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희망이 없는 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0. 29. 09:01


희망이 없는 사람

 

 

이것을 말하는 자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만 알면 모두 깨닫는다고 합니다. 유튜브를 보면 이것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뿐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이것만 알면 모든 것이 다 끝납니다.”라고 이것타령을 합니다.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다른 것 없습니다. 자신의 말대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데 있어서 교리나 수행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방해되는 요소라 합니다. 오로지 이것만 알면 되는데 자신의 말을 들으면 어느 때인가 저절로알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가능한지 10년 후가 될지, 20년 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부처님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다나 다양한 이교도의 경(Ud.6.4)’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외도가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Ud.6.4)라고 했을 때 이는 영원주의적 견해입니다. 반대로 어떤 외도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Ud.6.4)라고 했을 때 주석에 따르면 이는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우다나에서는 이와 같은 외도의 견해를 열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열가지 형이상학적 주제 또는 세속철학에 대한 것입니다.

 

열가지 형이상학적 이론

 

우다나에 실려 있는 열가지 형이상학적 이론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열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

No

   

   

1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sassato loko, idam-eva sacca mogham-aññan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

2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sassato loko, idam-eva sacca mogham-aññan

-유물론자의 허무주의적 견해

-뿌라나 깟사빠의 주장

3

세계는 유한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ntavā loko, idam-eva sacca mogham-aññan

요가적 삼매에 들어 유한성에 관해 지각한 것에 근거를 둔 견해.

4

세계는 유한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nantavā loko, idam-eva sacca mogham-aññan

자이나교의 주장.

5

영혼과 육체는 같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ta jīva ta sarīra, idam-eva sacca mogham-aññan

-유물론의 중요이론.

-사명외도인 막칼리 고쌀라의 숙명론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단멸론

6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ñña jīva añña sarīra, idam-eva sacca mogham-aññan

-유물론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

-빠꾸다 깟짜야나의 칠원소론.

7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hoti Tathāgato param-maranā, idam-eva sacca mogham-aññan

-우파니샤드의 일부학파에서 주장된 것

-브라흐만과 합일한다는 진아(眞我)

8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na hoti Tathāgato param-maranā, idam-eva sacca mogham-aññan

-사후세계 부정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허무주의

9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hoti ca na hoti ca Tathāgato param-maranā, idam-eva sacca mogham-aññan

-존재와 비존재의 제3항목을 설정

-아지위까에 의해 천명됨.

10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neva hoti ca, na na hoti ca Tathāgato param-maraā, idam-eva sacca mogham-aññan

-뱀장어를 잡듯이 혼란스런 회의주의이론.

-산자야 벨랏티뿟따의 주장

 

출처: 우다나, 다양한 이교도의 경(Ud.6.4)

 

 

이것만을 주장하는 자들의 특징을 들라면 자신의 견해는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합니다. 요즘 유튜브 등에서 볼 수 있는 견해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로지 이것타령을 하는 자에게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쪽 면만 보았을 때

 

외도들의 특징은 이것만이 진리(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 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말하는 열가지 외도의 견해가 있는데 부처님은 이를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와 코끼리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에게 이것이 코끼리입니다.”라며 코끼리 머리를 보여 주면 어떻게 말할까요? 아마 그 봉사는 폐하, 코끼리는 물항아리와 같습니다.”(Ud.6.4)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코끼리 귀를 만진자는 키질하는 바구니같다고 할 것입니다. 코끼리의 상아를 만진 자는 쟁기같다고 할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는 자신이 만진 것에 대하여 여러가지 형상으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들은 한번도 코끼리를 본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물항아리와 같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눈 밝은 자가 보기에는 우습게 들릴 것입니다. 요즘말로 코미디야 코미디.”라며 웃을지 모릅니다. 이것을 말하는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눈 밝은 자는 코끼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들은 코끼를 한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각 부위를 만진 자들은 딴 소리를 합니다. 외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외도들은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와 같습니다. 그들은 한면 만을 보고서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Ud.6.4)라 합니다. 이와 같은 외도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교의 유행자들은 눈이 멀었고 눈이 없어서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Ud6.4)

 

 

 


 

 

부처님은 외도들에 대하여 눈먼자로 보고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모르는 자들이 한쪽면만 보고서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했을 때 영원주의자가 됩니다. 또 다른 외도는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라고 했을 때 단멸론적 허무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열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은 모두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장님 꼬끼리 만지기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눈먼 외도들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며 입에 칼을 물고 싸운다고 했습니다.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늘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알아 경전을 열어 보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도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틀림 없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연기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연기법보다 더 나은 가르침을 설한다면 당장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부처님 가르침 보다 더 나은 가르침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방대합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한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그 양에 놀라게 됩니다. 디가니까야,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와 같은 4부 니까야 뿐만 아니라 담마빠다(법구경),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따까 등 쿳다까니까야가 있고 여기에 율장대품, 율장소품, 율장비구계, 율장비구니계 등 율장이 있습니다. 이를 진열해 놓으면 책장이 가득합니다. 이런 경전을 다 읽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 꾸준히 접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자로부터 가르침을 들으면 훨씬 더 이해가 쉬을 것입니다.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이 그것입니다.

 

시월 두 번째 강독모임이 전재성박사 서고에서 있었습니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스님이 다섯 분 참석했습니다. 늘 빠짐 없이 자리를 지키는 재가불자들 여럿이서 전재성박사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희망을 여읨의 경(A3.13)’에 대한 것입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는 자희망이 있는 자희망을 여읜 자이렇게 세 가지를 말합니다. 부처님은 희망이 없는 자에 대하여 비천한 가문, 짠달라의 가문,…, 기형이거나 질병이 많거나,…” 등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구절만 본다면 부처님은 대단히 매정한 분으로 여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SN.I.94’를 참고하라고 했습니다.

 

니까야를 보는 재미 중의 하나가 주석을 보는 것입니다. 각주에 주석을 소개 하고 있는데 본문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참고사항 ‘SN.I.94’를 찾아 보니 상윳따니까야 사람의 경(S3.21)’입니다. 동일한 정형문이 실려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쁜 일을 하면 몸이 부서진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S3.21)라 되어 있는 것이 다릅니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좋지 않은 조건으로 태어났을 때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둠에서 어둠으로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좋지 않다고 해서 악행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조건이 좋지 않아도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면 몸이 부서진 뒤어 죽어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납니다.”(S3.21)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결국 태어난 조건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따라 미래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세상에서 희망이 있는 자가 있습니다. 경에서는 왕자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왕자는 장차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왕자가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자신도 왕이 될 것이라 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희망이 있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비록 환경이 좋지 않아도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좋은 곳, 천상에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습니다.

 

희망을 여읜 사람이 있습니다. 한나라의 왕입니다. 왕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고대 전제국가에서는 나라의 영토와 백성은 모두 왕의 소유이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가진 왕에게 더 이상 왕이 되겠다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에게 희망을 여읜 사람이라 했습니다.

 

희망이 없는 수행승

 

부처님 가르침은 매우 체계적입니다. 경에서는 세상에서의 희망에 대하여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진짜 부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수행승들에 대한 것입니다. 수행승들에 대하여 희망이 없는 자희망이 있는 자희망을 여읜 자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했습니다. 먼저 희망이 없는 수행승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희망이 없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수행승은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한 성품을 지니고, 청정하지 못하고, 의심스런 행위를 일삼고, 숨기는 일을 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체 하고, 청정행자가 아니면서 청정행자인체 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타락하고, 오물로 가득찼다. 그가 이러이러한 수행승이 번뇌를 부수고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라고 들어도 언제 나는 번뇌를 부수고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할 것인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A3.13)

 

 

부처님이 말씀하신 희망 없는 수행승은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입니다. 출가목적이 불분명하거나 생계형 출가자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겉으로는 수행승인것처럼 보여도 세속에서 사는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을 때 희망 없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희망 없는 수행승은 누군가가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이루어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말을 들어도 남의 이야기 듣듯 한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여읜 수행승

 

희망이 있는 수행승이 있습니다. 그는 열심히 정진하는 자입니다. 계행을 지키고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의 귀에 누군가 심해탈과 혜해탈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 나도 번뇌를 부수고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할 것인가?” (A3.13)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승에 대하여 희망이 있는 수행승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세속의 왕처럼 희망을 여읜 수행승이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여읜 수행승은 번뇌가 다한 아라한입니다. 이런 아라한에 대하여 무학(無學)’이라 합니다. 무식해서 무학이 아니라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무학입니다. 반대로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자를 유학(有學: sekha)’이라 합니다. 유학은 사쌍팔배 중에 아라한을 제외한 나머지 과위의 성자를 말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무학으로서 아라한은 누군가 심해탈 또는 혜해탈을 이루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더 이상 나는 언제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왕자가 왕이 되었을 때 왕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수행승에 대하여 부처님은 희망을 여읜 사람이라 했습니다.

 

가르침이 희망이다

 

세상에 희망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좋지 않은 조건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때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장애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여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숙명론이나 운명론 등 외도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운명을 만들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있어서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초기경전을 스승으로 하여

 

부처님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오늘날까지 잘 전승되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르침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부처님 자신이 한말이라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라든가, 부처님은 팔만사천법문을 했지만 나중에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어느 스님에게 저는 빠알리니까야를 스승으로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선수행을 하는 그 스님은 이런 말을 듣고 삼보를 믿지 않는단 말입까?”라며 발끈했습니다.

 

경전을 스승으로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왜 스님은 발끈 했을까요? 아마도 자신을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한 감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대승경전이나 선어록을 염두에 두고 한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처님 원음이라 불리우는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스님이 오해한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초기경전을 스승으로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삼보에 대한 공경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승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한국불교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때문입니다. 이런 문구는 악용되어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는가 하면 부처님과 동격의 위치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경전의 내용보다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스님이 스스로 승보로 만든 것은 코미디 같은 넌센스입니다. 경전에 대한 무지,가르침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라 보요집니다. 한국불교가 개혁하려면 가장 먼저  승보개념부터 바꾸어야할 것입니다. 스님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승가가 아닙니다. 승가라는 공동체에서 자자와 포살을 하는 등 계행을 지키는 생활을 해야 승보로서 상가(승가)라 볼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국회가 아니라 입법활동 등 국회로서 역할을 해야 국회라 하듯이, 스님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승가가 아니라 계율을 지키고 사쌍팔배의 성자가 출현해야 상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배울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경전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은 부처님도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이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 하여 가르침을 스승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을 실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자들

 

이것을 말하는 자들 중에는 부처님 가르침도 부정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 자신이 한말이라도 믿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여 깔라마의 경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마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건성으로 읽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 봅니다. 부처님은 깔라마의 경에서 내가 한말이라도 믿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말했다면 부처님이 부처님 자신이 한말을 스스로 부정하는 실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깔라마의 경에서 어떻게 말씀 했을까요? 관련 구문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깔라마들이여, 당신들이 미심쩍어하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의심스러운 것은 미심쩍은 일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깔라마들이여, 이러한 것들이 악하고 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식자에게 비난받을 만하고,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여 받아 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A3.65

 

 

부처님은 자귀의 법귀의또는 자주(自洲)와 법주(法州)를 말씀했습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분명히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부처님 자신이 한말이라도 믿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일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왜곡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45년동안 팔만사천법문을 설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부처님이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과연 이런 말을 믿어도 될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말이 대승경전에 있다는 것입니다. 능가경에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 이 사이에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능가경 7)라 되어 있는 것이 근거입니다. 그러나 우다나에서는 정반대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이띠붓다까에 실려 있는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

 

 

능가경과 이띠붓따까는 게송의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我都無所說)(능가경)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띠붓따까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이띠붓따까)라 하여 모두 설하였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이라는 구분교(九分敎)의 가르침으로 끊임 없이 설했습니다. 그럼에도 후대에 부처님은 한자도 설한바 없다.”라 하여 부처님이 설한 것을 모두 부정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부처님의 말씀도 믿지 않게 되었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진리라 말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

 

신뢰할만한 마땅한 스승이 없으면 경전을 스승으로 삼으면 좋습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는 경전이 스승입니다. 초기경전에 없는 이야기를 하면 외도라 보면 틀림없습니다. 그런 외도들은 대개 이것만이 진실이다.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 하여 이것타령을 합니다.

 

외도의 가르침에는 교리도 없고 수행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사람을 따르는 자들 역시 희망이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눈먼 자의 뒤를 따르는 봉사들과 같습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는 자신은 물론 그를 따르는 자들까지 모두 불행과 고통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이생에서뿐만 아니라 내생에 까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에 이것을 말하는 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2017-10-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