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권승들의 탐욕과 활동가들의 분노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0. 31. 10:51


권승들의 탐욕과 활동가들의 분노

 

 

문화살롱 기룬에서

 

오랜만에 현장활동가들과 함께 했습니다. 지난 봄부터 뜨거운 여름을 함께 한 법우님들입니다. 장충동 우리함께 빌딩에 있는 문화살롱 기룬에서 입니다. 이날 스님들을 포함하여 사십여명 가량 모였는데 오랜 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대부분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어느 법우님은 큰 웃음과 함께 포옹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안부를 묻고 기뻐하는 모습이 진실이 우러나 보입니다. 설령 지난날 작고 사소한 일로 다툼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 주니 마음속에 또아리처럼 틀고 있었던 작은 앙금이 눈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으로 본다면 그 법우님은 지혜롭고 자비로움에 틀림 없습니다.

 

문화살롱 기룬에서 모임은 지난 활동을 거울 삼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토론회였습니다. 오후 6시부터 시작하여 10시에 끝났으니 장장 4시간 동안 토론이 이어진 것입니다. 단상의 발제자의 발언은 물론 참석자 대부분이 3분 발언형식으로 한마디씩 했습니다. 사람들의 성향이 다양하듯이, 발언내용은 역시 천차만별이고 다양했습니다. 그 중에는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는 발언도 있지만 받아 적을 것이 없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노트에 받아 적다 보니 11페이가 되었습니다.

 




촛불이 횃불이 되었는데

 

이날 토론주제는 촛불법회 평가와 불교개혁의 진로를 위한 대토론회였습니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촛불법회가 나중에는 횃불이 되었습니다. 불과 수십명에서 수천명단위로 늘어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양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촛불법회는 대성공입니다. 그러나 가장 크게 외친 총무원장 직선제실현불교적폐청산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현재와 같이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하에서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공적이라고 자평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 29일은 광화문촛불 시발점이 된 날입니다. 역사적인 그날에 참가했습니다.놀라운 열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습니다. 예감은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폭발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까지는 응축기간이 있었습니다. 국정원선거개입과 세월호 등에 대하여 끊임 없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처럼 광화문촛불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것이 시절인연이 되어 폭발한 것입니다. 불교촛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불교개혁도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속적으로 이슈를 제기하다 보면 응축된 힘이 광화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폭발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스님들에게 분개한 법우님

 

토론회는 마치 스님들 성토장 같았습니다. 초청된 스님들이 있음에도 스님들에 대한 비판은 거침 없었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된 스님들은 당연히 권승들입니다. 종단에서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받고 있는 기득권 스님들을 말합니다. 종단의 요직을 독차지 하고 돈이 되는 수말사 주지를 맡고 있는 스님들입니다. 이들 스님들은 이득이 되는 것이 없다면 굳이 욕먹어 가면서까지 힘들게 종무직을 맡고 종회의원을 하고 주지직을 맡지 않을 것입니다. 속된 말로 줏어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토론자 중에 가장 인상적인 발언을 한 사람은 P법우님입니다. 학교에서 스님들과 함께 일하면서 수십년간을 지내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스님들 세계에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법우님의 스님관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스님들이 들으면 언짢아 할 것이 틀림 없는 발언을 쏟아 내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스님들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P법우님은 이제까지 수십년동안 스님들을 상대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스님들이라 했습니다. 아마도 내가 누군데라며 스님상(僧相)’을 세웠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스님은 스승이고 어른이라는 계급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법우님이 분개하듯이 말한 것은 스님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스님들을 잊어야 합니다. 일하는데 스님들은 장애가 됩니다.”라 합니다. 스님들과 일을 해서 되는 것이 없다는 부정관입니다. 스님과 함께 일하면 결국 피해는 재가가가 볼 것이라는 비관론입니다.

 

P법우님은 스님들과 함께 무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재가자들끼리 연대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강력한 재가자연대를 만들어 승가보다 더 수행자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긴장할 것이라 합니다. 승가를 개혁하는 것은 강력한 재가자연대가 출현하는 것 외 다른 대안은 없다는 취지로 말을 했습니다.

 

적폐청산의 무풍지대

 

한국불교는 개혁의 대상입니다. 개혁은 위로부터 개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머리를 깍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기득권 세력이 알아서 스스로 개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개혁은 커녕 오히려 더 후퇴하는 듯 합니다. 자승원장이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그 보다 몇 배 더 허물을 가진 스님이 총무원장이 된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사회에서는 적폐청산을 이행하고 있지만 한국불교에서는 무풍지대입니다. 아니 역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스님들은 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한국불교는 조상들이 물려준 막대한 토지와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한국인들의 역사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불교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습니다. 과거 천년 전에는 온나라가 불국토였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절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불교가 생활화 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구한 불교역사와 함께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산은 돈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유명한 전통사찰을 하나 맡고 있으면 입장료수입과 주차료 수입, 그리고 문화재보호 명목으로 국가에서 보조금을 받고 있습니다. 스님들이 세력화 하여 목 좋은 사찰을 차지 하고 있으면 안정적으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도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도들이 없어도 조상이 물려준 유산과 국고보조금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쥐고 있는 권승들은 한번 장악한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변화를 요구하는 도전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응징합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이익을 취하려 하기 때문에 신도가 줄어들든 말든 불교가 망하든 말든 관심사가 아닙니다. 오로지 돈입니다. 만일 돈이 되지 않는다면 머리깍고 힘들게 산중에 남아 있을까요? 한국불교는 아직까지 적폐청산의 무풍지대입니다.

 

진정한 불교개혁은?

 

불과 이삼백명 가량 되는 스님들이 전체 유산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대대수 스님들은 갈 곳이 없어서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어느 비구니스님은 토론회에서 자조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스님사회에서도 1%가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1 99사회와 같다는 것입니다. 스님사회에서도 부익부빈익빈이 가속화 되어서 가난한 스님들은 생계걱정을 할 정도로 삶이 열악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나이 들면 선방에도 가기 어렵고 부전살이도 나이제한으로 어렵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면서 직선제가 꼭 이루어져서 출가에서 다비까지승려복지가 보장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부자스님들은 고정적으로 들어 오는 돈으로 인하여 호의호식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스님들은 당장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합니다. 탁발의 전통이 사라진 한국불교에서 탁발도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종단에서 승려복지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출가에서 다비까지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새로 총무원장이 된 스님은 승려복지를 실현하겠다고 공약으로 내 건 바 있습니다.

 

공약대로 승가복지가 실현된다면 더 이상 출가에서 다비까지라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승려복지가 불교개혁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불교개혁은 재정의 역할 분담에 있습니다.

 

스님들이 일체 돈을 만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시주(施主)들이 돈을 관리하게 해야 합니다. 재가의 전문가들이 종단을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스님들이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한국불교가 오늘날 망가진 근본적인 원인은 스님들이 돈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스님들의 탐욕이 오늘날 한국불교를 망쳤고 수백만의 불자들이 떠났습니다. 진정한 불교개혁은 재정에 대한 출재가역할분담에 있습니다.

 

재가자들이 이제 옛날 같지 않아

 

이날 토론회에는 현장활동가들도 다수 참석했습니다. 조계사일주문 앞에서 일인피켓시위를 하고 스님들 단식하는데 불침번을 서는 등 현장에서 활동한 법우님들이 있었기에 촛불이 횃불이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재가의 활동에 대하여 이날 참석한 법안스님은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법안스님에 따르면 올해 총무원장선거를 앞두고 촛불법회한 것에 대하여 94년 보다 강도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당시는 스님들이 주도하고 재가자들이 따르는 형태이었으나 이번 촛불법회의 경우 재가자들이 주도하고 스님들이 따라가는 형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로 재가자의 역량도 성숙했지만 무엇보다 작년 광화문촛불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 봅니다. 이와 같은 재가자들의 활동상에 대하여 스님 본사의 어느 스님이 말하길재가자들이 이제 옛날 같지 않아라 했다 합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데

 

재가불자들의 역량은 확실히 성숙했습니다. 불교개혁에 있어서 스님에게 예속된 종속변수가 아니라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일부 강성현장활동가들의 행태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이날 대토론회 발제자중의 하나인 이도흠 교수는 성찰할 점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서로 비난을 하기도 하고 억지스런 사유를 들어 단체나 개인을 배제하기도 하였으며 민주주의 원칙과 절차를 어기고 독단을 행하기도 하였다. 운동을 하다 보면 노선과 전략과 전술을 놓고 당연히 이견이 있다. 강경파와 온건파가 맞서기도 한다. 이 차이가 운동의 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차이들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토론과 숙의를 거쳐야 하고 합의를 한 후에는 다른 의견에 대해 뒷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서로 약점을 품어주고 보듬어 주는 동지애와 불자답게 타인의 고통에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동사섭하는 것이 부족하였다.”

(이도흠교수)

 

 

흔히 말하길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은 기득권 집단에서는 서로 이득을 취하려 하다 보니 탐욕으로 망하고, 변화를 갈망하는 진보진영에서는 견해 차이로 인한 분노로 망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탐, , 치 삼독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탐진치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중생이라 합니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탐욕으로 망하고, 진보주의자들은 분노로 망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득권자나 변화를 갈망하는 자나 모두 탐, , 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탐진치 삼독에 불자들 역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촛불이 횃불이 된 것에는 현장에서 밤낮으로 주말 없이 활동한 법우님들 역할이 컸습니다. 이런 법우님들에 대하여 현장활동가들이라 합니다. 그러나 관심이 지나치면 그 동안 노고가 수포로 돌아 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같은 길을 가는 도반에 대하여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적대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적전분열일을 일으키는 것 같고 아군에게 총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스님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대체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부분 불자들은 침묵합니다. 침묵하기는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종단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는 자들은 더욱 더 침묵합니다. 종단의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들이 앞장 섰습니다. 특히 교수, 변호사 등 불교지식인들이 앞선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종단과 이해 관계가 없는 지식인들 대부분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용기 있는 지식인들이 앞장 섰기 때문에 촛불이 횃불이 된 영향도 있을 것이라 봅니다.

 

그렇다고 불자들이나 지식인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고작 수십명의 현장활동가들이 든 촛불이 수천명의 횃불이 된 것은 그 동안 은인자중하고 있었던 불자들과 지식인들이 대거 가세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현장활동가들이나 은밀히 도움을 준 불자들이나 역할은 같은 것이라 봅니다. 그럼에도 일부현장활동가들은 자신들의 노고를 지도부가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하여 불만을 표출합니다. 그런데 불만이 엉뚱하게 같은 길을가는 법우님들에게 향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분노의 가학성(加虐性)

 

사람들은 정의롭지 않은 정권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작년 광화문촛불이 그랬습니다. 세월호 등 쌓이고 쌓인 분노가 응축되어 폭발된 것이 광화문촛불입니다. 불교계에도 쌓이고 쌓인 적폐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용주사와 마곡사를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순과 위선과 거짓에 대하여 불자들은 분개하여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개혁에 대한 요구는 사회에 대한 분노의 표출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개혁이 좌절 되었을 때 사회에 대한 분노가 내부로 향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촛불을 통하여 이와 같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도흠 교수의 지적대로 서로 비난을 하기도 하고 억지스런 사유를 들어 단체나 개인을 배제한 것입니다. 지혜와 자비의 종교에서 도저히 일어 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S1.71)라는 게송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분노에는 쾌감이 있고 가학성(加虐性)이 있습니다. 마치 욕먹은 자를 또 욕하고 맞은 자를 또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일부 활동가들에게서 보았습니다.


불교에서는 탐, , 치 삼독이라 하여 분노를 소멸대상으로 봅니다. 그러나 사회가 정의롭지 않을 때, 사회가 불공정할 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공분하는 분노는 개인적인 분노와 달리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거룩한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자비로움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분노를 하긴 하되 자비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개혁을 하는 활동가들에게 요청되는 덕목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항상 탐, , 치 삼독을 멸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초기경전에 실려 있습니다. 대표적인 가르침을 들라면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을 들 수 있습니다.

 

왜 동등한 배려를 해야 하는가?


공부한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무량심은 자애, 연민, 기쁨, 평정에 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마음을 내면 분노나 시기, 질투 등 악하고 불건전 마음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중에서 기쁨(: muditā)’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성공, 복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하는 삶을 말합니다.”을 말합니다. 그래서 더불어 기뻐함이라고도 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것에 대하여 수희공덕(隨喜功德)’이라고도 합니다.

 

초기불교에 사무량심이 있다면 대승불교에서는 사섭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섭법은 초기경전에도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사섭법이 육바라밀과 함께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실천수행방법으로 알고 있었으나 앙굿따라니까 ‘핫타까 알라바까와 섭수의 경(A8.24)’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섭법은 신심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에 대한 것입니다. 이중에서도 오늘날 현장활동가들에게 필요한 실천덕목은 아마 동사(同事)’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동사와 오늘날 불자들이 알고 있는 동사의 개념은 다릅니다. 지금까지 불자들은 동사에 대하여 한자어 뜻풀이식으로 고락을 함께 하는 것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동등한 배려(samānattatāya)’입니다.

 

동사를 동등한 배려로 보는 것은 빠알리어 ‘samānattatāya’의 뜻에서 드러납니다. 빠알리어 ‘samānattatā‘impartiality; sociability’의 뜻으로 공평무사, 공명정대의 뜻합니다 대승에서 말하는 고락을 함께 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 단어에 대하여 한국빠일리성전협회에서는 동등한 배려로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함께 함으로 번역했습니다. 동등한 배려라고 번역한 것이 원뜻에 더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유치원생에게는 눈높이를 맞추려면 자세를 낮추어야 합니다. 동등한 배려가 그렇습니다. 동등한 배려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배려가 아닙니다. 눈높이에 따른 동등한 배려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동등한 배려를 하면 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눈높이를 맞추어 배려해 주었을 때 다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강력한 재가자연대를 만들어야

 

네 시간에 걸친 긴 토론이 끝났습니다. 토론자 중에는 받아 적을 것이 있는 감명적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론의 본질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법우님들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갈등과 긴장과 분열을 야기하는 발언을 볼 때 사무량심에서의 더불어 기뻐함(: muditā)’과 사섭법에서의 동등한 배려(同事:  samānattatāya’의 마음이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국불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불교, 향후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 것? 이에 대하여 재가자들은 강력한 재가자 연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각 재가단체의 고유특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발전시키되 재가단체가 연합한 형태의 재가자연대를 말합니다. 이런 연대에 대하여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강력한 재가자연대를 요청합니다.

 




승가에 예속되어 활동하기 보다는 강력한 재가자연대가 형성되면 승가에서 긴장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재가자연대에서 각종행사와 교육, 운동을 주도했을 때 승가에 충격파를 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승가에 예속되어서 활동한다면 늘 개혁은 좌절될 것이고 과거를 답습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재가자연대가 형성되어 승가 못지 않은 단체로 성장했을 때 승가의 분발을 촉구하게 되어 한국불교를 개혁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또 강력한 재가자연대가 출현하면 이에 자극을 받아 승가에서도 내부적으로 청정승가를 구현하기 위한 강력한 승가연대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겸청(兼聽)하는 자세로

 

강력한 재가자연대와 강력한 청정승가연대가 형성되었을 때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한국불교를 개혁할 뿐 아니라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특히 구성원들간에는 사무량심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내야 하고 사섭법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성공과 번영에 대하여 기뻐하는 마음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방 눈높이에 맞춘 동등한 배려를 한다면 같은 길을 가는 도반에게 있어서 다툼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겸청(兼聽)’입니다.

 

겸청은 상대방의 의견을 겸허하게 듣는 것을 말합니다그래서 오백명의 따르는 사람을 가진 핫타까 알라바까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 덕목으로 칭찬했습니다. 모든 오피니언리더들이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라 봅니다.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믿음이 있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계행을 지키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부끄러움을 알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창피함을 알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많이 배우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관대하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지혜를 갖추었다.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겸손을 갖추었다.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아주 놀랍고 경이로운 원리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라.”(A8.24)

 

 

2017-10-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