 피가 흘러야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계발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호흡을 관찰하면

 

강독모임시간에는 주로 전재성박사님이 이야기 합니다. 특히 명상과 관련하여 이야기할 때는 도현스님이 체험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주로 선정에 대한 것입니다. 들어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흡을 관찰하다 들어 가게 되는데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전개 됨을 말합니다. 그런 세계는 행복으로 가득한 세계라 합니다. 그런데 선정상태는 모두 똑같지 않다고 합니다. 비슷하면서 다른 세계라 합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행복한 세계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즐거우니까 들어 간다.”라 했습니다.

 

선정삼매에 들면 초기경전에 표현된 정형구와 같은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고 선정에만 머물러 있으면 지혜가 계발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마음을 집중하여 선정에 머무는 것도 좋지만 무엇 보다 지혜를 계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불교적 지혜는 무상, , 무아라 했습니다.

 

왜 무상관인가?

 

모든 현상을 무상, , 무아로 관찰하는 것이 불교적 지혜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명상이 요청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상관, 호흡관, 자애관, 부정관이라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불교의 사대명상이라 합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상관이라 합니다.

 

무상관이 가장 강력한 수행이라 합니다. 무상관을 닦으면 자연스럽게 자애관이 닦여진다고 합니다. 무상관을 닦을 때 지금 이순간에도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라고 관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무상관을 관하면 열리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너진 틈새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상관의 요체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사리뿟따존자가 아사지의 경행을 보고 감동했을 때 한마디 물어 본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법구경 인연담에 따르면, 앗사지존자가 모든 것은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설하셨다. 또한 그것의 소멸도 위대한 수행자께서는 설하셨다.” (Dhp11 12번 인연담)라 했습니다. 사리뿟따존자는 이 말 한마디에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습니다. 인연담에 따르면 그 첫번째 시행을 듣자마자 흐름에 드는 길이 확립 되었고 두 번째 시행을 듣자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라 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앗사지 존자의 말을 듣고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준비된 수행자의 특징입니다. 평소에 수행을 한 것이 어떤 계기가 되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한마디에 깨달을 수 있고 행위를 하는 도중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를 기연(機緣)’에 의한 깨달음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사람

 

전재성박사는 강독모임에서 깨달음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무상관에 의한 것이고 또 하나는 기연에 의한 것입니다. 네 가지 수행관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무상관에 대하여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보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전재성박사의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도 실려 있습니다.

 

최근 전재성박사가 조선일보와 인터뷰했습니다.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사람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 우주를 지탱하는 기둥(2017-05-01)”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니까야 강독시간에 듣던 말입니다. 홍제동자택에서 이루어진 대담에서 질문자가 왜 일체를 '괴로움'으로 인식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습니다.

 

 

모든 존재가 무상한 것처럼 우리 각자도 늙음·질병·죽음에 직면한다. 아무리 즐거운 삶이라도 변함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이를 인식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부처님은 법구경(法句經)에서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고 했다.” (전재성박사, 부끄러움과 창피함 아는 것이 우주를 지탱하는 기둥, 조선일보 2017-05-01)

 

 

 

전재성박사는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라는 법구경의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니까야강독모임에서도 한말입니다. 이말을 한 것은 무상관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모두 죽을 수밖에 없음에도 즐거움에만 탐닉한다면 지혜를 볼 수 없음을 말합니다. 선정삼매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다면 지혜가 계발될 수 없습니다. 선정의 즐거움도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했을 때 지혜가 생겨남을 말합니다.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죽어가는 자의 얼굴이란 나도 언젠가는 저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태어남은 늙음과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그 과정에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을 겪게 됩니다. 결국 태어남은 절망으로 귀결됩니다. 죽음에 임박하여 남는 것은 절망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망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괴로움은 괴롭다고 보는 순간 초월한다.”라 했습니다. 마치 문제가 있는 곳에 답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를 설했습니다. 마치 문제를 풀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과 같습니다.

 

전재성박사는 법구경을 인용하여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라 했습니다. 일 것입니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게송입니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Dhp129)

 

 

법구경 폭력의 품에 실려 있는 게송입니다. 모든 존재들은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그것은 아마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안다면 죽음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죽음은 오늘 밤이 될지, 1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고 나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아는 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아는 자들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죽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병들고 늙어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Dhp129) 라 했을 것입니다. 이는 무상관에 따른 것입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가장 강력한 명상은 무상관이라 했습니다. 세계가 무너진다고 관했을 때 삶의 태도가 바뀔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무상관 했을 때 세상은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불교의 지혜는 다름 아닌 무상, , 무아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선정삼매의 즐거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정의 행복마저도 조작된 것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기연(機緣)

 

무상관 수행을 하면 시절 인연이 되었을 때 깨달을 것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기연으로 설명합니다. 어떤 계기가 되어서 단번에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천장사에 가면 혜월동굴이 있습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혜월스님은 경허스님의 짚신을 삼다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짚신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나무망치로 ‘탁탁’ 두드리다가 문득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탁탁 소리를 인연으로 큰 깨침을 얻은 것입니다. 이런 기연은 테라가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기연과 관련하여 전재성박사는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잠들려 하는데 들어갔다.”라 했습니다. 그리고 문지방에서 넘어 졌을 때 깨달았다.”라 했습니다. 관련 게송을 찾기 위하여 테라가타를 빠른 속도로 읽었습니다.

 

테라가타는 이미 한차례 읽은 바 있습니다. 테라가타 출간을 앞두고 교정작업에 참여 했기 때문입니다. 관련구절을 찾기 위하여 읽어 가는 도중에 기억해 둘 만한 아름다운 게송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나중에 글을 쓰기 위하여 메모 해 두었습니다. 마치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잡는 격입니다.

 

깨달음의 기연과 관련하여 자살과 관련된 게송이 있습니다. 출가한지 25년이 된 수수행승은 수행의 진척이 없었습니다. 대자유를 얻고자 출가했으나 한순간만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수행승은 차라리 칼을 들어 자결해 버릴까?”(Thag.407) 라며 목에 칼을 들이 댑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관련된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나는 삭도를 들고

침상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목의 정맥을 자르기 위해

삭도를 가져다 그 곳에 대었다.” (Thag.408)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 (Thag.409)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했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410)

 

 

테라가타에서 쌉빠다싸존자는 자결을 하기 위해 삭도를 목에 대는 순간 깨달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manasikara)’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그 후에 계행은 병들지 않았는지라고 성찰하다가 파괴되지 않고 균열되지 않은 청정한 계행을 보고 기쁨이 생겨나고 기쁨이 마음에서 몸이 경안해지고 몸의 경안에서 자양없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삼매가 일어났기 때문에 마음의 통찰을 통해서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일어났다.”(Thag.A.II.173) 라 되어 있습니다. 계행이 뒷받침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청정이 이루어져 있어서 마음의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이 동시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주석에서는 목에 칼을 갖다 대어 상처가 생겨나자 생겨난 고통을 진정시키면서 통찰을 통해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일어났다.” (Thag.A.II.173) 라 되어 있습니다. 이때 흘린 피는 명지의 피일 것입니다. 마치 벼의 이삭이나 보리 이삭이 바로 세워져 있을 때 손을 베어 피를 흘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마음이 올바로 놓이면, 무명을 베어서 명지를 흐르게 하여 열반을 실현시킬 수 있다.”(A1.42)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아난다존자의 깨달음

 

깨달음에 대한 기연으로 아난다존자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디가니까야 주석(Smv.10)에 따르면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머리가 베개에 닿기 직전에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라 되어 있습니다.

 

아난다가 깨닫지 못한 것은 지나친 흥분때문이라 합니다. 아난다는 내일이 모이는 날이다.’라고 생각하여 경행을 하며 밤을 지새워 보냈지만 탁월한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쉬어야 겠다.’라며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한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깨달음을 이룬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는 깨닫기 위해 밤새 경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난다존자는 지나치게 정진을 했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즉 두 발을 씻고 승원에 들어가 침상에 앉아 쉬어야 겠다.’라고 몸을 침상에 기울이는 순간에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깨달은 반드시 좌선이나 경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아난다존자는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머리에 베개가 닿기 직전에 깨달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라 했습니다. 아난다는 네 가지 자세, 즉 행주좌와는 상관 없이 아라한이 된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대하여 이 가르침에서 누가 눕지 않고 앉지 않고 서지 않고 걷지 않고 거룩한 님이 되었는가?”라고 물으면 장로 아난다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바구존자의 문지방깨달음

 

깨달음의 기연과 관련하여 가장 극적인 장면이 아마 바구존자이야기일 것입니다. 율장대품 주석에 따르면 바구는 싸끼야족의 출신으로 아누룻다와 낌발라와 함께 출가했다. 어는 날 그는 졸음을 쫓아 내기 위해서 방사를 나섰는데, 현관에 발을 내딛다가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애쓰다가 깨달음을 얻어 거룩한 님이 되었다.”(1343번 각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구절은 존자 바구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보고나서 자리를 마련하고 발 씻을 물과 발받침과 발걸레를 준비하여 맞이하고 발우와 옷을 받았다.”(876) 라 되어 있습니다.

 

현관에서 넘어졌다가 그것을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극적입니다. 마치 선사들이 세수할 때 코를 만지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을 연상케 합니다. 이러한 기연은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평소 수행의 과정이 응축 되어 하나의 계기를 만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라 봅니다. 마치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모든 것을 놓아 두고 바깥 공기를 쐬었을 때 좋은 생각이 떠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바구존자의 문지방깨달음과 관련된 게송이 테라가타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혼침에 정복되어

나는 정사를 나왔다.

경행처로 올라가다

거기서 땅에 넘어졌다.”(Thag.271)

 

사지를 주무르고,

다시 경행처로 올라가서

안으로 잘 집중하여

경행처에서 경행을 했다.” (Thag.272)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 (Thag.273)

 

나의 마음은 그래서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했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274)

 

 

바구존자는 혼침상태에서 경행처로 올라가다 땅에 넘어졌다고 했습니다. 주석에서는 현관에 발을 내딛다가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애쓰다가 깨달음을 얻어 거룩한 님이 되었다.”라 되어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렸을 때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합니다. 마치 돈을 벌고자 단타거래에 열중하는 자들은 욕망으로 인하여 원금만 깍여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연애하는 자가 욕망으로 쫒아가 보지만 상대방은 더욱 더 멀리 달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 또한 목표달성하듯이 이루려고 욕심을 내었을 때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합니다. 무심의 상태에 되었을 때, 하나의 기연으로 인하여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합니다.

 

나의 것이라고 한계 지었을 때

 

사람들은 대게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해서 무상합니다. 오래 가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고, 오래 가지 못해서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선정삼매의 즐거움이라 해도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무상, , 무아로 관하는 것이 오히려 즐거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상, , 무아의 지혜를 갖추었을 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전재성박사의 조선일보기자와의 대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 ‘자아’ ‘나의 것이라는 한계에 집착하면 고통이 생겨난다.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무아(無我)의 자유를 누린다는 뜻이다.”

 

(전재성박사,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 우주를 지탱하는 기둥, 조선일보 2017-05-01)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무상관을 하면 자연스럽게 괴로움과 무아를 알게 될 것이라합니다. 무상관, 호흡관, 자애관, 부정관이라는 불교 사대명상 중에서 무상관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아는 현상을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나 또는 자아, 나의 것이라는 말은 나에 대하여 한계 짓는 것이라 했습니다. 나의 것이라고 한계 지었을 때 고통이 발생함을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를 유신견이라 합니다.

 

서른 개의 화살을 맞았느니

 

불교의 목적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기 위한 조건이 유신견과 사견의 타파입니다. 그래서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또한 갈애의 활에서 쏘아진

서른 개의 화살에 맞았느니,

어떻게 그것이 나의 가슴의

강인한 심장을 꿰뚫고 있는지 보라.”(Thag.753)

 

 

뗄라까니존자가 읊은 게송입니다. 게송에 따르면 서른 개의 화살을 맞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서른 개의 화살이란 20가지 유신견과 10가지 사견을 말합니다. 20가지 유신견이란 오온에 대하여 네 가지 방식으로 자아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을 예로 들면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입니다. 이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적용하면 모두 20가지 유신견이 됩니다. 열 가지 사견이란 세계는 영원하다,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등으로 표현된 10가지 형이상학적 고찰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30가지 화살을 맞았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자유를 누리려면

 

30가지 화살은 견해의 화살입니다. 오온을 자아로 여겼을 때 괴로움이 일어나고 반면 오온을 무아로 여겼을 때 대자유를 누릴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상을 관하면 열리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상을 관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걸어 가면서 조차도 무너져 간다.”라고 관하는 것이라 합니다. 철저하게 무상을 관했을 때 자애의 마음이 나올 것이라 합니다. 사리뿟따존자가 앗사지앗부터 들은 것도 모든 것은 생겨나고 사라진다라 했습니다. 매일매일 무상을 관했을 때 자연스럽게 무상, , 무아의 지혜가 열릴 것이라 합니다. 니까야강독모임에서 전재성박사는 늘 무상을 관하라고 합니다.

 

 

 

2017-05-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