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제도 하려거든
통속적인 효도에 대하여
팔월 첫번째 니까야 강독시간은 ‘부모의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부모에 대한 은혜는 매우 강조 되어 있습니다. 어버이날이라 하여 5월 8일을 지정해 놓았습니다. 이날이 되면 멀리 사는 사람이라도 찾아 뵙거나 전화 한통화라도 해 주는 것이 미덕입니다. 또 맛있는 음식으로 즐겁게 해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효도의 한방편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효도는 이와 다릅니다. 물론 세상에서 통용되는 효도방식은 동일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부모의 경(A2.32)’에 따르면 통속적인 효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두 분에 대하여는 은혜를 갚기가 쉽지 않다. 두 분이란 어떠한 분인가? 어머니와 아버지이다.
수행승들이여, 한똑 어깨에 어머니를 이고 한쪽 어깨에 아버지를 이고 백년을 지내고 백년을 살면서, 향료를 바르고 안마를 해주고 목욕시키고 맛사지를 해드리며 간호하는데, 그들이 어깨 위에서 똥오줌을 싸더라도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로 하여금 이 칠보로 가득한 대륙의 지배자로서 왕위에 취임하도록 하여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들을 낳고 양육하며 세상에 내보내는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A2.32)
경을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등하게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불교와는 대조적입니다.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부모은중경’에 따르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기를 임신 했을 때부터 출산, 성장에 이르기 까지 10가지에 대하여 지극정성으로 헌신하는 어머니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되는 ‘부모의 마음’ 노래가사는 구구절절이 어머니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경에서는 “mātucca pitucca”라 하여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묘사 되어 있습니다. 다만 어머니가 앞에 나와 있어서 이것도 차별이라면 차별일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다양합니다. 그 중에 ‘평등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앞에 빈부귀천남녀노소 모두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머니만 강조 되고 아버지는 무시하지 않습니다. 늘 동동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 둘의 모음 네 번째 품이 ‘평등한 마음의 품(Samacittavaggo)’입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samacittā는 ‘equality in mind’의 뜻으로 평등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어머니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동등하게 대하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부모가 없었다면
치매에 걸린 부모는 며느리도 모시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자식만은 똥오줌을 받아 주며 모실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통상적인 효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여 안마를 해주고 맛사지를 해 드려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 했을 때는 똥오줌을 받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부모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가장 쉬운 효도일 것입니다. 외롭지 않게 전화하고나 찾아 뵙고, 맛있는 것을 사다 드리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가장 일반적인 효도라 볼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칠보로 가득한 대륙의 지배자로서 왕위에 취임하도록”이라 했습니다. 이것 이상 큰 효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모의 은혜를 다 갚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부모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합니다. 부모와의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도 부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이들을 낳고 양육하며 세상에 내보내는 많은 일” (A2.32) 을 한 것이라 했습니다.
불교적 효도에 대하여
부모의 은혜를 물질적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모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합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믿음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믿음을 권하고, 믿음에 들게 하여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 계행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계행을 권하고, 계행에 들게 하여 계행을 확고하게 하고, 인색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보시를 권하고, 보시에 들게 하여 보시를 확고하게 하고, 지혜가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지혜를 권하고, 지혜에 들게 하여 지혜를 확고하게 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넘치게 갚는 것이며, 넘치게 갚는 것이다.”(A2.32)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 최상의 효도임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 이를 실천한다면 이 보다 더 좋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믿음(saddhā), 계행(sīla), 보시(cāga), 지혜(paññā)입니다. 이 네 가지는 사실상 보물과 다름 없습니다.
부모에게 칠보를 주는 것 보다 무형의 네 가지 재물을 주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부모에게 네 가지 보물을 알려 주어서 천상에게 태어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끌게 한다면 이 보다 더 좋은 효도는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넘치게 갚는 것이며, 넘치게 갚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재산
부처님은 일곱가지 재물을 이야기 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총리대신 욱가의 경’에 따르면 결코 도둑맞을 수 없는 일곱 가지 재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재물(saddhādhanaṃ), 계행의 재물(sīladhanaṃ),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hiri ottappiyaṃ dhanaṃ), 배움의 재물(sutadhanaṃ), 보시의 재물(cāgadhanaṃ), 지혜의 재물(paññādhanaṃ)을 말합니다.
일곱 가지 재물은 무형의 재물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재물에 대하여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재물은 불이나 물이나 왕이나 도둑이나 원하지 않는 상속자에 의해서 약탈될 수 없는 것입니다.”(A7.7)라 했습니다. 또 게송으로 “이러한 재물이 있다면 신들과 인간의 세계에서 그는 실로 대부호이고 정복 될 수 없다네.”(A7.7)라 했습니다.
어떤 재물이든지 영원하지 않습니다. 수전노처럼 평생 번 돈을 죽어서 가져 갈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도 인색하고 타인에게도 인색한 삶을 산 자에게 남아 있는 막대한 재산은 죽어서 나라의 국고에 귀속되고 맙니다. 경에서는 국고 대신 ‘왕’이라 표현 했습니다.
재산은 도둑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담을 높이고, 그 위에 철조망을 치고, 그것도 모자라 경보시스템까지 갖추어 놓습니다. 또 재산을 은행에 넣어 두고, 부동산으로 묶어 둡니다. 그것도 몰래 합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죽으면 모두 국고로 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또하나의 도둑이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상속자, 악한 마음을 가진 상속자입니다. 노출된 재산은 결국 상속자에게 돌아갑니다.
상속받은 자는 재산을 물쓰듯합니다. 버는 자 따로 있고 쓰는 자 따로 있는 것입니다. 자수성가한 자는 돈을 함부로 쓰지 못하지만 재벌 이세 또는 삼세는 돈을 물쓰듯 씁니다. 우리말에 ‘부자 삼대가 못 가서 망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져도 결국 불, 물, 왕, 도둑, 상속자에게 모두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나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재산이 있습니다. 누구도 훔쳐 가지 못하는 재산입니다. 상속자도 가져 갈 수 없는 재산입니다. 네 가지를 들라면 믿음(saddhā), 계행(sīla), 보시(cāga), 지혜(paññā)라는 재물입니다. 부모에게 이 네 가지 재물을 주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은혜를 갚는 최상이라 했습니다.
주변을 제도 하려거든
흔히 가족제도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부모와 형제, 자매, 자식을 가르침의 바다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긴 하지만 쉽지 않음을 말합니다. 더구나 나이 든 부모님을 제도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입니다. 어른 들은 이미 확고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허물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를 제도하려면 먼저 자신부터 닦아야 합니다. 부모에게 믿음, 계행, 보시, 지혜라는 네 가지 재물을 선물하려거든 먼저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청정한 믿음을 내고, 오계를 지키고, 남에게 베풀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자가 먼저 되어 있어야 부모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스님들이 법문할 때 절에 혼자 나오지 말고 남편이나 아들, 딸의 손목을 잡고 함께 나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삶을 살아야 가능할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감화 될 것입니다.
부모, 형제, 자매, 자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먼저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에게도 보여 주었을 때 제도될 것입니다. 아무리 길거리에서 “예수천국불신지옥”식으로 외쳐 보았자 널판대기로 시냇물 때리기식입니다. 피래미 몇 마리는 잡을지 모르지만 모두 다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saddhā), 계행(sīla), 보시(cāga), 지혜(paññā)라는 무형의 재물을 가졌을 때 가능한 것이라 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일반적으로 삼보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모를 제도하기 위해서 “믿음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믿음을 권하고, 믿음에 들게 하여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라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타종교를 믿고 있을 때 난감할 것입니다. 이럴 때 계행, 보시, 지혜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부모를 제도하려거든 자신부터 제도해야 합니다.
부모, 형제, 자매, 자식을 제도하려거든 먼저 자신부터 제도해야 합니다. 일반사람을 제도하려거든 자신의 변화된 모습과 행복한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공동체로 끌어 들일 수 있습니다. 타종교인에 대한 제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타종교인 보다 더욱 더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타종교인 보다 더욱더 많이 베푸는 삶을 살고, 타 종교인 보다 더욱 더 지혜로운 삶을 살지 않는 한 결코 제도가 되지 않으리라 봅니다. 가족과 주변을 제도 하려거든 먼저 자신부터 제도해야 합니다.
2017-08-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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