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소라고동 불듯이 자비의 마음을 내어라

담마다사 이병욱 2017. 2. 11. 19:22

 

소라고동 불듯이 자비의 마음을 내어라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 합니다. 불교에 대하여 한마디로 정의 하는 말이 많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회자 되고 있는 말이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니까야강독모임

 

2 10일 저녁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이 있었습니다. 전재성박사의 서고가 있는 고양시 삼송역 부근에 있는 삼송테크노밸리입니다. 이날 처음으로 전재성박사를 오랫동안 후원하신 스님과 스님의 신도분들, 그리고 블로그 지인들과 재가단체지인이 모여서 강독모임이 열린 날입니다. 매달 두 번씩, 둘 째 주와 넷 째주 금요일 저녁에 열립니다.  

 

처음 가본 서고 현장은 독특합니다. 일반 공장형빌딩과 달리 복도에 차도가 있어서 차가 현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천정은 매우 높고 이층구조입니다. 생산품을 현장에서 실어 나르기에 적합하게 설계되어 있는 신개념 공장형빌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서고에는 발간된 책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번역할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서고겸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는 공간 한켠에 자리가 마련 되어 있습니다. 테이브를 미음()자 모양으로 만들어 자리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강독을 시작하기 전에 삼보예찬을 하고 15분 가량 입정을 했습니다. 이어서 축복의 경을 독송했습니다. 첫 날이어서 교재 없이 전재성박사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지혜와 자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유신견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진정한 불교입문이란?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유신견에서 벗어나야 불교에 입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불교에 입문한다는 것이 보살계를 받고 수계를 받는 것으로 시작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엄밀히 따진다면 진정한 불교입문은 유신견, 즉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타파 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유신견을 타파해야 할 수 있을 까요?

 

유신견을 빠알리어로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라 합니다. 영어로는 ‘heresy of individuality’라 하고 한자어로는 유신견(有身見)’이라 합니다. 빠알리어 sakkāya‘the existing body’를 뜻하므로 현존하는 신체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온을 말합니다.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20가지로 설명합니다. 다음과 같은 정형문으로 정형화 되어 있습니다.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그는 느낌을 자아로 여기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그는 지각을 자아로 여기고,

지각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그는 형성을 자아로 여기고,

형성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그는 의식을 자아로 여기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M109,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네 가지 형태로 다섯 가지 종류이어서 20가지 유신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을 몸으로 본다면 물질을 자아로 여긴다가 될 것입니다. 얼굴에 점이 생기거나 뽀드락지 하나 생겨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이어트를 하거나 미용시술을 하는 것도 신체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장하면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는 견해가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있는 열 가지 조건, 즉 열가지 족쇄 중에 가장 첫 번째로 타파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을 타파 해야 진정한 불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진정한 무상에 대한 자각

 

유신견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무상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철저한무상의 자각에 대해 말했습니다. 대충이 아닌 철저한 자각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정관으로 설명합니다. 시체가 썩어 가는 과정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시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공동묘지 등에서 시체가 썩어 문들어져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은 염처경(M10)이나 대념처경(D22)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무상에 대한 지각은 어설프게 알아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제행무상이라 합니다. 일체라는 말은 무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고와 무아에도 적용되어 일체개고, 제법무아라 합니다.  여기서 한자어 제와 일체는 모두 빠알리어 삽바(sabba)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 , 무아에 대하여 단순한 무상, , 무아가 아니라 전체를 무상, , 무아로 보아야 유신견에서 벗어 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제행무상에 대하여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Sabbe sakhārā dukkhā 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Dhp.278) 라고 정의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무상을 자각 합니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무상을 알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 노안이 생기고 흰머리가 되는 것을 보면 인생무상이라 합니다. 그러나 무상을 자각하는 자신은 변함 없는 자신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육체적으로 늙어 갈지지라도 마음만은 항상 나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이 나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을 가진 상태에서 무상을 자각해도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신견을 타파해야 진정한 무상을 자각하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적 지혜란?

 

육체는 늙어 가지만 마음만은 그대로라고 여긴다면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육체 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해야 유신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부만 무상을 자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두 무상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삼법인에서는 ‘all; every; whole; entire’를 뜻하는 삽바(sabba)를 붙여 Sabbe sakhārā aniccā(제행무상: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제행무상),  Sabbe sakhārā dukkhā(일체개고: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일체개고),  Sabbe dhammā anattā (제법무아: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 라 합니다.

 

일체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아는 것이 불교적 지혜빤냐(paññā)입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Sabbe dhammā anattā ti, yadā paññāya passati)”(Dhp277) 라는 정형구에서도 확인 됩니다. 무상 뿐만 아니라 고와 무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상에 대하여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모두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았을 때 비로소 지혜가 생겨나고 동시에 유신견이 타파됨을 말합니다.

 

불교에 대하여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 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항상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동시에 자비로운 자입니다. 지혜는 있지만 자비가 결여 되어 있다면 완전히 깨달은 자가 아닙니다. 마치 무상을 자각하는 자가 자신의 마음만은 변하지 않고 겉으로 확인 되는 육체의 변화만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분이 아닌 일체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을 안다면 이는 지혜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적 지혜일 것입니다.

 

생명이 있을 때

 

어느 것 하나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무너져 내려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 모릅니다. 엔트로피법칙(Entropy law), 열역학 제2의 법칙에 따르면 닫혀진 계 내에서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합니다. 새로 산 자동차는 매일매일 부식되며 사그러집니다. 저 바위산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저 하늘의 태양도 천문학적 시간이 지나면 불이 꺼질 것입니다. 차츰차츰 무너지다 보면 우주도 언젠가 붕괴됩니다. 물질로 되어 있는 것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엔트로피법칙의 적용을 받습니다. 제행무상입니다.

 

물질로 된 모든 것은 엔트로피법칙 적용을 받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생명은 엔트로피에 저항합니다. 물질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 본질이지만, 생명은 정반대로 조직화 하여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물질은 엔트로피의 영향을 받지만, 생명은 엔트로피에 저항하기 때문에 네겐트로피(Negentropy)’라 합니다.

 

생명만이 엔트로피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제행무상이라 하지만 생명이 있는 한 네겐트로피의 상태입니다.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무너져 가고 있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한 엔트로피에 저항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을 떄만 유효합니다. 엔트로피에 맞서 생명을 유지하지만 육체의 기능이 다하면 역시 무너져 내립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것 하나 엔트로피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제행무상입니다.

 

생명이 있을 때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일체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제행이 무상한 것을 알면, 일체가 괴로운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일체가 무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철저하게 알았을 때 가능합니다. 일체가 무상한 것임을 알고, 일체가 괴로운 것임을 알고, 일체가 무아인 것을 아는 지혜가 생겼을 때 비로서 자비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자비나 부분적인 자비가 아니라 무량한 자비입니다.

 

두루두루 가득 채워야

 

자비희사에 대하여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합니다. 여기서 무량이라는 말은 한정이 없음을 말합니다. 일체가 무상, , 무아임을 지혜로 본 자에게 자애와 연민과 기쁨과 평정의 마음은 한량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량심이라 합니다.

 

사무량심 빠알리어로 ‘catasso appamaññā라 합니다. 이 용어는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D33)’에 경전적 근거가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사무량심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

 

그는 연민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연민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연민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연민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연민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연민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

 

그는 기쁨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기쁨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기쁨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기쁨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기쁨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기쁨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

 

그는 평정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평정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정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 (M40, 전재성님역)

 

 

사무량심 정형구를 보면 가득 채운다라 되어 있습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빈틈 없이 채운다는 뜻입니다. 이는 일체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보는 것과 일치 합니다. 일체를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무한편만, 한정편만, 방향편만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자비를 예로 들면 전재성박사의 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무한편만(anodhisopharaa)의 자비는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모든 중생들, 모든 생명체들 또는 모든 존재들에게 원한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근심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행복할지어다.’라고 자비심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한정편만(odhisopharaa)의 자비는 대상을 한정해서, 모든 여성들, 모든 남성들, 모든 성자들 등에게 위와 동일하게 자비심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방향편만(dhisopharaa)의 자비는 시방의 각방향으로 자비심을 확산시키는 것으로 동방의 모든 유정, 서방-남방-북방의 어떤 특정한 사람 등에 위와 동일하게 자비심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전재성님, 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 55)

 

 

편만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pharaa’입니다. 이 말은 ‘pervading; suffusion’의뜻으로 한자어로 (편만)’이라 합니다. 두루두루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가득 채우는데 있어서 세 가지 방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자비무적(慈悲無敵)인가

 

무한편만은 대상을 한정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한정편만은 대상을 한정하는 것을 말해 다릅니다. 대상을 한정한다면 구체적으로 가족 등에서부터 자비의 마음을 내어서 열 가지 방향으로 가득 채워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빈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주 끝까지 채우는 것입니다.

 

가득 채웠을 때 온 우주가 자비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장이 되어 자신을 보호한다.”라 했습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자애 공덕의 경(A11.15)’에 따르면 열 한 가지 자애의 공덕이 기대된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들이 보호해 주고” (A11.15)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애의 마음을 닦으면 보이지 않는 신들이 지켜 줌을 말합니다.

 

자애의 마음을 우주끝까지 가득 채웠을 때 자애의 장으로 가득해서 누구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애를 닦으면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악몽을 꾸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고, 귀신들에게조차 사랑을 받고, 신들이 보호해 주고,..” (A11.15) 라 했습니다. 자비무적(慈悲無敵)입니다.

 

소라고동 불듯이 자비의 마음을 내어라

 

자비의 편만과 관련하여 전재성박사는 소라고동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우주적 언아라 불리우는 (AUM)’을 예로들어서 소라고동불듯이 자비의 마음을 내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옴이라는 말은 우주에 편만된 음성이라 합니다. 옴은 시작(A)과 유지(U)와 끝(M)을 뜻하는 말로 우주적 언어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우주를 가득 채우면 우주적 언어 옴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 합니다.

 

전재성박사가 니까야 강독 중에 소라고동불듯이 자비의 마음을 내어라.”라고 한 말은 생소합니다. 이에 대하여 니까야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소라고동 소리의 경(Sakhadhamasutta, S42.8)’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진흙 뻘에서 진주를 찾은 듯 합니다. 소라고동에 대한 이야기는 사부니까야에서 이 경이 유일한 듯 합니다.

 

경을 찾아 보니 이전에 한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노랑형광메모리쳐진 곳을 보니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 때문에 운명에 이끌려진다.” (S42.8) 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악하고 불건전한 짓을 반복했을 때 악처로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반대로 선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선처에 날 것입니다.

 

경에서 사무량심과 관련하여 소라고동의 비유가 실려 있습니다. 사무량심 정형구다음에 추가된 것입니다. 자애에 대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eyyathāpi gāmai balavā sakhadhamo appakasireneva catuddisā viññāpeyya, evameva kho gāmai eva bhāvitāya mettāya cetovimuttiyā eva bahulīkatāya ya pamāakata kamma na ta tatrāvasissati, na ta tatrāvatiṭṭhati.

 

촌장이여, 예를 들어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 촌장이여, 자애의 마음의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성장되면, 유한한 업의 세계는 거기에 남아있지 않고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S42.8, 전재성님역)

 

 

 

 

 

 

 

 

소라고동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sakhadhama’라 하고 영어로 ‘one who blows a conch shell’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소라고동은 티벳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티벳승려들이 소라처럼 생긴 모양의 고동을 불고 있는 장면입니다.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mettāya cetovimuttiyā: 慈心解脫)

 

경에 따르면 소라고동을 부는 것에 대하여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balavā sakhadhamo appakasireneva catuddisā viññāpeyya)”이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지금 골방에서 누군가에게 우주를 가득 채우고 남을 자애의 마음을 냈을 때 그 효과는 나타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이라 하여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의 효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내는 것이 자비의 마음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차츰 나아가 원한 맺힌 자에 이르기 까지 자애의 마음을 우주 끝까지 내었을 때 그 공덕은 우주적 규모일 것입니다. 자애의 마음을 냄으로 인하여 나의 몸과 마음이 편한 해졌을 때 해탈로 이끌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mettāya cetovimuttiyā: 慈心解脫)’이라 했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항상 함께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 첫날은 법문으로 대신했습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실현하려면 가장 먼저 유신견 타파가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일체가 무상함을 알아야 함을 강조 했습니다.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득해서 아는 것입니다. 일체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았을 때 지혜가 생겨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혜와 함께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이 자비입니다. 지혜가 성숙되면 자비도 따라 성숙됩니다. 지혜 있는 곳에 자비가 있고, 자비 있는 곳에 지혜가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항상 함께 하는 것으로 가장 먼저 요청되는 것이 무상이라 했습니다. 무상을 철저하게 알게 되면 고와 무아가 뒤따르게 되는데 동시적이라 합니다. 그런 무상, , 무아는 일부만 알고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라 했습니다. 그래서 삼법인은 항상 일체를 뜻하는 삽바(sabba)가 붙어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 합니다. 그런데 자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자비의 마음을 낼 때 일부만 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 끝까지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량 (appamaññā)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애, 연민, 기쁨, 평정에 대하여 사무량심이라 합니다.

 

자비의 마음이 온 우주에

 

이번 니까야 강독모임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소라고동 소리의 경(Sakhadhamasutta, S42.8)입니다. 경에서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 때문에 운명에 이끌려진다.” (S42.8) 라는 구절은 마치 소가 뒷걸침치다가 쥐를 잡은 격으로 값진 구절입니다. 글을 쓸 때 자주 써 먹을 듯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애의 마음을 소라고동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주적 언어가 옴이라 하는데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우주를 진동할 것입니다. 아주 작은 자애의 마음을 내도 그 과보는 엄청나게 클 것이라 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고, 지금 여기에서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며 연민의 마음을 낸다면, 소라고동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자비의 마음이 온 우주에 가득 했을 때 그 장()이 나를 보호할 것이고, 또한 그 청정한 마음으로 인하여 해탈을 이룰 것이라 합니다.

 

모임을 마치고 나서 스님과 법우님들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불교음악씨디 입니다. 두 개를 선물 했습니다. 하나는 기존의 빠알리어로 된 이미우이음악씨디이고, 또하나는 이번에 새로 만든 대비주관련 씨디입니다. 두 음악 씨디 모두 들으면 들을수록 기쁨과 환희를 생겨 나게 합니다. 그래서일까 명상수행이나 치유음악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고, 또한 불보살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어서 듣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될 것입니다.

 

 

2017-02-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