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앙굿따라니까야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 생활속의 명상수행

담마다사 이병욱 2017. 2. 25. 11:28

 

앙굿따라니까야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 생활속의 명상수행

 

 

불금이라 합니다. ‘불타는 금요일의 약자입니다. 아마 젊은 층에서 시작된 말이라 봅니다. 금요일 저녁 부담 없이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춤추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주오일제가 정착되어 가는 요즘 금요일이 이제 주말입니다.

 

불금날에

 

불금날 삼송테크노밸리로 향했습니다.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한달에 두 번 있는 모임으로 이번이 두 번째 모임입니다. 저녁 7시에 시작하므로 사무실이 있는 안양에서 4시 반에 여유 있게 출발했습니다.

 

강독모임 가는 날에는 전철을 이용합니다. 명학역에서 구파발역까지는 1시간 20분 가량 걸립니다. 2번 출구에서 버스를 타면 세 정거장 거리에 거대한 규모의 삼송테크노밸리 바로 앞에 이릅니다.

 

30분 여유있게 도착했습니다. 3층에 있는 창고형사무실에 문을 열고 들어 가니 컴컴합니다. 불이 꺼져 있습니다. 저 멀리 어둠속에서 전재성박사님이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아마 명상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독하기 전에 약 20분간 입정하는데 불을 소등하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명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재성박사의 모습은 도인을 연상케 합니다. 백발에 허연 수염을 길게 길러서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더구나 눈은 형형해서 외모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전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전재성박사는 70년대 함석헌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공부모임이 있었는데 막내에 해당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전재성박사의 외모를 보면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사진으로 본 함석헌 선생을 떠 오르게 합니다.

 

창고형사무실에서

 

창고형사무실은 넓고 높습니다. 전재성박사가 타고 다니는 RV차량이 창고안에 주차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2층 구조의 창고형사무실에는 책으로 가득합니다. 출간된 책들이 팔레트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한켠에는 책상이 있어서 번역하는 공간으로 사용됩니다. 작은 주방이 있어서 차를 끓일 수 있습니다. 이날 준비한 차는 감잎차입니다. 큰 주전자에 감잎을 넣고 끓인 것입니다. 머그잔이 여러 개 준비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자리에 위치해 놓았습니다.

 

7시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했습니다. 첫 번째 모임에 참석했던 C법우님이 가장먼저 도착했습니다. 법우님은 재작년 모친상이 있었을 때 오셨습니다. 단지 블로그 글을 통한 인연입니다. 알음알이로 찾아 온 것입니다. C법우님은 강독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가게 문을 일찍닫고 왔다고 합니다. 보통 저녁 9시에 문을 닫는데 강독모임이 있는 날에는 일찍 문을 닫고 지하철을 타고 먼거리에서 온 것입니다.

 

블로그 지인 H님이 오셨습니다. 메일로 소통한 바도 있는 법우님입니다. 그리고 작년 9월 도이법사의 위빠사나강좌 첫날에 뵌 분입니다. 멀리 분당에서 오셨습니다. 강독모임과 관련하여 인연있는 법우님들에게도 알렸습니다. 메일을 주신 법우님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몇 분이 반응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마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습니다.

 

모임에는 스님과 스님의 신도분들도 있습니다. 모임에 스님이 한분 앉아 있다는 것이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도현스님입니다. BBS불교방송에서 무명을 밝히고프로를 약 10년 진행했다고 합니다. 현재 말기암환자 등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행한 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강독모임은 여법하게

 

강독모임은 여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예경지송을 의식집으로 사용했습니다. ‘뿝바바가 나막까라 빠따라 하여 나모땃사 바가봐또 아라하또 쌈마쌈붓닷사로 시작되는 예경서문을 낭독했습니다. 다음으로 띠 싸라나 가마나라 하여 붓당 싸라낭 갓차미로 시작되는 삼귀의문을 낭독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빤짜씰라라 하여 빠나 아띠빠따 붸라마니로 시작되는 오계서약을 낭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애의 경을 우리말 번역된 것으로 낭독했습니다.

 

전재성박사님 설명에 따르면 자애의 경은 빠알리삼장 중에 완벽한 문헌이라 했습니다. 이를 심장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마치 반야심경을 대하는 듯합니다. 법회때 마다 빠짐 없이 독송되는 반야심경에 대하여 줄여서 심경(心經)’이라 하는데, 여기서 심자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심장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빠알리경전에서 자애의 경에 대하여 심장과도 같은 경이라 하는 것을 보니 자애의 경이 반야심경 위치와 동등한 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임이 끝날 때는 축복의 경낭독하는 것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20분간 입정하고

 

예경문 낭독이 끝나고 입정했습니다. 시작을 알릴 때는 마치 발우처럼 생긴 금속물질의 종을 쳤습니다. 금속봉으로 종을 치자 소리가 파동을 내며 길게 울려 퍼집니다. 입정할 때는 불을 껐습니다. 마치 산속에 온 것 같습니다. 넓고 높은 창고형 사무실이 마치 심산유곡의 산사에 온 것처럼 적막에 쌓였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약 20분간 입정했습니다.

 

법회를 시작할 때 잠시 입정하는 것이 관행입니다. 대게 이삼분이 고작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잠시 눈을 감았다는 것은 산란된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20분간 입정했다는 것은 마음을 가라 앉혀 주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20분 정도시간이면 니밋따를 볼 수 있는 시간이라도 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배운대로 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법구경에 따르면 선정에서 지혜가 나온다고 합니다. 산란한 마음에서 지혜가 나올 수 없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자 할 때는 골방으로 들어가 좌선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애플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하던 방식이라 합니다. 강독에 들어가기 전에 20분 동안 충분히 마음을 정화 시켰을 때 맑고 산뜻한 마음이 된 듯합니다.

 

생활속의 명상수행

 

강독에 사용되는 교재는 생활속의 명상수행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엔솔로지입니다. 11권에 달하는 방대한 앙굿따라니까야를 한권으로 축약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책의 부제가 한 권으로 읽는 앙굿따라니까야입니다.

 

 

 

 

 

 

 

전재성박사는 먼저 앙굿따라니까야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총 3,573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확장하면 8,497경이라 합니다. 확장한다는 의미는 반복문구가 생략된 것을 복원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 천개의 경에서 핵심이 되는 250개의 경으로 이루어진 것이 한권으로 읽는 앙굿따라니까야 생활속의 명상수행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합본(合本)화 작업

 

앙굿따라니까야는 재가자를 위한 경의 성격이 짙다고 합니다. 사부니까야 중에서 후대에 성립된 것인데 교육용으로 편집된 것이라 합니다. 이는 법수에 따라 편집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11개의 법수로 9권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합본화 작업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3000여 페이지 달할 것이라 합니다. 마치 바이블과 같은 형태라 하는데 이미 상윳따니까야를 합본한 바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합본의 경우 2800페이지에 달하는데 종이 두께가 매우 얇고 2단 배열되어 있습니다. 마치 바이블처럼 금박을 하고 가죽케이스로 하여 7권에 달하는 방대한 상윳따니까야를 한권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9권에 달하는 앙굿따라니까야를 3000 페이지로 합본화 작업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가 합본화되면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사부니까야는 모두 합본화 됩니다.

 

결집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강독 시작에 앞서 결집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역사적으로 6 번의 결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중 5차와 6차 결집은 미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1결집은 부처님이 열반했을 때 칠엽굴에 모여서 경과 율을 낭송한 것이 최초입니다. 구전으로 전승된 것에 대하여 정법과 비법을 구분하고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후 부처님 사후 100년이 지난 시점에 제2결집이 있었고, 아소까대왕 당시 기원전 3세기에 제3결집이 있었습니다. 4결집은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에서 있었습니다.

 

4결집 이후에 구전으로 전승된 가르침 최초로 문자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자화 된 것 보다는 구전이 더 정확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장음처리 같은 것입니다. 구전의 경우 장음 처리가 잘될 수 있지만 문자화 되면 놓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같은 단어라도 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외어서 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원래 가르침은 외워서 전하는 것이 원칙이라 합니다. 옛날 성직자들은 가르침을 문자화 하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천박하게보았다고 합니다. 문자라는 것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상인들이 을 기록해 놓는다든가 죄수들의 형량을 기록해 놓는 등 필요에 따라 문자가 활용되었는데 가르침을 문자화 한다는 것은 부처님당시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빠알리니까야는 역사적 사실

 

인도문화전통에서 최초로 문자화 된 것이 불경이라 합니다.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에서 4차 결집의 산물로 봅니다. 이후 바라문교 계통의 리그베다 등이 문자화가 뒤따랐다고 합니다. 바라문교의 삼베다 등 모든 문헌은 외워서 전승된 것들입니다.

 

문자화된 빠알리니까야에는 역사적 사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화로 이루어져 있는 라마야나 등의 바라문계통의 성전과는 다른 것입니다. 니까야에 등장하는 수 많은 왕들과 왕비와 왕자와 대신들의 이야기, 그리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 합니다.

 

빠알리니까야와 빠알리위나야를 읽어 보면 그때 당시 풍속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외워서 전승되어 왔기 때문에 그때 당시 생활상을 연구하는 학술서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승되어 오는 과정에서 생략된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내용은 똑같고 다만 주제와 장소가 다른 것은 생략된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를 예로 든다면 현재 전승된 것은 3,573경이지만, 이를 확장하면 8,497경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반복되는 경을 생략한 것입니다.

 

제가 복원한 것은 제7차결집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생략된 경을 모두 복원했다고 합니다. 이런 작업은 세계최초라 합니다. 사부니까야를 모두 복원한 것을 말합니다. 맛지마니까야의 경우 1910년 독일에서 노이만에 의하여 최초로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전재성박사가 두 번째라 합니다. 그러나 사부니까야를 복원하여 확장한 것은 전재성박사가 세계최초의 일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제가 복원한 것은 제7차결집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이제까지 불교역사상 6차결집이 있었습니다. 부처님 사후 칠엽굴에서 1차결집, 부처님 사후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바이샬리에서 2차 결집, 아소까대왕 당시 BC247년경에 파탈리푸트라에서 3차결집, 그리고 스리랑카 알루비하라에서 기원전 80-94년 경에 4차결집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5차와 6차결집은 어떤 것일까요? 위키백과에 따르면 5차 결집은 1868년에서 1871년 사이에 부처님 탄신 2400주년을 맞이하여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열렸다고 합니다. 6차결집은 부처님 탄신 2500주년을 맞이하여 1954년에서 1956년 사이에 미얀마 랑군에서 열렸다고 합니다.

 

빠알리삼장에 대한 결집의 역사를 보면 칠엽굴, 바이샬리, 빠딸리뿌뜨라, 알루비하라, 만달레이, 랑군 순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빠알리삼장이 인도에서 시작하여 스리랑카를 거쳐 최종적으로 미얀마에서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전세계적으로 미얀마6차결집본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빠알리니까야는 PTS본과 미얀마본, 싱할리본 등 많은 판본이 있습니다. 페이지를 매길 때는 PTS본에 따릅니다. 번역서를 보면 중간에 대괄호로 숫자가 매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PTS본의 페이지를 표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얀마본이 가장 나중에 결집되었기 때문에 미얀마본을 기본으로 합니다. 하지만 미얀마본은 알파벳이 아닌 미얀마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나이화 되어 있는 PTS본이 가장 많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PTS‘Pali Text Society’의 약자입니다. ‘빠알리성전협회라 번역됩니다. 한국에서도 협회가 있는데 이를 한국빠알리성전협회라 합니다. 전재성박사가 회장으로 있습니다.

 

PTS는 영국옥스포드에서 학자들이 모여 모임을 결성한 단체로 역사가 150년 가량 됩니다. 전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온갖 필사본을 모아 로마나이즈(Romanized)’화여 배열하고 교정한 것이 PTS본입니다. 그러나 통용 되는 대장경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수 많은 판본이 있는데 필사 하는 과정에서 놓친 것도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를 졸다가 한줄 빼 먹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나뭇잎파리에 철필로 긁어 문자화 시키는 과정에서 깜박 졸다가 한줄 놓쳤을 때 문맥이 맞지 않을 것입니다. 나뭇잎파리는 수명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때 되면 사경을 해서 보존해야 랍니다. 그 과정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빠알리 필사본은 한역이나 티벳본 등과 비교하여 비교적 정확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빠알리 대장경에 대하여 외국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크리스탈처럼 맑다.”라고 했습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용입니다.

 

누구나 알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전승한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다른 필사본, 예를 들어 한역의 경우 난해하고 심지어 심오해 보이는 것은 번역의 문제라 보고 있습니다. 더구나 한줄이 빠졌을 때 문맥이 맞지 않아 난해한 것을 넘어 심오해 보이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아마 금강경이 좋은 예가 같습니다.

 

구마라습이 금강경을 번역할 때 한줄을 빼 먹었습니다. 그것은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게송부분입니다. 원래는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疲識不能知’는 라는 구절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S22:87)”라는 문구와 일치합니다. 이렇게 한줄이 빠지다 보니 난해하다 못해 심오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는 빠짐 없이 전승되어 왔기 때문에 크리스탈처럼 투명하다.”라고 합니다.

 

전재성박사는 빠알리니까야 전승과정에 대하여 길게 설명했습니다. 빠알리니까야는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전승해 온 것이며 또한 문자화 한 것은 유리알 처럼 맑고 투명한 것이라 했습니다. 유럽학자 들의 노고로 인하여 PTS본이 만들어지게 되었지만 미얀마6차 결집본이 대체로 완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복문구에 대해서는 생략된 채로 전승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세계최초로 사부니까야를 복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장경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입니다.”라 했고, 또한 제가 복원한 것은 제7차결집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삼장 제7차결집은 서울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한사람의 노력에 따른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빠알리니까야 결집에 대한 긴 설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강독에 들어 갔습니다.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첫 번째 경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1장 제1절이라 볼 수 있는 앙굿따라 첫번째 모음 1경은 놀랍게도 여자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번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나는 여자의 형상처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른 하나의 형상을 보지 못했다.”(A1.1) 로 시작됩니다. ‘여자의 경입니다.

 

오욕락에 사로 잡히면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여자의 형상, 소리, 냄새, , 감촉에 사로 잡히면 욕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남자의 경에서는 정반대로 남자의 형상, 소리, 냄새, , 감촉에 빠지면 역시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부끄러움(hiri)과 창피함(ottappa)으로 설명합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고 합니다. 전재성박사는 우주를 지탱하는 기둥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들이 죽을 때 눈을 감으면 우주가 파괴되는 것처럼,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을 모른다면 우주가 무너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도덕적 붕괴를 뜻합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무너졌을 때 인간의 사회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짐승의 사회가 됨을 말합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이띠붓다까에서는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을 것”(It.36) 이라 했습니다.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배우자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우주를 지탱하는 기둥같다고 했습니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이 무너집니다. 도덕이 무너지면 우주가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일번경에 여자의 경을 배치한 것은 모럴과 관계가 있습니다. 재가자의 삶과 관계가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재가자들을 위하여 법수별로 편집한 것인데 교육적 성격이 짙은 경전입니다. 일번경에 오욕락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감각적 쾌락에서 오는 위험과 재난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앙굿따라니까야가 주는 주요한 메시지라 합니다.

 

하나라도 놓치기 아쉬워서

 

2월 넷째주 금요일에 열린 전재성박사의 니까야 강독모임에서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 7시반부터 시작해서 9시 반까지 두 시간 동안 전재성박사의 밀도 있는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하나라도 놓치기 아쉬워서 메모했습니다. 쓰다보니 9장입니다.

 

 

 

 

 

 

 

옆에 있는 법우님은 박사님의 양해 하에 녹음을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받아 적습니다. 모두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입니다. 질문은 대게 1분 이내로 짧게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잘 경청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말이 있듯이, 사부니까야를 완역한 번역자에서 나온 한마디한마디의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인 2주 전 첫번째 모임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2전 전 모임에서 전재성박사는 자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소라고동불듯이 자비의 마음을 내라라고 지나가는 식으로 말 했습니다. 이 말을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소라고동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소라고동소리의 경(S42.8)’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수경 신묘장구대다라니에 상카섭나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상카가 소라고동을 말합니다. 소라고동 불듯이 자애의 마음을 우주 가득히 닦으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 즉 자심해탈(慈心解脫)을 이룰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여법하게 진행된 빠알리니까야 강독은 밀도 있게 진행됐습니다. 마치 고요한 산사와 같은 분위기에서 사부니까야와 율장 등을 완역한 번역자의 한마디한마디는 새겨들을만한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원음을 모두 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금남 가게문을 일찍 닫고 참석하신 법우님, 먼 길을 마다 하지 않고 오신 법우님 등 청정한 법우님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자비로 세상에 봉사하는 스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신 박사님에게 감사드립니다.

 

 

 

2017-02-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