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무지(無知)를 아는 것이 지혜(智慧)
저 멀리 삼송역까지 가는 길은 힘들고 피곤한 일입니다. 니까야강독모임이 있는 날에는 일찍 출발합니다. 오후 4시면 길을 나서야 합니다. 모임이 7시에 시작하지만 전철을 갈아타고 또 버스로 갈아 타고 거기에다 간단한 식사까지 하려면 3시간 정도 여유를 두어야 합니다. 그런 길이 때로 힘들고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빠지지 않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10월 첫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선 보였습니다. 스님들이 모두 5명 참석했습니다. 도현스님과 인연 있는 비구니스님 두 분, 그리고 길상사에서 오신 비구스님 두 분 합쳐서 모두 5명의 스님이 착석하니 무게가 있어 보였습니다. 늘 변함없이 참석하시는 정혜사신도분 세 분과 블로그지인들 이 참석했습니다.
경전의 문자화에 대하여
강독을 시작하기 전에 전재성박사는 경전의 문자화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현재 경전은 기록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모두 구전(口傳)이었다고 합니다.
불교경전이 기록된 것은 스리랑카에서 기원전 50년경이 처음이라 합니다. 그때 당시 대기근 등으로 인하여 ‘바나까’라 불리는 구전전승자들이 아사로 죽어감에 따라 싱할리어로 기록을 남긴 것이 최초라 합니다. 그런데 성인들의 말씀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모두 구전으로 전승되었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자가 생겨난 것은 우리가 아는 상식을 벗어난 것입니다. 문자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기억할 수 없어라 합니다. 또 거짓말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장사꾼들이 거래할 때 처음에는 기억에 의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츰 고객이 많아지고 외상도 많아지면 기억능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문자가 생겨난 것이라 합니다. 또 하나는 형량을 기록하기 위하여 문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교도관이 죄수들의 형량을 모두 기억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별도로 기록해 놓은 것을 보고서 관리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두 가지 예에 불과하지만 기록문화라는 것이 매우 ‘천박한’ 것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강경을 보면 사구게를 외워서 남에게 알려 주는 공덕에 대한 찬탄이 나옵니다.법구경 354번 게송 인연담에도 “아나타삔디까가 기증한 승원이나 마하비하라(Mahavihara)와 같은 백천 사원과 황동으로 만든 궁전과 같은 처소의 보시보다도, 가르침을 담은 사행시 하나라도 대중 앞에 외우는 것이 더욱 고귀하다.” (DhpA.IV.74)라는 주석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가르침을 듣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달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 했습니다. 가르침을 듣지 않은 자들은 한숟갈의 죽이나 한 주걱의 밥을 보시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 합니다.
흔히 ‘부자3대 못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손들에게 재산을 물려 주어 보았자 오래 가지 못함을 말합니다. 그대신 경전 한구절이라도 외게 하여 물려 주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사구게라도 하나 외게 하여 물려 주면, 그 사구게를 삶의 지표로 삼기 때문에 많은 재산을 물려 주어도 망할 염려는 없을 것이라 합니다. 흔히 말하는 가훈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재산보다도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가르침입니다. 짤막한 사구게 하나라도 자자손손외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문이 번성되고 재산을 유지하는 길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제자들도 가르침을 외워서 전승했습니다. 감히 문자화 하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고 합니다. 문자화 한다는 것은 장사꾼들이나 정치인들이나 하는 천박한 행위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인의 말씀을 문자화 하여 전승하다 보면 잘못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패엽경등 쓸 것에 문자를 남기다 보면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래 보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사경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한줄 또는 한단어가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졸면서 사경하다 빼 먹을 수 있고 부주의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경하는 과정에서 누락 되었을 때 이해 하기 힘들 것입니다. 경전이 난해한 것은 한줄 또는 한단어가 빠진 이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난해한 것이 심오한 것으로 비추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심오한 것은 신비화 되어서 본래 가르침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역에서 종종발견되는 현상이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전승과 관련하여 현재까지 가장 완벽한 것은 빠알리대장경이라 합니다. 그 다음이 티벳대장경이고 또 그 다음은 한역대장경이라 합니다. 한역대장경이 난해하고 심오해 보이는 것은 전승과정에서 중역됨에 따라 누락되고 첨가되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또 한문은 언어학적으로 인도유럽어족과 다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르침을 한문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 원음과 가까운 것은 빠알리경전, 티벳경전, 한역경전 순이라 합니다.
쉬운 말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가르침
경전이 난해하면 추상화하고 관념화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이라도 읽을 수 있는 것이 초기경전입니다. 가르침은 원래 쉬운 것이라 합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초등학생들이라도 할 수 있는 말로 가득합니다. 한가지 예로 든다면 법구경에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Dhp.183)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착하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을 배우는 서너살 먹은 애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렇게 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이 ‘착하게 살자’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말은 여든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초등학생도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쉽지만 여든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이번 니까야 강독모임에서 독송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도 똑 같습니다.
Kammalakkhaṇo, bhikkhave, bālo, kammalakkhaṇo paṇḍito, apadānasobhanī [apadāne sobhati (syā. kaṃ. pī.)] paññāti [paññatti (?)]. Tī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bālo veditabbo. Katamehi tīhi? Kāyaduccaritena, vacīduccaritena, manoduccaritena. Imehi kho, bhikkhave, tīhi dhammehi samannāgato bālo veditabbo.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도 행위를 특징으로 하고 현명한 자도 행위를 특징으로 하니, 행위 가운데 지혜가 드러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원리를 갖추면 어리석은 자라고 알 수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원리를 갖추면 어리석은 자라고 알 수 있다.”(A3.2)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초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니 문자를 깨친 대여섯살 먹은 아이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쉬운 말로 했습니다. 난해하고 심오하고 신비스런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천하기는 여든 먹은 노인도 어려운 것이 또한 부처님가르침이라는 사실입니다.
불교에서 선악(善惡)의 개념은?
흔히 한자어로 ‘신구의삼업(身口意三業)’이라 합니다. 이런 한자식 용어는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쉬운 우리말로 풀어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라며 풀어 놓았을 때 현실적으로 와 닿습니다. 여기서 ‘악행’이란 무엇일까요?
악행이 있으면 선행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쌍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행에 대한 설명이 있으면 선행에 대한 설명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선악의 개념은 유일신교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정언명령이라 하여 선악구분이 명확하여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선악개념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악행에 대하여 “악이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반대로 착하고 건전한 것을 감소시키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상대적인 개념은 선행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선이란, 착하고 건전한 것을 증가시키고 반대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감소시키는 것이다.”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악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선은 착하고 건전한 것입니다. 특히 선에 대하여 단지 ‘착하게 살면 그만이다’라는 것은 반쪽 짜리에 불과한 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살면서도 건전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꾸살라(kusala)’라 하고, 반면 악에 대해서는 ‘아꾸살라(akusala)’라 합니다.
전재성박사는 꾸살라에 대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 번역했고, 아꾸살라에 대해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 번역했습니다. 꾸살라와 아꾸살라와 유사한 말이 빠빠(papa)와 뿐냐(puñña)입니다. 이 말은 윤회하는 삶속에서 지은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빠빠에 대하여 악행으로 번역하고, 뿐냐에 대해서는 공덕으로 번역합니다. 부처님은 출세간적 가르침과 관련해서는 꾸살라와 아꾸살라라는 말로 설했습니다.
위 경에서 악행이라는 말은 빠알리로 ‘duccarita’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영어로 ‘evil conduct’라는 뜻입니다. 빠알리어 아꾸살라나 빠빠와 같은 뜻입니다. 선행이라는 말은 ‘sucarita’라 하여 ‘right conduct’의 뜻인데, 이 말은 꾸살라와 뿐냐와 같은 뜻입니다. 다만 신구의 삼업에 있어서 악행을 뜻하는 ‘duccarita’와 선행을 뜻하는 ‘sucarita’가 용법에 맞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에서는 ‘나쁜 행위’ 와 ‘좋은 행위’로 번역했습니다.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그 사람이 현명한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 그 사람의 행위를 보기 전에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마구 화를 낸다면 그 사람에게 분심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밥을 먹을 때 게걸스럽게 먹는다면 그 사람에게 욕심이 많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현명한지 어러석은 지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위가운데 지혜가 드러난다. (apadānasobhanī paññāti)”(A3.2)고 했습니다.
현명한 자이건 어리석은 자이건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행위는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라 하여 삼행(三行)으로 설명됩니다. 이와 같은 삼행은 악행이나 선행으로 나타나는데, 악행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bāla)’라 하고, 선행으로 나타나면 ‘현명한 자(paṇḍita)’라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구분은 간단합니다. 그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는 행위를 보면 다 드러납니다. 특히 어리석은 자의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무지로 설명했습니다. 가르침을 모르는 자가 무지한자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는 “공포를 초래하고” “위험을 초래하고” “재난을 초래하고”(A3.1)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공포, 위험, 재난은 어리석은 자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가르침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지혜
어리석은 자는 좀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아관념이 강한 자에게는 자존심이 있어서 절대로 지려 하지 않습니다. 자아관념이 확고한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공포, 위험, 재난을 초래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어리석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어리석음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어리석음으로 환원시키면 간단히 해결됩니다.”라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더 이상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법구경에서도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원망하고, 부모를 탓하고, 남을 원망하고, 심지어 사회와 나라를 탓합니다. 이렇게 남 탓을 하다 보니 분노의 세월을 살게 됩니다. 때로 분노가 엉뚱한 곳에서 폭발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지혜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리석은 것임을 아는 자는 현명한 자라 했습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라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한 것으로 알 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너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라”라 합니다. 이 말은 “너의 무지를 알라”라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즉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이고, 이런 지혜를 가진 자가 현명한 자라 합니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어리석게 살아갑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세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는 과학의 어리석음에 대한 것입니다. 현대는 과학만능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학으로 설명되는 것은 맹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천오백년전 부처님은 이런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과학은 현상분석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진리로 받아 들였을 때 혼란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아직까지 밝혀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직도 모르는 것 투성입니다. 양자론 등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것들은 가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과학으로 극히 일부만 밝혀 졌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물질에 대한 현상분석을 맹신하여 이를 진리로 받아 들인다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철학의 어리석음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 합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와 같다고 했습니다. 생각을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철학자들이 ‘나는 생각한다.’라는 견해에 입각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에 불과한 것을 ‘이것이 진리이다.’라 하여 자신의 생각을 진리로 여겼을 때라 합니다.
인간이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철학자라 하더라도 사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설령 훌륭한 생각이 나와서 그것을 이론화 시켰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각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생각을 이론화 하여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선언했을 때 세상을 소용돌이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를 들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종교의 어리석음에 대한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종교를 믿습니다. 교주의 가르침을 믿으면 그것으로 훌륭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변질되어 진리라고 주장하면 문제가 됩니다. 누군가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말하면 받아 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예수의 말은 진리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는 단지 선지자중의 한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예수의 말은 진리이다’라 했을 때, 이슬람을 믿는 사람 역시 ‘마호메트가 말한 것은 진리이다’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진리라고 주장했을 때 세상은 소용돌이에 빠져 듭니다. 다만 “예수를 믿습니다” 또는 “마호메트를 믿습니다”라고 하면 그만인 것을 자신의 교주의 말만이 진리라고 했을 때 세상은 피투성이가 된다는 말입니다.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처럼 어떤 ‘주의(主義)’가 있습니다. 주의라는 것은 단지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생각을 진리로 둔갑하는 순간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이런 소용돌이는 과학분야에서도 철학분야에서도 종교분야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단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거나 ‘현상은 이렇다’거나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하면 문제는 깨끗이 해결됩니다. 그럼에도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주장한다면 피비린내 나는 세상이 될 것이라 합니다.
부처님 이천오백년 전에 이미 세상의 소용돌이를 간파했습니다. 외도들이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Ud.69) 라 했을 때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는 것에 대하여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투는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알면 그만입니다. 세상에는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아는 체하며 더군다나 자신의 생각이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라 했습니다.
건질 것이 있음에도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은 인연있는 사람들이 찾아 옵니다. 이번 10월 첫 번째 강독모임에는 스님 다섯 분이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습니다. 재가자들과 똑같이 청취하는 자격으로 또는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전재성박사의 이야기를 두 시간 들었습니다. 비구니스님들은 전에 들어 보지 못했던 이야기이어서 매우 유익했다고 합니다.
본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온갖 욕망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가르침을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 원음을 번역한 번역서가 있음에도 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 놓고도 보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훌륭한 강좌가 있음에도 이를 놓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독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은 점차 고착화 되어 가는 듯합니다. 멀리 대전에서 일부러 KTX타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빠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빠지면 계속 빠진다는 것입니다.
강독모임이 끝나고 전철로 귀가하는데 옆에 앉은 법우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어느 날 한번 빠진 것이 다시는 교회를 가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독모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시 오지 못하는 절호의 찬스임에도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몸이 피곤함에도 전철에 몸을 싣는 것은 그만큼 건질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7-10-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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