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부수기 위한 세 가지 원리
“때로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가 한말입니다. 한문으로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 합니다.
배우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몰랐던 것을 알았을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합니다.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갇혀 살던 자가 새로운 세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자신의 무지(無知)를 알게 되었을 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학교에서 배웠다고는 하지만 들어서 아는 것이고 암기해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체험해서 아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써 있으니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과학적 사실에 대해서도 원리로 받아 들여 역시 그런 줄 압니다. 그러나 살아 가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과서의 지식은 입시나 취업에 도움이 될지언정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매우 미미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알고픈 것이 있으면 네이버나 다음, 구글 같은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될 것입니다. 요즘은 검색의 시대이기 때문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의 지혜’입니다.
세상에는 감각적인 것들로 넘쳐 나지만 지금 나에게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Dhamma)’입니다. 특히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빠알리니까야’입니다.
니까야를 열어 보면 우리가 고민 하던 모든 것들 것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럴 때 자신의 무지(無知)를 알게 됩니다. 자신이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일까 소크라테스는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너 자신을 알라”라 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이 큰 지혜를 말합니다. 이는 법구경에서도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나는 어리석은 자이다.’라고 안다면 더 이상 어리석은 자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아는 자는 무지한 자가 자신이 무지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주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것조차 알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조금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으로 아는 체 하는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것 같지 보이지만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모두 어긋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에 근거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깜냥(感量)’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 그럴 듯 해도 가르침에 맞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가르침에 맞다면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이고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생각이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체 하는 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는가 하면 깨달은 것이라 합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마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린다.”(Dhp.63) 라는 법구경 한구절이 정답이라 봅니다.
승리와 축복의 게송, 마하자야망갈라가타(Mahajayamaṅgalagāthā)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배우고자 합니다. 빠알리니까야 강독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을 많이 접했어도 더 많이 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11월 첫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스님 다섯 분에 블로그 지인들을 합하여 십여명이 전재성박사의 서고(書庫)에 있었습니다.
강독에 앞서 ‘마하자야망갈라가타(Mahajayamaṅgalagāthā)’ 노래를 들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게송’입니다. 마치 천주교 성가분위기가 나는 노래입니다. 일종의 ‘삼보예찬’이라 볼 수 있는데 빠알리어로 된 가사를 챈팅(Chanting) 형식으로 낭송한 것입니다.
예불대신 자야망갈라가타를 독송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전재성박사가 편찬한 예경지송의 수호경전품에 나오는 마하자야망갈라타는 총 21개의 게송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뭇삶의 요익을 위하시는
크나큰 연민의 수호자께서
모든 초월의 길을 이루시고
위없는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했사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승리와 축복의 게송입니다.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은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에서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S6.1)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자라는 말은 자신과 싸워서 승리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승리자입니다. 승리자로서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후에 오비구를 찾아 가는 길에서 사명외도 우빠까를 만났습니다. 우빠까가 “벗이여, 무한승리자가 될 만하다고 자인하는가?”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 악한 것을 정복하여, 우빠까여, 나는 승리자가 되었네.”(M26)라며 게송으로 답합니다. 부처님이 말한 승리자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를 말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번뇌와 싸움에서 이긴 자입니다.
마하자야망갈라타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요즘은 강독을 시작하기 전에 예경지송에 있는 마하자야망갈라가타를 독송하는데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후렴처럼 붙어 있는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hotu me jaya- maṅgalaṃ”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승리(jaya)와 축복(maṅgala)이 나에게 함께 해주기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호경(守護經)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대에게도 함께 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수호를 말할 때는 빠알리어 ‘메(me, 나에게)’를 사용하고, 상대방을 수호하기 위한 것일 때는 ‘떼(te, 그대에게)’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않았을 때
11월 첫 번째 강독은 앙굿따라니까야 ‘번뇌를 부수기 위한 효과적인 기반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경을 독송했습니다. 이 경은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대한 것으로 사부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경을 설할 때 세 가지 원리를 갖추면 깨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 가지 원리는 1) 감각의 문을 수호하는 것, 2)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 3)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원리를 지키면 “번뇌를 부수기 위한 효과적인 기반을 얻는다.”(A3.16)라 했습니다.
독송한 경의 제목은 ‘확실한 길의 경(A3.16, apaṇṇakatapaṭipadāsutta)’입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티 없음 경(apaṇṇakasutta)’라 했습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목부터 다릅니다. 먼저 ‘감각능력의 문에 대한 수호(indriyesu guttadvāro)’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시각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시각능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A3.16)
여섯 가지 감각능력 중에 시각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번뇌를 부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감각능력을 수호하는데 있음을 말합니다. 만일 감각능력을 수호하지 않는다면 인상과 연상에 집착할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인상은 ‘니밋따(nimitta)’를 말하고, 연상은 ‘비얀자나(vyañjana)’를 말합니다. 초불연에서는 ‘표상’과 ‘세세한 부분상’이라 번역했습니다.
시각능력을 제어 하지 않았을 때, 즉 대상에 집착했을 때 번뇌가 일어날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고양이의 경(S20.10)’에 따르면 탁발나간 빅쿠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마음이 뺏겨 번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경에서는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S20.10)라 되어 있습니다.
속이 비치는 옷을 입은 여인은 몸매가 드러나 보일 것입니다. 이를 본 빅쿠는 그 여인의 인상과 연상으로 인하여 괴로워했습니다. 경에서는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라 하여 ‘공격’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물밀듯이]흘러 들어 올 것”이라 했습니다.
욕정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빅쿠 방기사
빅쿠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때 공격받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이라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으로 인하여 번뇌가 일어났을 때 공격 받은 것이라 본 것입니다. 상유따니까야 ‘방기사의 품’에서도 욕정으로 인하여 괴로워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빅쿠 방기사 역시 탁발하러 나갔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서 욕정이 발동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시인 빅쿠라 볼 수 있는 방기사는 “나는 감각적 탐욕에 불타고 있고, 내 마음은 그 불에 삼켜졌네.”(S8.4)라 했습니다.
욕정의 불에 삼켜진 빅쿠는 어떻게 해야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난다는 방기사가 번뇌하는 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해법을 제시합니다.
“지각의 전도에 의해서
그대의 마음이 불에 삼켜지니,
감각적 탐욕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인상을 피하라.
형성된 것들을 타자로 보고
괴로운 것으로 보고 자기로 보지 말라.
커다란 감각적 탐욕의 불을 꺼서
결코 다시는 타오르지 않도록 하라.
부정관을 닦고,
마음을 통일하고 잘 삼매에 들라.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고
싫어하여 떠남에 전념하라.
인상을 여의는 명상을 닦고
망상의 경향을 버려라.
망상을 버리면
그대는 적멸에 든 자가 되리.”(S8.4)
초기경전에서 아난다가 등장하면 애욕(愛慾)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아난다는 잘 생긴 외모를 가져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을 보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아난다에게 여자를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여자를 보지 말라’고 했고, 어쩔 수 없이 보았다면 ‘말을 하지 말라’고 했고, 어쩔 수 없이 말을 했다면 항상 ‘사띠를 유지하라’고 했습니다.
아난다는 여인을 보고 욕정에 불타는 방기사에게 부정관(不淨觀)을 닦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삼매에 들라고 합니다. 이어서 사띠를 하라고 합니다. 이른바 불교의 사대명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이 망라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아난다는 마지막 게송에서 ‘망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망상이라는 말은 ‘마나(mana)’를 번역한 것입니다. 마나는 자만이라는 뜻도 있지만 망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망상을 부수라고 했는데 이는 욕정에 붙타는 마음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제어, 노력, 수행, 수호의 노력으로
여인을 보고서 욕정이 일어난 것은 조건 발생임을 말합니다. 조건 발생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집착입니다. 여인에 대하여 계속 생각함으로 인하여 망상이 일어나는데 그 망상은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체도 없는 것을 붙들어 매고 있을 때 번뇌가 일어나서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부처님은 감각능력을 수호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수호하는가? 구체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A3.61)라 했습니다. 여기서 제어, 노력, 보호, 수호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가르침은 다름 아닌 사정근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정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제어의 노력이란 무엇인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제어의 노력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버림의 노력이란 무엇인가?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버림의 노력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의 노력이란 무엇인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생겨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수행의 노력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수호의 노력이란 무엇인가? 이미 생겨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확대시키고 계발하여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수호의 노력이라고 한다.”(A4.69)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로부터는 ‘제어의 노력(律儀勤: samvarappadhana)’과 ‘버림의 노력(斷勤: pahanappadhana)’이 필요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해서는 ‘수행의 노력(修勤: bhavanappadhana)’과 ‘수호의 노력(守護勤: anurakkhanappadhana)’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감각의 문에 대하여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A3.61)라 했을 때 이는 다름 아닌 사정근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은 서로 연결 되어 있어서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
번뇌를 부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식사에서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bhojane mattaññū)’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음식절제를 말합니다. 놀랍게도 음식절제가 깨달음의 조건에 들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음식절제를 할까요? 이렇게 독송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새로운 괴로움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것이다.’라고 깊이 성찰하여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A3.16)
부처님의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상 불자들의 공양게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오관게(五觀偈)라 하여 공양게가 있기는 하지만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관게에서는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計功多小量彼來處 忖己德行全缺應供 防心離過貪等爲宗 正思良藥爲療形枯 爲成道業應受此食)”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약으로 알아(思良藥)”라는 말이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초기경전에서 약으로 음식을 먹는 경우는 병이 난 빅쿠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고기도 약이 되고 술도 약이 됩니다. 그런데 약으로 알아 음식을 섭취하라고 했을 때 술과 고기 등 진수성찬이 연상됩니다. 물론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약을 먹는 것처럼 음식을 대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는 가르침의 변질이라 봅니다. 후대로 내려 갈수록 가르침이 잘못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사례라 봅니다.
음식에 적당량을 안다는 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라 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음식을 놀이로 알 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로마시대 때입니다. 산해진미를 먹고 난 다음 토하는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아무리 황제식과 같은 음식이라도 배가 부르면 식욕이 댕기지 않습니다. 다음 끼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배고플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에 대한 갈애가 있는 자들은 새로운 음식을 즐기기 위해 토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음식을 놀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음식을 사치나 장식이나 치장으로 즐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매일 파티를 여는 것입니다. 영화 위대한 갯츠비를 보면 벼락부자가 매일 저녁에 파티를 여는 장면이 좋은 예입니다. 이럴 때 음식은 사치, 장식, 치장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식당에 가면 여러 가지 반찬에 고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잔칫날이고 매일매일 파티날입니다. 방송에서는 먹방프로가 가장 인기있습니다.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음식은 단지 미각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시각, 청각 등 다섯 가지 감각능력이 총동원 됩니다. 여기다가 옛날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을 떠 올린다면 여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음식절제가 되지 않으면 감각의 문이 수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식에 적당량을 알아야 한다’라 했고, 음식을 대할 때는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A3.16)이라 했습니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식절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음식을 욕망으로 분노로 먹으면 탐, 진, 치로 먹는 것이 되어서 번뇌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몸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만 섭취하라고 했습니다. 더 구체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있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S35.239)
부처님은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라는 표현과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라는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라는 말은 약으로서 음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대승 오관게에서는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正思良藥爲療形枯)’라 하여 몸을 보신 한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이라 하여 분명하게 한계를 짓고 있습니다.
아들고기를 대하는 것처럼
요즘은 페이스북시대입니다. 페이스북에는 스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스님은 한상 가득 차린 음식사진을 올려 놓습니다. 심지어 불판 위의 고기사진도 보여 줍니다. 부처님의 음식절제의 가르침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부처님은 음식절제에 대하여 몸을 지탱하는 정도에 그칠 것을 말씀 했습니다. 그럼에도 음식절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아들고기’의 교훈을 들려 주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두 사람의 부부가 적은 양식만을 가지고 황야의 길을 나섰는데, 그들에게는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그 두 사람의 부부가 황야를 지날 때 갖고 있던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는데도 그들은 아직 황야를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때 수행승들이여, 그 두 사람의 부부는 ‘우리들의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지만 아직 황야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귀한 아들을 죽여서 말린 고기나 꼬챙이에 꿴 고기를 만들어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황야를 빠져나가는 것이 어떨까?’라고 이와 같이 생각했다.(S12.63)
이야기를 보면 일반적인 상식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대부분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극한 상황에 처하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목숨보다 자신의 목숨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할 경우 아들고기를 먹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음식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몸을 지탱하기 위하여 섭취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음식에 대한 집착은 결국 ‘탐욕’이기 때문에, 맛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는 한 결코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네, 다섯 입 식사하고, 그리고 물을 마셔라. 자신에 전념하는 수행승이 안온한 삶을 살기에 족하다.”(Thag.983)라 했습니다. 또 삔돌라 바라드와자는 “생명은 음식 아닌 것으로 살지 못하지만, 음식이 마음에 평온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음식으로 이 집적의 몸이 유지되니, 이와 같은 것을 보고 탁발하는 것이다.”(Thag.123)라 했습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도 아들고기를 먹으면서 맛을 즐길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들고기의 교훈을 들려 주는 것은 음식에 대하여 “그들은 놀이 삼아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취해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진수성찬으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영양을 위해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S12.63)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음식을 대할 때는 아들고기를 대하는 것처럼 음식절제를 하라는 말입니다.
깨어 있음에 철저하다는 것은?
번뇌를 부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jāgariyaṃ anuyutto)’을 말합니다. 이는 계속 깨어 있음을 말합니다. 다름 아닌 사띠의 확립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일까? 독송한 것을 읽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은 이러한 것이다.”(A3.16)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에 대하여 거닐거나 앉아 있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마음의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āvaraṇīyehi dhammehi cittaṃ parisodheti)’을 말합니다.
마음의 장애라 하면 대개 ‘오장애’를 말합니다. 탐욕,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면 깨어 있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이 늘 과거나 미래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에 마음을 두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경에 따르면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은 잠을 잘 때 사자처럼 웅크리고 잤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pāde pādaṃ accādhāya sato sampajāno)”라 했습니다.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 5시에 일어나야겠다’라고 잠자리에 드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잠자리에 들 때 일어날 것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마치 선정에 든 자가 언제 선정에서 나올지 염두에 두는 것과 같습니다. 상수멸정에 드는 자가 언제 출정할지에 대하여 염두에 두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입정과 출정이 자유자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잠 잘 때도 마치 선정에 드는 것처럼 잠자는 것도 깨는 것도 자유로웠습니다. 이는 번뇌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A3.35)라 했습니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사라진 자는 언제든지 잠을 잘 수 있고 언제든지 잠에서 깰 수 있음을 말합니다.
탐욕으로 불타는 자, 분노로 끓어 오르는 자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되기 쉽습니다. 번뇌의 불길에 휩싸여 있는 자에게 밤은 길고 긴 것입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Dhp.60)라 했습니다. 탐욕의 밤과 분노의 밤이 되었을 때 날이 샐 때까지 뒤척일 것입니다. 탐욕과 분노로 사는 사람은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Dhp.60)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거닐거나 앉아 있거나 간에 깨어 있음에 전념하라고 했습니다. 경행이나 좌선 할 때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깨어 있음에 전념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깨어 있어야 하고, 잠에서 깨어 날 때도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깨어 있음에 전념하라는 말은 매사에 ‘올바로 새기고ㄹ올바로 알아차려라(sato sampajāno: 正念正知)’는 말과 같습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공자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하여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 했습니다. 즐거운 일은 배우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공자는 세 가지 즐거움을 말했습니다. 배우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벗이 찾아 오는 것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누가 보건 말건, 누가 알아주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쓸 뿐입니다. 본래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에는 눈길을 주지만 가르침에 대한 것은 애써 피하려 합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선지식을 몰라 보는 듯 합니다.
매월 두 번 열리는 니까야강독모임이 점차 자리를 잡아 가고 있습니다. 번역일에 바쁜 전재성박사가 특별이 시간을 내서 마련한 모임입니다. 일종의 사회에 대한 봉사의 성격도 띠고 있습니다. 독자에 대한 자비심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소외된 자들에게 따듯한 온정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모임에는 스님들도 다섯 분 있습니다. 주로 경청합니다. 각자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하나라도 많이 듣는 것이 남는 장사라 볼 수 있습니다. 사부니까야와 일부 쿳다까니까야, 그리고 율장을 꿰뚫고 있는 번역자의 말 한마디는 놓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다들 열심히 필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경전문구를 삽입하여 글을 꾸며 보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배운 것을 때로 익히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공자의 마지막 구절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2017-11-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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