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한국불교에 오계가 보이지 않는다, 학습계율로서 오계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12. 13:41

 

한국불교에 오계가 보이지 않는다, 학습계율로서 오계

 

 

백세시대라 합니다. 주변에 구십세를 넘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백세를 채우고 죽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난다고 합니다. 백세시대를 사는 요즘 나이를 먹어 가지만 정신적 성장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노욕이라 하여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탐욕스러워지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분노의 마음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나이들수록 탐, , 치를 소멸하여 관용과 자애와 지혜를 갖추어야 하나 세월이 흘러 감에 따라 나이만 차곡차곡 쌓일 뿐 변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나이 든 노인이라 하여 모두 지혜롭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정신적 향상을 이루기 위한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다면 단지 나이만 먹은 늙은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 단지 나이가 들었으나 헛되이 늙은 자라 불린다.(Na tena thero so hoti yenassa palita siro paripakko vayo tassa moghajiṇṇo ti vuccati)”(Dhp.260) 라 했습니다.

 

배우는데 있어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하여, 머리가 희다고 하여 정신적 향상을 게을리한다면 단지 베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동물과 같은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정신적 향상을 이루어야 합니다. 특히 좋은 배움의 기회가 있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니까야강독모임

 

3 10일 금요일 삼송테크노밸리로 향했습니다.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이날 안양에서 법우님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법회모임의 13년 지기 A법우님입니다. A법우님은 이곳저곳 공부모임에 다니고 있습니다. 니까야강독모임에 참석을 권유했습니다

 

A법우님의 차를 타고 외곽순환도로를 이용하여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니 정혜사 주지 도현스님과 신도분들이 먼저 오셨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주로 블로그지인들입니다. 블로그로 인연 맺은 님들에게 참여를 권유하여 오게 된 것입니다.

 

강독에 앞서 여법하게 의식을 행합니다. 예경문과 삼귀의와 오계서약을 빠알리어로 낭송합니다. 이어서 자애의 경을 독송하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것입니다. 모임이 끝날 때는 축복의 경낭송으로 마무리합니다.

 

예불의식이 끝나고 입정에 들어갔습니다. 보통 법회의식에서 입정은 형식적입니다. 짧게 일이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럼에도 잠시라도 눈을 감고 있으면 정화 되는 듯합니다. 모임에서 입정시간은 약 20분 가량 됩니다. 의자에 앉아서 하기 때문에 발이 저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눈을 감고 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집중합니다. 20분이라는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시간 만큼은 소외 오장애라 불리우는 감각적 욕망(kāmacchanda), 악의(b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 회의적 의심(vicikicchā)이 억압되기에 충분합니다. 마치 흙탕물이 시간이 지나면 정화되듯이 짧은 입정이지만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입정이 끝나면 앙굿따라니까야를 한권으로 요약한 생활속의 명상수행을 강독합니다. 그러나 이날 전재성박사는 오계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설명하다 보니 2시간 가까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강독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오계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이날 강독모임이 마무리 된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법회시간에 오계준수서약을 하지 않습니다. 한국불교 예불의식을 보면 삼귀의와 반야심경, 천수경 독송은 있어도 오계낭송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 법회할 때 오계서약은 필수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를 갖게 되었을까요?

 

학습계율(sikkhāpada)과 의무계율(paimokkha)

 

전재성박사는 빠알리오계에 대하여 학습계율(sikkhāpada)’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학습계율이라 한 것은 문자그대로 배우고 익혀 내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이루어질 때 까지 평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율 또한 완성될 때까지 평생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학습계율은 배워나간다라는 의미가 강함을 말합니다.

 

오계를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학습계율과 비교되는 것이 의무계율(paimokkha)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학습계율이라 불리우는 식까빠다와 의무계율이라 불리우는 빠띠목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가 번역한 빠알리율장 율장대품 해제글에 따르면 빠알리어로 식까빠다라고 하는 것은 한역으로 학처(學處)라하고, 일반적으로 하나하나의 계율조목을 말하고, 빠띠목카는 그 계율조문을 모아놓은 것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다.”라 했습니다.

 

율장대품 해제글에 따르면 식까빠다(학습계율)는 오계 같은 것이고, 빠띠목카(의무계율)는 비구계 같은 것입니다. 또 해제글에 따르면 두 계율의 관계에 대하여 모든 학습계율은 의무계율이 될 수 있지만, 모든 학습계율이 의무계율인 것은 아니다.”라 했습니다. 비구계를 예로 든다면 비구계 그 자체는 의무계율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처벌이 따릅니다. 그런데 비구계를 구성하고 있는 계목 하나하나는 학습계목이라 하여 평생지키려고 노력해야 함을 말합니다.

 

하지말라고 하는데

 

불자라면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 불자가 될 때 수계를 받는데 삼귀의하고 오계를 받는 것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오계에 대하여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忘語), 불음주(不飮酒)라 하여 하지말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승불교 범망계에 따르면 살생하지 말라”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등으로 하지말라고 합니다.

 

하지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재가불자들에게 율장을 보지말라고 했을 때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한자어 아니 불()’자를 사용하여 살생하지 말라라고 했을 때 이는 매우 지키기 어려운 계율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일까 아예 지키지 못하는 계율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한국불교에서는 오계낭송을 하지 않습니다.

 

오계에 대한 학습계율

 

살아 오면서 벌레를 죽이는 등 누구나 한번쯤 살생을 했기 때문입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살생계목에 걸려 불자가 되기를 꺼려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테라와다와 초기불교에서는 단지 불살생(不殺生)’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테라와다 예불문에서 보는 오계에 대한 학습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Pañcasīla(오계)

 

1.

Pāātipāt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2. 

Adinnādā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3. 

Kāmesu micchācār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4. 

Musāvād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5.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예경지송, 129, 전재성님역)

  

 

 

8.27 시국법회(2008년)

 

 

 

다섯 가지 학습계율을 보면 공통적으로 ‘veramaī’라는 말이 들어 갑니다. 이를 전재성님은 삼가다의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abstinence’의 뜻으로 절제또는 자제를 뜻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불살생 학습계율에 대하여 undertake the precept to refrain from destroying living creatures”라 합니다.

 

왜 베라마니(veramaī)라 했을까?

 

우리말로 삼가다라는 뜻을 가진 ‘veramaī’는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학습계율의 경(sikkhāpadasutta,A4.20)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Katamo ca bhikkhave sappurisena sappurisataro? Idha bhikkhave ekacco attanā ca pāātipātā paivirato hoti, parañca pāātipātā veramaiyā samādapeti. Attanā ca adinnādānā paivirato hoti, parañca adinnādānā veramaiyā samādapeti.

 

수행승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참사람보다 더 참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스스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남에게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도록 훈계한다.”(A4.2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불살생에 대하여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살생하는 것을 삼가고 남에게도 살생하지 말 것을 훈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살생한다는 것은 의도적살생을 말합니다. 무심코 벌레를 밟아 죽인 것은 살생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자비사상은 남에게도 살생하지 말라고 충고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낚시를 좋 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그만두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말 삼가하다와 관련하여 두 개의 빠알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paivirato’이고 또 하나는 ‘veramai’입니다. 둘 다 ‘Abstaining from’의 뜻으로 삼가하다또는 절제하다의 뜻입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이 부분과 관련하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기 스스로도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남에게도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도록 격려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빠일리어 paivirataveramai에 대하여 멀리 여읜다라 했습니다. 우리말 여의다라는 말은 죽어서 사별하다또는 시집보내다의 뜻도 있지만 멀리 떠나보내다의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불연에서 여의다뜻으로 번역한 것은 학습계율을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한 용어라 봅니다.

 

빅쿠보디는 NDB에서Here, someone himself abstains from the destruction o f life and encourages others to abstain from the destruction of life”라고 번역했습니다. 빠일리어 paivirataveramai에 대하여 abstains’라 하여 자제하다’ ‘절제하다’ ‘삼가하다의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평생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부처님은 오계를 설명할 때 pāātipātā paivirato” 또는 “pāātipātā veramaiyā라 하여, ‘죽이는 것을 삼가한다또는 죽이는 것을 자제한다의 뜻으로 말씀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오계 지키기가 매우 어려움을 말합니다. 만을 불살생계를 단도직입적으로 적용한다면 불자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도둑질, 거짓말, 음행, 음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계는 지키기 매우 어려운 것이라했습니다. 평생 지켜야할 계목이라 하여 학습계율(sikkhāpada)이라 합니다. 빠알리어 sikkhāpada에 대하여 영어로는 ‘steps of training’이라 하여 단계적으로 성취 되는 계율임을 말합니다. 지금 성취되지 않았지만 성취되도록 끊임 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법회할 때 마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또는 살아있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받아 지키겠나이다.”라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법회할 때 오계낭송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 오계는 지키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 아예 빼 버린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에서는 승속을 막론하고 오계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습계율은 평생 지켜야 하는 것으로 차츰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지키지 못할지라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켜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낚시 하는 자가 지금 불살생계를 지키기 힘들지만 삼가하고 절제하면 언젠가는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

 

최근 B교계신문에서는 불자답게 삽시다켐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총무원장이 참석하여 이 캠페인의 추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B신문에 따르면 불살생계에 대해서는 산생명 해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불투도는 남에게 손해 끼치지 않기, 불망어는 욕설이나 거짓말 않기, 불사음은 성폭력-성추행하지 않기, 불음주는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는 단지 한문용어를 우리말로 풀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래 취지에도 맞지 않습니다.

 

 

B신문에서는 특히 불음주에 대하여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라 했는데 이는 사실상 음주를 방조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더구나 음주하는 것에 대하여 불음주계에 있어서는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를 죄악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죄악을 저지를 개연성이 다분하기에, 이를 미연에 차단하자는 의미에서 차계(遮戒)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7.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불음주))라 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에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Yo vo, ānanda,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accayena satthā) (D16) 라 했습니다. 이 말은 불교인들의 모든 행위는 경장과 율장에 실려 있는 가르침에 따라야 함을 말합니다. 일종의 헌법과 같고 법조문과 같습니다. 그런데 법과 율에 근거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하려 한다면 본질에서 크게 어긋납니다. B신문의 불자답게 삽시다켐페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계를 어기면 어떻게 되나?

 

부처님은 오계를 어기면 과보를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오계는 평생지켜야 할 학습계율로서 불자라면 법회할 때 마다 다짐을 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음주계에 대하여 죄가 되지 않는다 하여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운동을 한다면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고 넌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오계를 어긴 것에 대한 과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ātipātī hoti, adinnādāyī hoti, kāmesu micchācārī hoti, musāvādī hoti,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yi hoti.

Imehi kho bhikkhave, pañcahi dhammehi samannāgato upāsako yathābhata nikkhitto eva niraye.

 

수행승들이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있는 것에 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갖춘 재가의 신자는 그 원리가 작용하는대로 지옥에 떨어진다.”(A5.17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있는 것에 취하는 것, 즉 불음주계를 어기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대로 지옥에 떨어진다.(yathābhata nikkhitto eva niraye)”라 했습니다. 이런 정형구는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정형구로 나와 있습니다.

 

음주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가르침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더구나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라 하여 음주를 방조하는 것은 평생 지키려고 노력해야 할 학습계율의 취지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오계를 잘못 해석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악업을 지으면

 

오계를 어기는 것에는 무거운 것과 경미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무거운 중업을 짓는 것으로 악처에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벌레 한마리 죽인 것은 그다지 무거운 업은 아닙니다. 이처럼 업의 경중에 따라 전재성님은 예경지송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추구하고 실천하고 자주 실천하는 자는 지옥에 태어나고 축생에 태어나고 아귀에 태어난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주 경미한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단명하게 태어난다.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추구하고 실천하고 자주 실천하는 자는 지옥에 태어나고 축생에 태어나고 아귀에 태어난다. 그리고 주지않은 것을 빼앗는 것이 아주 경미한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재산을 상실한다.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추구하고 실천하고 자주 실천하는 자는 지옥에 태어나고 축생에 태어나고 아귀에 태어난다. 그리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주 경미한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상대의 원한을 산다.

 

거짓말을 하는 것을 추구하고 실천하고 자주 실천하는 자는 지옥에 태어나고 축생에 태어나고 아귀에 태어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주 경미한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모함을 받는다.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에 취하는 것을 추구하고 실천하고 자주 실천하는 자는 지옥에 태어나고 축생에 태어나고 아귀에 태어난다. 그리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에 취하는 것이 경미한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정신적 장애를 얻게된다.”(예경지송 15, A8.40, 전재성님역)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업과 업의 작용의 법칙에 따릅니다. 그런데 중한업과 경미한 업으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중한업은 추구하고 실천하고 자주 실천하는 자라 했습니다. 습관적으로 짓는 업을 말합니다.

 

업과 업의 작용에 따라

 

청정도론에 따르면 임종에 이르러 내생을 결정할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우선순위가 있다고 했습니다. 살인업과 같은 무거운 업이 가장 큰 대상이라 합니다. 마치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음으로 습관적으로 지은 업이라 했습니다. 도살장에서 살생을 습관적으로 하는 업을 가진 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도둑질하는 자, 습관적으로 음행을 일삼는 자, 습관적으로 거짓말 하는 자,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는 자는 예외 없이 지옥이나 축생, 아귀의 세계 중에 한 곳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습관적인 업을 지으면 악처에 나지만 인간으로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면 매우 낮은 지위가 됩니다. 살생을 습관으로 하는 자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오래 못산다고 했습니다. 도둑질을 습관으로 하는 자가 인간이 되면 재산을 상실한다고 했습니다. 부도가 나고나 파산하여 빚쟁이가 되어 비참하게 사는 것이 연상됩니다.

 

음행을 일삼다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상대의 원한을 산다고 했습니다. 이는 테리가타에서 이씨다씨장로니의 게송(Thig.400-447)을 떠 올리게 합니다. 이씨다씨 장로니는 전생에 남자이었을 때 젊음의 교만으로 인하여 남의 아내를 범하였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여자로 태어났는데 남편으로부터 소박당하고 쫒겨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거짓말을 습관적으로 하면 인간으로 태어나도 모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업과 업의 작용으로 업보가 익은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낮은 지위로 태어나는가?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는 자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정신적 장애를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음주나 취기가 있는 것에 탐닉하면 정신적으로 불이익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얘기는 어느 정도 타당합니다.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리멍덩해집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집중할 수 없습니다. 술을 마신채로 단순 육체노동은 할 수 있으나 고도로 집중을 요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불음주계에 대하여 선정에 방해 되기 때문에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라고 해석합니다.

 

정신을 흐리멍덩하게 하는데는 술만이 아닐 것입니다. 담배와 마리화나 등을 습관적으로 하게 되면 정신적 장애가 올 수 있습니다. 특히 마약을 하게 되면 마약 없이 살 수가 없어서 폐인이 됩니다.

 

만일 한평생 술독에 빠져 살거나 마약으로 흐리멍덩하게 산다면 그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대부분 지옥, 축생, 아귀 등 악처에 태어나지만 간혹 인간으로 태어나도 정상적이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정신적 장애를 얻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정신적 장애로 태어나는 경우

 

음주 등 취기를 일삼는 것은 불음주계에 해당됩니다. 넓은 의미로는 마리화나나 마약에 중독 되는 것 역시 불음주계에 해당됩니다. 이는 경에서 취기에 취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음주계를 어기면 악처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도 정신적 장애를 얻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과보입니다. 불음주계에 대한 것을 번역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Surāmerayapāna bhikkhave, āsevita bhāvita bahulīkata nirayasavattanika tiracchānayonisavattanika pettivisayasavattanika, yo sabbalahuso surāmerayapānassa vipāko manussabhūtassa ummattakasavattaniko hoti.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에 취하는 것을 추구하고 실천하고 자주 실천하는 자는 지옥에 태어나고 축생에 태어나고 아귀에 태어난다. 그리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에 취하는 것이 경미한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정신적 장애를 얻게된다.(A8.40, 전재성님역)

 

비구들이여,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는 것을 자행하고 습관적으로 행하고 많이 지으면, 지옥에 태어나게 되고 축생의 모태에 태어나게 되고 아귀계에 태어나게 된다.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섭취해서 받는 가장 경미한 과보는 그 사람이 미쳐버리게 된다.”(A8.40, 대림스님역)

 

“Drinking liquor and wine, repeatedly pursued, developed, and cultivated, is conducive to hell, to the animal realm, and to the sphere of afflicted spirits; for one reborn as a human being drinking liquor and wine at minimum conduces to madness.”(A8.40, 빅쿠보디역)

 

 

지금 습관적으로 음주를 하는 자나 마약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에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정신적 장애를 얻게된다. (yo sabbalahuso surāmerayapānassa vipāko manussabhūtassa ummattakasavattaniko hoti)”라고 번역했습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그 사람이 미쳐 버리게 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알콩중독자나 마약중독자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미친 자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정신적 장애’ 또는 ‘미친 자’에 대한 빠알리어가 ‘ummattakasavattaniko’입니다. 이 말은 ‘ummattaka+sa+vaṭṭani’로 분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ummattaka’는 영어로 ‘one who is mad’라 하여 ‘미친자’ 또는 ‘정신이상자’를 뜻합니다. 빠알리어 ‘saṃ’‘together’의 의미로 ‘함께’ 라는 뜻이고, ‘vaṭṭani’‘a road; a path’의 뜻으로 길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빠알리어 ummattakasavattaniko’는 ‘미친자의 길’라는 뜻이 됩니다. 빅쿠보디는 “to madness”라 하여 미치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술이나 마약을 습관적으로 하면 악처에 태어난다고 부처님은 말씀 했습니다. 설령 인간으로 태어나도 정신이상자가 되어 정신적 장애를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업과 업의 작용 법칙에 따르면 한치의 오차도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B신문에서는 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죄가 되지 않는다거나, 취하지 않게 마시기라 하여 술 마시는 것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왜 학습계율이라하는가?

 

오계를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학습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평생지켜야 할 계율을 말합니다.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지키지 않는다든가, 음주에 대하여 취하지 않게 마시기라 하여 예외로 한다면 가르침에 크게 어긋납니다. 학습계율은 평생동안 지켜야 할 계율이기에 불자들은 법회할 때 오계준수서약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오계낭송을 하고 있는 곳은 드물다고 합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이제까지 한문식 오계는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등과 같이 하지 말라식으로 되어 있어서 지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본래 가르침대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Pāātipāt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라고 맹세한다면, 지금 지키기 힘들어도 언젠가는 지키게 될 것입니다. 오계는 평생 지키려고 노력하고, 평생 배워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가치가 있음을 아는 자들은

 

전재성박사는 니까야 강독모임에서 두 시간 동안 오계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활발한 질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중구난방식이 아닙니다. 짧게 1분 이내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가급적 박사님의 말을 많이 듣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말을 많이 하기 보다 잘 경청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 합니다. 사부니까야와 율장, 그리고 쿳다까니까야 중에서 여섯 개 경전을 완역한 전재성박사님은 가르침을 모두 꿰뚫어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귀중한 시간에 중구난방 떠들면 모두가 손해입니다. 짧게 요점만 질문하여 많은 설명을 듣는 것이 유리합니다.

 

처음 오신 A법우님은 강독모임에 만족했습니다. 지금까지 수 많은 강좌와 법문을 들어 보았지만 이처럼 밀도있게 설명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특히 오계와 관련하여 기존 대승불교에서 하지 말라식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한평생 지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학습계율이라 한 것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재성박사님에 따르면 부처님은 어느 것 하나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전승된 가르침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용어 하나 선택하는데 있어서 깊은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삼귀의를 예로 든다면 귀의라는 뜻이 사라낭(saraaṃ)인데 이는 단순한 귀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피난처를 삼겠다는 의미도 있다는 것입니다.

 

니까야강독이 끝나고 법우님의 차를 타고 귀가했습니다. 귀가길에 법우님은 이날 처음 들어 본 강독에 대하여 만족해 합니다. 이달 넷째 주 금요일(24)에 열리는 모임에도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그날 겹치기 강좌가 있음에도 참석하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을 확인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치가 있음을 아는 자들은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2017-03-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