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일체의 괴로움을 아는 자만이 열반을 본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4. 18. 12:03

 

일체의 괴로움을 아는 자만이 열반을 본다

 

 

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게송(Mahajayamagalagāthā)

 

4월 14일 니까야 강독모임에서는 평소와 다르게 빠알리 예경문 음악을 들었습니다. 전재성박사가 편역한 예경지송 수호경전품에 있는 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게송(Mahajayamagalagāthā)’입니다.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것을 들려 준 것입니다. 들어 보니 마치 카톨릭 그레고리안성가 분위기와 유사합니다. 유튜브에서 검색한 사이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Maha Jayamangala Gatha by Bhante Devananda of Indiana Buddhist Temple

 

 

예경지송 수호경전품에는 보배경, 자애경, 축복경 등 모두 16개의 수호경이 들어 있습니다. 그 중에 15번째 경이 마하자야망갈라경으로서 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게송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자야망갈라가타와는 내용이 다릅니다. 니까야 이곳 저곳에서 좋은 구절을 뽑아 구성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예경지송 해제에서 후대에 중세시대에 헌신적인 불자시인이 삼보를 찬양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예경지송 43) 라고 설명했습니다. 삼보에 대한 찬탄과 삼보의 가피를 염원하는 가장 아름다운 게송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니까야강독시간에 들은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12분 분량의 길이입니다. 빠알리원문으로 낭송되는 수호경을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내용과 확인 하며 들었습니다. 마치 성가를 듣는 듯 합니다. 불교에도 이런 경건한 분위기의 성가가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절에서 하는 칠정례 역시 성가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삼보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게송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수 많은 예불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잘 알려진 것이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데, 특히 마하자야망갈라가타의 경우 원문을 발견할 수 없어서 노래를 듣고 녹취하여 빠알리어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마하자야망갈라가타를 옮겨 봅니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게송)

 

1.

모든 뭇삶의 요익을 위하시는

크나큰 연민의 수호자께서

모든 초월의 길을 이루시고

위없는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했사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

 

2.

보리수 아래서 승리하시어

싸끼야 족에게 환희를 가져다주었사오니

이처럼 제게(그대에게) 승리가 함께하여

승리의 축복을 성취하여지이다.

 

3.

부처님의 보배에 귀의하오니

하늘사람과 인간의

가장 위없고 가장 탁월한 약초

부처님의 위력있는 공덕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파괴되고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어지이다.

 

4.

가르침의 보배에 귀의하오니

타오르는 고통 식혀주는

가장 위없고 가장 탁월한 약초

위력있는 가르침의 공덕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파괴되고

모든 두려움이 소멸되어지이다.

 

5.

참모임의 보배에 귀의하오니

섬길 만하고 공양할 만한

가장 위없고 가장 탁월한 약초

참모임의 위력있는 공덕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파괴되고

모든 질병이 소멸되어지이다.

 

6.

세상 어떠한 종류의 보배이든지

엄청나게 많은 갖가지 것들이 있지만

부처님에 견줄 보배는 없사오니

제게(그대에게) 이 진실로 행복이 함께하여지이다.

 

7.

세상 어떠한 종류의 보배이든지

엄청나게 많은 갖가지 것들이 있지만

가르침에 견줄 보배는 없사오니

제게(그대에게) 이 진실로 행복이 함께하여지이다.

 

8.

세상 어떠한 종류의 보배이든지

엄청나게 많은 갖가지 것들이 있지만

참모임에 견줄 보배는 없사오니

제게(그대에게) 이 진실로 행복이 함께하여지이다.

 

9.

제게 다른 귀의처 없고

부처님이 저의 위없는 귀의처이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

 

10.

제게 다른 귀의처 없고

가르침이 저의 위없는 귀의처이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

 

11.

제게 다른 귀의처 없고

참모임이 저의 위없는 귀의처이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

 

12.

모든 재앙 진압되고

모든 질병 소멸되고

모든 장애 사라지어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

 

13.

모든 축복이 함께하고

모든 하늘사람들이 수호하소서.

부처님의 모든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언제나 평안이 함께하여지이다.

 

14.

모든 축복이 함께하고

모든 하늘사람들이 수호하소서.

가르침의 모든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언제나 평안이 함께하여지이다.

 

15.

모든 축복이 함께하고

모든 하늘사람들이 수호하소서.

참모임의 모든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언제나 평안이 함께하여지이다.

 

16.

별들과 야차들과 귀신들

악령들의 장애로부터

수호 게송의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제거되어지이다.

 

17.

별들과 야차들과 귀신들

악령들의 장애로부터

수호 게송의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제거되어지이다.

 

18.

별들과 야차들과 귀신들

악령들의 장애로부터

수호 게송의 가피의 힘으로

제게(그대에게) 모든 재앙이 제거되어지이다.

 

19.

하늘이나 땅위에 살고 있는

위신력을 지닌 신들과 용들께서는

이러한 공덕을 기뻐하여

영원토록 세상에서 가르침을 수호하소서.

 

20.

하늘이나 땅위에 살고 있는

위신력을 지닌 신들과 용들께서는

이러한 공덕을 기뻐하여

영원토록 세상에서 가르침을 수호하소서.

 

21.

하늘이나 땅위에 살고 있는

위신력을 지닌 신들과 용들께서는

이러한 공덕을 기뻐하여

영원토록 세상에서 가르침을 수호하소서.

 

 

모두 21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중복되는 게송도 있습니다. 마치 삼세번 하듯이 세 번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천수경 주문에서도 볼 수 있고, 반야심경 주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괴로움, 두려움, 질병이 파괴되고 소멸되기를 삼보에 기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물론 그대에게라 하여 특정인에게도 삼보의 가피가 함께 하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게송입니다.

 

하나의 잘 만든 콘텐츠는 신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신심 있는 불자가 만든 아름다운 게송은 출처가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게송이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왔다고 합니다. 알려진 것도 있고 소실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스리랑카 고주석이라 하여 붓다고사 이전에 전승되어 온 주석서에는 알려지지 않은 문헌이 많다고 합니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도 그런 것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으로 된 마하자야망갈라가타를 들으면 가톨릭성가가 연상됩니다. 그러나 불교가 가톨릭보다 역사가 더 오래 되었으므로 음악은 불교전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음악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목소리를 들으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것 같고, 목소리가 빛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분노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목소리가 어떻게 빛과 같을 수 있을까요? 아마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설법하면 목소리가 빛과 같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처님 목소리도 아름답긴 하지만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전승되어 온 빠알리니까야는 진리의 말씀이 담긴 것입니다. 어느 곳을 펼쳐 보아도 진리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비와 지혜의 말씀입니다. 이번 니까야 강독모임에서 낭송한 분노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Nāha bhikkhave añña ekadhammampi samanupassāmi yena anuppanno vā vyāpādo nuppajjati, uppanno vā vyāpādo pahīyati. Yathayida bhikkhave mettā cetovimutti. Metta bhikkhave cetovimutti yoniso manasikaroto anuppanno ceva vyāpādo nuppajjati, uppanno ca vyāpādo pahīyatīti.

 

수행승들이여, 나는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분노를 제거하는 다른 하나의 원리를 보지 못했다.

 

수행승들이여,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에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분노를 제거한다.”(A1.17, 전재성님역)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mettācetovimutti), 즉 자심해탈(慈心解脫)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도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자심해탈에 대하여 자애는 모든 뭇삶에 이익을 펼치는 것을 말하고 마음의 해탈은 다섯 가지 장애에 묶인 마음의 해탈을 의미한다.”(Mrp.I.47) 라 했습니다.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mettācetovimutti)

 

자심해탈은 자애와 마음의 해탈과 결합된 것입니다. 자애(mettā)는 분노에 반대되는 말로서 원수까지 포함하여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라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해탈, 즉 심해탈(cetovimutti)은 감각적 욕망,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경에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mettācetovimutti)은 자애의 마음을 가짐으로 인한 세 번째 선정과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함으로 얻는 해탈을 말합니다.

 

오장애 중의 하나인 분노는 자애의 마음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노는 부글부글 끓는 물로 비유됩니다. 이는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불에 달구어져 끓어오르고 거품을 일으켰다면”(S46.55) 라는 비유로 알 수 있습니다. 부글부글 끓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사람은 분노의 감정에 압도 되어 자신의 분노하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끓는 물이 멈추었을 때 비로소 얼굴이 비치듯이, 분노가 가라앉았을 때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때서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상황은 벌어진 것입니다. 마치 부부싸움 중에 격분하여 상대방을 폭행한 것과 같습니다.

 

폭행하여 상대방이 죽기라도 했다면 엎질러진 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노에 대하여 부글부글 끓는 물에 비유하면서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S46.55) 라 했습니다.

 

분노하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감각적 욕망에 빠진 자 역시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 즉 오장애를 가진 자들은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진 자에 대하여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든 물과 같다고 했고, 해태와 혼침에 대해서는 이끼가 낀 물과 같다고 했고, 흥분과 회환에 대해서는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과 같다고 했고, 의심에 대해서는 흐린 흙탕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세수대야에 오색물감이 뿌려 있다면 자신의 얼굴이 비치지 않을 것입니다. 부글부글 끊는 물, 이끼가 낀 물,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 흐린 흙탕물 역시 자신의 얼굴이 볼 수 없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나면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물감이 제거 되었을 때, 파도가 멈추었을 때, 흙탕물이 정화 되었을 때 비로소 얼굴이 비추이듯이, 마치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가 제거 되었을 때 본래의 마음이 보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yoniso manasikāra)’이라 했습니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을 빠알리어로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라 합니다. 여기서 빠일리어 ‘yoniso’‘wisely; properly; judiciously’의 뜻으로 지혜롭게또는 이치에 맞게라고 번역됩니다. 빠알리어 ‘manasikāra’'attention', 'mental advertence', 'reflection'의 뜻으로 주의또는 마음 기울임의 뜻입니다.

 

빠일리어 ‘yoniso manasikāra’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임이라 번역했습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의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잡도리하다는 말은 잘 쓰이지 않는 말로서 선방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빠일리어 ‘yoniso manasikāra’에 대하여 영어로는 'wise (or reasoned, methodical) attention' or 'wise reflection'.이라 합니다. 한자어로는 如理作意라 합니다. 빅쿠보디는 ‘attends carefully’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떻게 오장애를 극복할 것인가?

 

오장애를 가지고 있는 한 마음의 해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선정에 들면 가장 먼저 버려지는 것이 오장애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강독시간에 무상, , 무아로 관찰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무상, , 무아로 관찰 했을 때 지혜가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앙굿따라니까야 장애에 대한 제거품에 실려 있는 제거 방법에 대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부정의 인상에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제거한다.”(A1.16)

 

2) 분노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에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분노를 제거한다.”(A1.17

 

3) 해태와 혼침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시도의 세계, 추진의 세계, 용맹의 세계에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제거한다.”(A1.18)

 

4) 흥분과 회환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마음의 적멸에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흥분과 회환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흥분과 회환을 제거한다.”(A1.19)

 

5) 회의적 의심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회의적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회의적 의심을 제거한다.”(A1.20)

 

 

핵심가르침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yoniso manasikāra)’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현상을 무상, , 무아로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적 지혜라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장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멈춤(samatha)과 통찰(vipassana)입니다. 멈추면 보입니다. 마치 파도치는 물이 잔잔해지면 얼굴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얼굴이 비치면 있는 그대로 보이듯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무상, , 무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통찰이고 지혜입니다.

 

시도의 세계, 추진의 세계, 용맹의 세계

 

세 번째 항목에서 시도의 세계, 추진의 세계, 용맹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말은 ārambhadhātu nikkamadhātu parakkamadhātu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시도하는 단계는 시작의 단계의 노력을 뜻하고, 추진의 단계는 나태함을 버리고, 강하게 노력하는 세계를 말하고, 용맹의 단계는 목표에 가깝게 잡아 당기듯 강하게 노력하는 세계를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해태와 혼침은 게으름에 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특징으로 불만, 권태, 졸림, 포식에서 오는 침체 등으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밥 먹은 후에 졸림 현상이 발생한다면 해태와 혼침이 되기 쉽습니다. 이럴 경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경에서는 시도의 세계(ārambhadhātu), 추진의 세계(nikkamadhātu), 용맹의 세계(parakkamadhātu) 라 하여 점증적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세계(dhātu)’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부처님이 게으름을 극복하는 것에 대하여 세계를 뜻하는 다투(dhātu)라 한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게으름과의 전쟁을 스스로 선포하면서 이른 아침에 빠알리 게송을 외우기로 마음 먹었다면 이는 시도의 세계(ārambhadhātu)에 해당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늦잠 자지 않고 일찍 일어나 새벽시간 활용하기로 마음 먹은 것 자체가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마음 먹고 매일 지속한다면 이제 추진의 세계(nikkamadhātu)가 열리는 것입니다. 더욱 더 가열차게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면 그 다음 단계는 용맹의 세계(parakkamadhātu)입니다. 마침내 빠일리게송을 다 외었을 때 목표하는 바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몇 년 전 아침에 빠알리게송을 외웠습니다. 외운 게송으로 보배경, 자애경, 축복경, 초전법륜경 등이 있습니다. 10개 이상으로 되어 있는 빠알리 게송을 외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작이 반입니다. 일단 시작하면 언젠가는 다 외우게끔 되어 있습니다. 욕심내지 않고 하루에 한 게송씩 외우는 것입니다.

 

보배경(Ratanasutta)의 경우 17게송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루 한 게송씩 외우면 계산상으로 17일이면 됩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이전 게송을 다 외워야만 진도나가는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5번 게송을 외었다면 이전 1번부터 4번 게송 외운 것 확인하고 5번 게송 외우기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치 벽돌쌓기 하듯이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외우면 17번 째 게송 외기가 끝났을 때 1번부터 17번까지 모두 외우게 됩니다. 이와 같은 벽돌쌓기 방식으로 여러 개의 빠알리 경전을 외운 바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수행 했을 때

 

마음의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장애가 제거 되어야 합니다. 경에 따르면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이라 했습니다. ‘요니소 마나시까라입니다.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다름 아닌 멈춤과 통찰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호흡명상 해야 합니다.

 

호흡명상과 관련하여 전재성박사는 자신의 체험담을 곁들여 설명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수행 했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했습니다. 호흡에 집중했을 때 호흡이 느려지면서 호흡이 끊어질 때 새로운 세계로 들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도현스님도 마치 빨려 들어 가듯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체험담을 말 했습니다.

 

명상중에 경험하는 새로운 세계는 우리가 사는 욕망의 세계가 아닙니다. 호흡을 관찰하면서 호흡이 느려지고 마침내 호흡이 끊어 졌을 때, 빛의 세계 등 새로운 세계에 들어 가게 되는데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감각적 욕망, 분노, 들뜸 다섯 가지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들어 갈 수 없는 세계라 했습니다. 그래서 호흡은 다른 세계로 들어 가기 위한 통로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호흡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 갈 때 욕계에서 벗어나 색계나 무색계로 들어 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호흡은 다른 세계로 들어 가는 통로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거친몸이 사라지고 미세한 신체의 세계로 들어 가게 하는 것이 호흡입니다.”라 했습니다. 이 몸의 호흡을 통하여 미세한 신체의 세계, 즉 색계와 무색계로 들어 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세계는 욕망으로 들어 가는 세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들어 갈 수 있는 세계라 합니다.

 

부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

 

바이블에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 가기 보다 힘들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이 이집트에도 있습니다. 지난 2월 이집트 보물전에서 영혼을 심판하는 저울을 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영혼을 심판하는 저울, 이집트보물전을 보고(2017-02-1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죄의 유무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죽은 이는 자신의 심장을 저울에 올려 놓고 정의를 상징하는 깃털과 무게를 잽니다. 만약 죄가 많으면 심장이 무거워지게 되고, 심장은 괴물 아무트(Ammut)에게 먹히게 되어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죄가 없으면 깃털과 균형을 이루게 되어 영원한 삶을 얻게 됩니다.(영원한 삶을 얻기 위한 심판, 상영시간 1, 이집트 보물전에서)

 

 

깃털보다 가벼운 삶을 산 자는 영원한 삶이 보장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깃털처럼 가벼운 사람들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욕망으로 살아 가는 세계에서 악업이 선업 보다 더 많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부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이블에 부자낙타바늘구멍들어가기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멈출 줄 알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멈추지 못합니다. 수행중에 멈추어야 하나 멈추지 못하는 것은 죽을까봐 겁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놓고 죽을 수 없고, 처자식을 내버려 두고 죽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행중에 호흡이 느려지면서 마침내 호흡이 끊어 졌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죽을까봐 겁나기 때문이라 합니다. 세상에 미련이 있는 자, 세상에서 해야 할이 많은 자, 세상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들은 절대로 진리의 세계에 들어 가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진리를 얻으려면 죽기를 각오해야 하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진리는 얻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체의 괴로움을 아는 자만이 열반을 본다

 

스님들이 출가하면 절연한다고 합니다. 부모형제와도 인연 끊고 세상과도 인연 끊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의 자신은 죽고 출가로 인하여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같아 보이지만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이전의 나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형제와 인연이 끊어진다고 합니다.

 

수행의 길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을 때 수행자로서 삶을 살아 갑니다. 돈이나 재물, 애정 등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을 때 진리의 길로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이블에는 진리의 대가는 목숨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진리는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얻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괴로움을 아는 자만이 열반을 본다.”라 합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 나오는 말이라 합니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Ida dukkha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S56.1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알았을 때 진리의 눈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명지가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그런 괴로움은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뼈저리게 아는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S56.11)라고 아는 것을 말합니다.

 

고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한번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세 번 굴려서 알았습니다. 경에서는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Ida dukkha ariyasaccanti)’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dukkha ariyasacca pariññeyyanti)’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dukkha ariyasacca pariññātanti)라 하여 세 번 굴렸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진리의 눈이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도 똑같이 세 번 굴립니다. 모두 12번 굴린 것이 됩니다. 사성제에 대하여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하여 한자어로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라 합니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사성제를 각각 세 번 굴렸습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안 것입니다. 그결과 부처님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일체의 괴로움을 아는 자만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부처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가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상태에서는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는 출가의 경에서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는 것입니다.”(stn424)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진리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합니다.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stn44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죽기를 각오하고 수행했습니다. 악마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기로 한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수행하다 죽는 것이 나은 것임을 말합니다.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진리는 열림을 말합니다. 즐거운 것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절대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미련이 많은 자나 이 세상에 한이 많은 자는 절대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 재물욕, 명예, 즉 오욕락으로 살아 가는 자에게 진리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오욕락을 내려 놓았을 때 가능합니다. 그것도 목숨을 던져 버릴 정도가 되었을 때 진리의 문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설산동자의 투신설화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절벽에서 몸을 날린 설산동자

 

한국불교에 유명한 게송이 있습니다. 그것은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라는 게송입니다. 이 게송은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곧,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라는 내용입니다. 장례식장에서 무상게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이 게송은 빠알리 원전에서 유래합니다.

 

무상게에 대한 빠알리 원전은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S6.15) 라 되어 있습니다. 한문 게송과 내용은 같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한문 게송의 경우 생멸이 두 번 나오는데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빠알리 게송에서는 생멸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앞생멸에 대한 것은 ‘Uppādavayadhammino’이고, 뒷생멸은 ‘Uppajjitvā nirujjhanti’입니다. 앞생멸은 ‘현상’에 대한 것으로 제행무상에 대한 것이고, 뒷생멸은 ‘오온’에 대한 것으로 오온무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자로 된 게송은 모두 생멸이라 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오온의 생멸인지 불분명합니다.

 

설산동자의 투신설화를 보면 앞 게송 諸行無常 是生滅法을 듣고 감명했습니다. 나머지 게송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야차는 몸을 요구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 나머지 게송도 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설산동자는 기꺼이 절벽에서 몸을 날렸습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 죽음과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대가는 목숨이다.”라거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죽을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진리를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괴로움의 종극에 이른 자만이

 

죽을까봐 벌벌 떠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즐거움만 추구하는 자도 결코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괴로움의 종극에 이른 자, 괴로운에 대하여 뼈저리게 아는 자만이 진리를 이룰 수 있고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진리는 목숨을 버려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3-115, 전재성님역)

 

 

2017-04-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