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즐거움에 마취된 삶에 부정(不淨)의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26. 11:00

 

즐거움에 마취된 삶에 부정(不淨)의 가르침

 

 

거사림(居士林)

 

최근 불교평론에 따르면 중국불교가 무세운 기세로 흥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중국불교의 특징은 거사중심불교라 합니다. 이는 대만의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불교와 대비됩니다. 대륙에서 거사불교가 강세를 보인 것은 청말민국초에 일부 선각자들의 영향이 큰 것이라 합니다. 이런 영향이어서인지 거사들을 중심으로 한 소모임이 많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사라는 말은 중국에서 통용되는 용어로서 우리와 다르게 수행하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지칭하는 말입니다.

 

소규모 공부모임은 전세계적 현상인 것 같습니다. 미국 LA 등 대도시에는 소규모모임이 수 백군데라 합니다. 절을 갖지 않고 사무실이나 가정, 등 모일 수 있는 공간에서 모여서 경전을 독송하고, 가르침을 토론하고, 좌선 등 수행하는 모임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수 많은 신심 있는 재가자들의 자발적 모임에 대하여 거사림(居士林)’이라 합니다.

 

한국에도 자발적 공부모임이 많이 있습니다. 스님을 모시고 절에서 모임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재가자들끼리 갖는 모임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경전독송모임이 늘어나는 추세라 합니다. 부처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완역 되었기 때문에 이를 읽고 토론하는 형식을 말합니다. 오로지 금강경 하나에 의지하여 독송하고 외우는 식에서 서서히 탈피 하는 듯 보입니다.

 

니까야강독모임

 

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니까야강독모임입니다. 전재성박사의 사무실에서 열리는 모임입니다. 전재성박사의 후원자들을 위한 모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잡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나 뜻만 있으면 참석할 수 있습니다. 가치를 아는 자들에게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3월 두 번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몇 번 진행되다 보니 이제 멤버가 고착화 되는 듯 합니다. 늘 갈 때 마다 얼굴이 바뀐다면 일관성이 없을 것입니다. 가치를 아는 자들은 아무리 바빠도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인원이 너무 많아도 문제가 됩니다. 마치 강연식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인원의 경우 숨소리 까지 들릴 정도가 되기 때문에 집중할 수 있고 또한 궁금한 것을 그 자리에서 물어 볼 수 있기 때문에 큰 이점이 있습니다.

 

저녁 7시에 시작되는 모임에 미리 도착합니다. 30분 전에 도착하면 전재성박사와 이런 저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습니다. 막상 강독모임이 시작 되면 거의 두 시간 동안 쉼없이 전재성박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개인사 등을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전철을 타고 귀가합니다. 삼송역까지 약 10분 정도 걸리는데 법우님들과 이야기하면서 걷다 보면 금방 도착합니다. 더구나 그 시간에 전철을 타면 앉아서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갈아 타는 종로3가 역까지 이야기 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차로 이동한다면 이런 즐거움은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부정상(不淨相: asubha saññā)에 대하여

 

3 24일 금요일 저녁 전재성박사의 니까야 강독모임은 여법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예경문과 빤짜실라(오계)를 빠알리어로 독송하고, ‘자애의 경을 우리말로 독송했습니다. 예불이 끝나면 약 20분간 명상시간을 갖습니다. 모임이 끝나면 축복의 경을 낭송합니다.

 

교재는 생활속의 명상수행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엔솔로지입니다. 수 천개의 경에서 핵심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날 독송한 것은 부정의 인상의 경(A1.16)’입니다. 교재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라 되어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부정의 인상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제거하는 다른 하나의 원리를 보지 못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부정에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제거한다.”(A1.16)

 

 

 

不淨觀與白骨觀的修法

 

 

교재가 있지만 진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날 독송한 것은 짤막한 경 두 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경에서 부정의 인상이라 했는데 이는 부정상(不淨相)’을 말합니다. 이 부정상 하나를 설명하는데 두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전 강독모임에서는 오계의 학습계율을 설명하는데 두 시간을 보내서 진도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궁극의 뿌리를 뽑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정상에 대하여 뿌리를 뽑아 버리듯 설명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열 가지 부정상(dasa asubha)’이 있습니다. 이를 나열하면 1) 부풀어 오른 시체에 대한 지각, 2)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3)고름이 가득 찬 시체에 대한 지각, 4)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5) 동물이 먹고 남은 시체에 대한 지각, 6)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7) 살해 되어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8) 피로 물든 시체에 대한 지각, 9)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10) 해골과 뼈만 남은 시체에 대한 지각 입니다.

 

애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십부정상은 열 가지 시체에 대하여 명상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항을 보면 부풀어 오른 시체에 대한 지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는 ‘vinīlakasaññā입니다. 이를 한자어로 팽창상(膨脹想)’이라 합니다. ()이라는 말이 빠알리어로 산냐(saññā)입니다.

 

산냐는 이미지나 개념을 말합니다. 부풀어 오른 사체를 보고서 이를 마음속에 이미지로 각인 시켜 명상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세한 방법은 청정도론 제2장 두타행에서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런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표현 했습니다.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자는

죽음을 수관하기 때문에

잠잘 때 조차도 방일함의 허물이

그에게 닿지 않으리.

그가 많은 시체들을 볼 때

마음은 애욕에서 벗어난다.”(Vism.2.68, 대림스님역)

 

 

시체를 보고 죽음의 명상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애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경에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제거하는”(A1.16)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열 가지 시체를 보면서 그 시체를 떠올려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고자하는 것입니다.

 

염처경에서

 

십부정상은 염처경에도 있습니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수행의 교과서라 볼 수 있는 염처경 또는 대념처경에서 신념처에 대한 것입니다. 염처경에 실려 있는 십부정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묘지에 던져서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나흘이 지나 부풀어 오르고 푸르게 멍들고 고름이 흘러나오는 시체를 보듯, 이 몸을 이와 같이 이 몸도 이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이와 같은 운명을 벗어 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관찰한다.”(M10, 전재성님역)

 

 

부정상을 하는 이유는 이 몸을 시체보듯하라는 말입니다. 이 몸이 영원히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죽으면 부풀어 오르고, 구더기가 기어 나오는 시체처럼 될 것이라고 늘 지각(saññ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각했을 때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M10) 라 했습니다.

 

은폐된 죽음

 

현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정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대 인도에서는 죽음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공동묘지에 가면 묻지도 않은 시체가 널 부러져 있어서 그곳을 수행처로 삼아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비록 죽음이 은폐되어 있는 세상이긴 하지만 십부정상은 사념처수행 중에서 몸에 대한 사띠를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수행방법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죽음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불교인들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부처님이 열 가지 역겨운 시체의 형상을 지각하며 명상하라고 했지만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라 합니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십자가도 일종의 부정상이라는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도 일종의 부정상(不淨想)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가 크게 번성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 종교인구 총조저사에서 개신교는 불교를 제치고 1위에 올라 섰습니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불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데드크로스가 발생한 것이고, 개신교 입장에서는 골든크로스가 발생한 것입니다.

 

주식에서 추세선을 보면 그 힘에 의하여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당분간 불교는 침체를 면치 못할 것이고, 개신교는 상승세를 탓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불교가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한 인구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에서 득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독교가 득세 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놀랍게도 십자가영향도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 못박혀 피를 흘리는 비참한 모습을 보면 쳐다 보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늘 십자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불상과 비교됩니다.

 

불상은 늘 자애로운 모습입니다. 또한 명상하는 불상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는 것처럼 비참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끔찍한 십자가 형상과 늘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념처에서 보는 부정상과 같은 것이라 합니다. 아마 부처님 당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가 있었다면 십자가가 추가 되어 십일부정상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부정관에 따르면 십자가도 일종의 부정상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인들에게는 대속의 의미가 있지만, 불교수행적 측면으로 볼 때는 부정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처한 최악의 상황을 늘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부정상은 나도 죽어 시체가 될 수 있음을 늘 상기하는 것입니다. 시체가 되어  부풀어 오르고, 짐승이 파먹고, 찟져지고, 구더기가 나온다는 것을 늘 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은폐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부정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염처경 등 경전에서 문구로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비참한 십자가 형상을 보면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늘 새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정상 명상이 됨을 말합니다.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교리나 신행방법을 보고서 우월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기독교가 만만한 종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득세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말합니다.

 

극락조의 노래

 

사람들은 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에 대하여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고, 죽어서 이상향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합니다.

 

불교에 극락이 있습니다. 죽어서 그곳에 가면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세계라 합니다. 또한 그곳은 깨끗하고 빛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세계입니다. , , , 정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상락아정을 동경하고, 늘 상락아정만을 얘기한다면 매우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항상 무상, , 무아로 세상을 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극락에 가면 극락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극락조가 울 때 무상, , 무아를 노래한다고 합니다. 아미타경에 단 한줄 있는 내용이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놓친다고 합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아름답고 영원한 것만 보여 주는 것은 사이비종교의 특징이라 했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현상이 변하고,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무상, , 무아의 가르침을 알려 주지 않는 것입니다.

 

부정(不淨)의 가르침

 

부처님은 무상(無常), (), 무아(無我), 부정(不淨)의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특히 무상, , 무아에 대하여 진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삼법인이라 합니다. 공문서에 직인을 찍으면 효력이 발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제행무상과 일체개고와 제법무아라는  세 가지 법의 도장(三法印)은 부처님의 가르침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 것이 부정(不淨)의 가르침입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부정관 하나만으로 도 책을 하나 쓸 수 있을 정도라 합니다. 그런 부정관은 현실을 속이는 것에 대한 바른 처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현실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고, 더러운 것임에도, 현실은 거꾸로 항상하고 즐거운 것이고 실체가 있는 것이고 깨끗한 것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전도된 인식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설법한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방대한 빠알리니까야에 녹아 들어 있음을 말합니다.

 

즐거움에 마취된 삶

 

사람들은 위험에 처해 보기 전에는 부처님이 설한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지금 건강한 몸을 가진 상태에서 부정상이나 죽음의 명상을 쉽게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마치 마취된 자처럼 즐기기에 바쁜 삶을 살아 갑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난디라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S56.11) 라 했습니다. 이 말은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Seyyathāpi, gahapati, makkhikāna kājena vā piakena vā harīyamānāna na eva hoti – ‘ ida amhāka niccanti vā dhuvanti vā sassata ’ nti vā, api ca yattha yattheva tā [yā (ka.)] makkhikā abhinivisanti tattha tattheva tā makkhikā abhiramanti;

 

“이를 테면, 파리들이 막대나 바구니로 옮겨질 때에 ‘우리의 삶은 항상하거나 견고하거나 영원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 파리들은 어디에 머물든지 그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M127, 전재성님역)

 

 

우리의 삶이 어쩌면 파리떼인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입니다. 단지 즐거움만을 위해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즐거움은 기쁨, 안락, 행복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아무생각 없이 사는 파리에게 상락아정이라든가 무상고무아부정에 대한 인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곳 저곳 어디에 머물든지 기쁨(abhinivisati)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내가 왜 죽어야해?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즐길거리를 찾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죽음을 잊어버리고 회피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오고야 맙니다. 모임에 참석한 도현스님은 전재성박사의 부정상 이야기를 듣고 말기암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현스님은 말기암 환자들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호스피스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스님에 따르면 말기암 환자들은 무엇엔가 강력하게 의지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스님이 환자의 손을 잡아 주면 놓지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 했습니다.

 

말기암 환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두려운 대상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기암 환자는 내가 왜 죽어야해?라며 몹시 억울해 한다고 합니다. 암에 걸려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 대한 집착은 80먹은 노인도 예외가 아니라고 합니다.

 

말기암 환자들을 어떻게 대하야 할까요?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인하여 몸부림 치는 듯한 모습을 볼 때 적절하게 할 말을 찾지 못한다고 합니다. 다만 두 손을 잡아 주고, 주물러 주고 할 뿐이라 합니다.

 

환자들은 대게 몸이 병들어 마음까지 병들어 이중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적절하게 해줄 말은 없을까요? 전재성박사는 몸은 병들어도 마음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는 부처님 말씀을 알려 주라고 합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나꿀리삐따에게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나의 몸은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S22.1)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중병에 걸렸을 때 마음마저 무너진다고 합니다. 신체적인 고통이 마음까지 지배하여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별개로 하여 나의 몸은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소 수행을 하지 않으면 대게 육체적고통이라는 제1의 화살을 맞고, 이어서 정신적 고통이라는 제2화살을 맞게 됩니다.

 

현실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현실은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등이 우리를 마취 시키고 있습니다. TV를 켜면 온통 먹방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죽음을 은폐시킵니다.

 

장례식장에 가도 죽음을 보기 힘듭니다. 죽음은 머리 속에나 있는 것이고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니 일부로 생각하지 않거나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운명의 그날은 오고야 맙니다.

 

말기암 환자들이 내가 왜 죽어야 해!”라며 억울해 하는 것은 죽음을 수용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써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분노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한평생 욕망과 분노로 살아 온 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매우 불쾌한 것이라 봅니다.

 

부처님은 애욕 등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 나게 하기 위하여 십부정상을 말씀 했습니다. 감각적 욕망으로 살게 되면 틀림 없이 재생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보라고 했습니다. 은폐되고 마취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 가지 죽음의 명상을 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것도 간절히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절히 했을 때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연민심으로

 

수행은 간절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목숨을 걸 정도로 간절하게 했을 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 합니다. 부정상 수행을 하는 것도 간절히 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득세하는 것도 일종의 부정상이라 볼 수 있는 십자가를 보고 간절한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이라 합니다.

 

고행을 해도 간절히 하는 것이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고행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십부정상 수행도 간절히 하는 것이라 합니다. 설령 그가 깨달은 자라도 부정관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감각에 속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는 아라한이라도 학습계율을 받아 지니는 것과 같습니다.

 

감각기관에 속기 때문에 부정관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최악의 상황에서 보는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비로서 다른 세계가 열릴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기록된 것이 초기경전이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기록은 고통의 기록이라 했습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책은 고통에 대한 기록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연민심을 가지고 책을 열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연민심 없이는 지성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간절하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수행을 해야 세상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궁극의 경지에까지 이른 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했듯이, 지금 여기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자들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연민심을 가졌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2017-03-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