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마음의 종기 콤플렉스
밤은 점점 길어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동지가 되면 최고조에 이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하루 해가 무척 짧습니다.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어둑해지고 여섯 시가 되면 컴컴해집니다. 더구나 낙엽 진 거리에 찬바람까지 불면 의지할 곳이 없는 자는 외로움과 그리움과 고독에 더욱 떨지 모릅니다. 이럴 때 가르침을 접하면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초기경전을 열어 몇 구절 읽지 않아 마음은 평온해지고 기쁨까지 느끼게 됩니다. 가르침에 목마른 자들, 배움을 열망하는 자들이 모인 마당이 있습니다.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입니다.
왜 입정(入定)하는가
12월 8일 오후 7시, 밖의 날씨는 캄캄합니다. 전재성박사의 삼송테크노밸리 서고에 법우님들이 한둘 모여 듭니다. 오늘은 안선생님이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9월부터 3개월간 꼭 참석해야 할 모임에 참석하는 바람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법우님은 니까야를 늦게 접했지만 매일 꾸준히 읽고 있다고 합니다.
오후 7시 마하자야망갈라가타를 함께 독송하는 것으로 모임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분간 입정에 들어갔습니다. 입정할 때는 소등합니다. 바깥은 어두운 밤입니다. 여름에 훤하게 밝았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 사이에 계절이 두 번 바뀐 것입니다.
여법한 법회에서는 입정(入定)시간이 있습니다. 대개 이삼분 정도 짧게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강독모임에서 10분 입정하는 것은 꽤 긴 시간입니다. 이렇게 입정하는 이유는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마치 흙탕물이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듯이, 외부 감각대상으로 인하여 들뜬 마음을 가라 앉히게 하기 위한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법구경에 따르면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 라 했습니다. 지혜는 명상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맑게 하면 좋은 생각이 떠 오를 것입니다. 작고한 스티브 잡스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골방에서 참선했다고 합니다.
잠시 입정하면 오장애가 일시적으로나마 가라 앉습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는 대중강연이 있는 날이면 강연 하기 전에 약 두 시간 정도 깊은 명상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강연에서 말이 자유롭게 나온다고 합니다. 일종의 강연에 대한 준비라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 (arukūpamacitto puggalo)
12월 첫 번째 강독모임에서는 ‘종기와 같은 사람의 경(A3.25)’를 독송했습니다. 이 경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매우 흥미로운 경이라 했습니다. 놀랍고 경이로운 가르침에 대한 경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경에서는 번개와 금강석이 등장해서 금강경제목의 모티브가 되는 경이라 여겨집니다.
경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 마음이번개와 같은 사람,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입니다. 먼저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Katamo ca bhikkhave arukūpamacitto puggal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kodhano hoti upāyāsabahulo, appampi vutto samāno abhisajjati, kuppati, byāpajjati, patitthiyati,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Seyyathāpi bhikkhave duṭṭhārukā kaṭṭhena vā kaṭhalena vā ghaṭṭitā bhiyyosomattāya assandati;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puggalo kodhano hoti upāyāsabahulo, appampi vutto samāno abhisajjati, kuppati, byāpajjati, patitthiyati,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ayaṃ vuccati bhikkhave arukūpamacitto puggalo.
“수행승들이여, 누가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화를 잘 내고 울화가 많아서 조금만 말을 걸어도 성내고 골내고 짜증내고 증오하고 공격하고 미움과 분노와 불만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상처 난 종기를 나뭇가지나 돌조각으로 찌르면 많은 고름이 흘러 나오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화를 잘 내고 울화가 많아서 조금만 말을 걸어도 성내고 골내고 짜증내고 증오하고 공격하고 미움과 분노와 불만을 드러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을 두고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A3.24)
이 경을 보면 “조금만 말을 걸어도”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상처 받은 자에게 해당될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가 지적하는 등 말을 걸어 왔을 때 분노가 폭발함을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상처가 난 줄도 모르는 자입니다. 더구나 상처가 나서 곪아 터진 줄 조차 모르는 자입니다. 분노했다는 것은 종기가 터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조그만 자극을 받아도 “성내고 골내고 짜증내고 증오하고 공격하고 미움과 분노와 불만을 드러낸다.”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탁월한 비유
누구나 마음의 상처는 있습니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살아 가면서 수 없이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잘 아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잊어 버리고 살지만 잠재의식 속에는 남아 있습니다. 조건만 되면 발현합니다. 마음의 상처를 준 자가 말을 걸었을 때 상처가 도집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상처 난 종기를 나뭇가지나 돌조각으로 찌르면 많은 고름이 흘러 나오는 것처럼”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 (arukūpamacitto puggalo)’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비유는 탁월합니다. 마음의 상처를 종기로 비유했기 때문입니다. 여드름을 짜면 고름이 나듯이, 썩어 문드러진 종기를 찌르면 피고름이 납니다. 피고름은 더러운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은 자가 한마디 말에 자극받아 발끈 하거나 버럭 성질을 냈을 때 더러운 피고름과 같다는 것입니다.
버럭 화를 내거나 불현듯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즉각적으로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아, 나에게 상처가 있었구나!”라 했습니다. 상처가 상처인줄 아는 것입니다. 상처가 나면 약을 바르고 치유하는 것처럼, 마음도 치유해야 합니다. 마음이 종기와 같은 자에 대하여는 이른바 사대명상 즉, 부정관, 자애관, 무상관, 호흡관을 닦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번개와 같은 사람(vijjūpamacitto puggalo)
나도 모르게 발끈할 때가 있습니다. 대개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자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을 때 일 것입니다. 마치 깐죽거리듯이 비아냥대며 자존심을 긁어 놓았을 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자로부터 잔소리를 들었을 때도 화가 납니다. 마치 훈계조로 말할 때 강한 저항감을 갖습니다. 속으로 부글부글 끓지만 표현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살아 가면서 끊임 없이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가 나면 연고를 발라 치유해야 하는데 그대로 놔두면 종기가 됩니다. 일종의 콤플렉스입니다.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과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 깐죽거렸을 때 참으면 우울증이 되고 폭발하면 분노가 됩니다. 모두 더러운 피고름과 같은 것이어서 괴로움을 야기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마음의 상처로 분노하고 괴로워하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Katamo ca bhikkhave vijjūpamacitto puggal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Seyyathāpi bhikkhave cakkhumā puriso rattandhakāratimisāyaṃ vijjantarikāya rūpāni passeyya,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puggal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vuccati bhikkhave vijjūpamacitto puggalo.
“수행승들이여, 누가 마음이 번개와 같은 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눈 있는 사람이 밤의 어둠과 암흑 속에서 갑자기 번개가 내려치면 형상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을 두고 번개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A3.25)
부처님은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번개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누군가 ‘분노하는 것이 결국 괴로움이다’라는 통찰이 일어 났을 때 이에 대하여 “암흑 속에서 갑자기 번개가 내려치면 형상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깜깜한 방에 전구를 켜면 일시적으로 밝아 지는 것과 같습니다.
군대에서 비가 오는 깜깜한 보초를 섰습니다. 그믐이라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우르르쾅쾅’하며 굉음과 함께 천둥이쳤습니다. 그리고 몇 초 후 하늘을 가르듯이 번개가 쳤습니다. 그 순간 사방이 훤해졌습니다. 여름 날 숲의 초록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것은 번개와 같은 지혜입니다. 번개가 치면 사방이 일시적으로 훤해지면서 사물을 분간 할 수 있듯이, 분노가 괴로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멸의 지혜입니다.
생멸의 지혜를 아는 자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아에 집착했을 때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에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통찰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분노도 집착된 것입니다. 실체도 없는 조건 발생하는 분노에 집착하게 되었을 때 괴로움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면 괴로움의 원인, 소멸, 방법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마치 문제를 푸는 수험생이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문제를 푸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지혜를 가진 자에 대하여 ‘마음이 번개와 같은 사람(vijjūpamacitto puggalo)’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것은 굉장한 지혜
화가 나면 참아야 할까 화를 내야 할까? 어떤 이는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듯이, 화가 나는데 왜 참느냐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동물처럼 본능적인 삶을 사는 자에게 해당될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 화를 내면 화풀이가 될 것입니다. 화를 꾹꾹 참고 있을 때 화병이 될지 모릅니다. 화병으로 죽는다고 하는데, 화병으로 죽느니 차라리 화를 내 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순간 모든 것이 파괴적으로 작용합니다. 화를 내면 인간관계가 단절 되는 것을 각오 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화를 내었을 때 상대방 역시 화를 내게 될 것입니다. 싸움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다 보면 점차 격해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종종 뉴스에서 ‘부부싸움 하다가 살인했다’라는 보도를 접합니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폭발하면 살인할 수 있습니다. 우발적 살인이라도 사람을 죽인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평생 죄책감으로 살아 가야 할지 모릅니다. 마치 저녁에 산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처럼 임종순간에 그 때 그 장면이 엄습하여 내세를 결정짓는 업으로 작용할지 모릅니다.
분노를 폭발했을 때 일시적으로 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또 분노로 인하여 불선업을 지었기 때문에 반드시 과보가 뒤따릅니다. 타인에게나 자신에게나 모두 괴로운 일 입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멈추어야 합니다. 이럴 때 “아, 나에게 상처가 있었구나!”라고 알아차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경에서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분노가 괴로움이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수험생이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답을 쓰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왜 상처가 났는지 알게 되면 쉽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분노가 일어 났을 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것은 굉장한 지혜입니다. 분노는 괴로움인 것입니다. 분노함으로 인하여 당장 스트레스가 해소될지 모르지만 또 다른 괴로움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화 내는 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안다면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마음이 금강과도 같은 사람(vajirūpamacitto puggalo)
깜깜한 방에 불을 켜면 일시에 드러나 분간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악마의 모음(S4)’를 보면 “악마 빠삐만은 ‘세존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 부처님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사라졌다.”(S4.8)라 했습니다.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르니까 답답한 것입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알았을 때 해결책이 나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자는 ‘화를 내면 괴롭다’라고 알게 됩니다. 괴로움에 대한 지혜를 아는 자입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게 되었을 때 결국 사성제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사성제에 대하여 알게 되면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됩니다. 악마 빠삐만이 “부처님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라며 즉시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사성제를 알면 금강석과도 같은 깨지지 않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이라 했습니다.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Katamo ca bhikkhave vajirūpamacitto puggal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Seyyathāpi bhikkhave vajirassa natthi kiñci abhejjaṃ, maṇi vā pāsāṇo vā.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puggalo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ī. Ayaṃ vuccati bhikkhave vajirūpamacitto puggalo. Ime kho bhikkhave tayo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lokasminti.
“수행승들이여, 누가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아 깨닫고 성취한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금강이 어떠한 보석이나 어떠한 돌도 부술 수 없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아 깨닫고 성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을 두고 금강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발견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A3.25)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이 금강석입니다. 그 어떤 광물도 금강석 보다 단단하지 못합니다. 그 어떤 광물도 금강석으로 잘려 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강석은 그 어떤 것도 부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번뇌를 부순자에 대하여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vajirūpamacitto puggalo)’이라 했습니다.
번뇌를 부순 자에 대하여 마음에 의한 해탈(cetovimutti)과 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i)을 성취한 자라 합니다. 어떠한 금속도 금강석을 부술 수 없는 것처럼, 심해탈과 혜해탈을 성취한 자에게 번뇌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즉시 부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아라한은 마음이 금강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經)
금강을 뜻 하는 빠알리어는 ‘바지라(vajira)’입니다. 바지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벼락(thunder-bolt)’를 뜻하고 또 하는 ‘다이아몬드(diamond)’를 뜻합니다. 부처님이 ‘마음이 번개와 같은 사람(vijjūpamacitto puggalo)’이라 했을 때 여기서 빗주(vijju)는 ‘Lightning’으로 번개를 뜻합니다. 번개가 치면 순간적으로 훤해서 다 분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번개보다 더 무섭고 큰 것이 벼락입니다. 이를 빠알리어로 바지라(vajira)라 하고 영어로는 썬더볼트라 합니다.
썬더볼트는 낙뢰, 벼락, 파괴적인 것을 뜻합니다. 금강이라는 뜻의 바지라는 단단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벼락치는 것처럼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내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 조계종 소의경전이 ‘금강경’입니다.
대승경전 금강경의 정식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입니다. 영어로는 ‘다이아몬드수트라(Diamond Sutra)’라 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바즈라체디카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라 합니다. 금강석과 같이 견고한 지혜를 얻어 무명을 타파한다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현장스님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했습니다. 비교적 산스크리트원어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서 능단(能斷)이라는 말은 ‘chedikā’를 번역한 것으로 ‘단번에 자른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벼락치듯이 단번에 번뇌를 두 동강이 내어 궁극적 지혜를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의 제목인 능단금강반야밀경은 초기경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종기와 같은 사람의 경에서 금강경 제목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번뇌를 부수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자에 대하여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이라 하는데, 그 어떤 경우에도 번뇌에 흔들리지 않음을 말합니다. 만일 번뇌가 일어나면 벼락치듯이 두동강이 내어 파괴해 버릴 것입니다.
훈계할 때는 비유를 들어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 마음이 번개와 같은 사람,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은 범부입니다. 마음이 번개와 같은 사람은 수행자입니다.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은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다. 부처님은 범부에서 수행자,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입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수 많은 비유가 나옵니다. 부처님은 상황에 맞는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어린 아이에게 맞는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부처님이 거짓말하는 라훌라를 훈계할 때도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부처님은 라훌라 앞에서 세수대야를 엎어 버렸습니다. 그리고서는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의 수행자의 덕성은 이와 같이 뒤집혀 진다.”(M61)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라훌라를 훈계할 때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세수대야에 반쯤 남은 물을 버리고서는 덕성이 없는 수행자에 대하여 ‘버려지는 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의 덕성은 버려지고 뒤집혀져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비유를 들어 아이에게 설명했을 때 ‘거짓말 하지 말라’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효과가 훨씽 크다는 사실입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고 전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상대방에게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훈계를 받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를 훈계할 때 도덕적 훈계나 직적접 훈계를 하지 않고 비유를 들어 간접적으로 훈계했을 때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라훌라를 교계할 때 세수대야의 물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어, 내 이야기하네”
비유의 천재 부처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열등감 내지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종기의 비유입니다. 마음에 상처가 난 사람은 불선업을 저지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에 대하여 “조금만 말을 걸어도”라 했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난 자에 대하여 “상처난 종기를 나뭇가지나 돌조각으로 찌르면 많은 고름이 흘러 나오는 것처럼”이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런 비유를 접하면 누구나 공감합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같아서 “어, 내 이야기하네”라 할지 모릅니다.
부처님이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이라 하여 비유를 들어 설명했을 때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여덟 가지 괴로움을 설명하면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했을 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틀림없음을 확인했다면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라 합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괴로움에 대하여 설했을 때 공감한다면 비로소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방법에 대한 것도 받아 들이게 됩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자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됩니다. 상처 입은 자는 조금만 건드려도 짜증내고 증오하고 공격하고 미움과 분노와 불만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괴로움이라고 아는 순간 번개와 같은 지혜가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모르면 화를 내지만 아는 순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라는 것이 조건발생한 것으로서 조건이 소멸하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멸의 원리를 아는 것입니다. 생멸을 안다는 것은 연기법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콤플렉스를 건드렸을 때
마음에 상처 입은 자가 그 상처가 치유 되지 않아 마음 깊은 곳에 잠재 되어 있을 때 누군가 자극하면 발현됩니다. 상처는 콤플렉스처럼 되어 있어서 만지면 터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종기를 건드리면 피고름이 나듯이, 콤플렉스를 건드렸을 때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융심리학에 따르면 누구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열등감과 자만과의 관계는? 마음의 그림자 콤플렉스(2016-11-3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이런 콤플렉스는 한 존재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 된 것’이라 합니다. 이는 우리말로 ‘한(恨)’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이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의 그림자인 콤플렉스는 의식,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여기저기에 또아리 틀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조건만 맞으면 발현됩니다. 그런데 융에 따르면 마음의 그림자를 이해 하는 것이 결국 ‘의식화’ 이고, 또 ‘자기완성’으로 가는 길이라 했습니다.
생멸하는 것에 목숨 걸 필요 없다
마음의 그림자인 콤플렉스는 한이라고 볼 수 있고 맺힌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종기와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났는데 치유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 것입니다. 내버려 두면 분노로 나타납니다.
분노가 일어 났을 때 ‘이것이 분노이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분노가 괴로움이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분노함으로 인하여 초래될 재앙을 알기에 분노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사성제를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성제는 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연기는 다름 아닌 생멸(生滅)입니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연기송(緣起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연기송은 상호의존적이고 조건발생하는 생멸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을 떠 올려라’ 했습니다. 이는 ‘자애의 경(Sn1.8)’에서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 같은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Stn.49)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을 떠 올리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상대방에 대하여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났을 때 분노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분노는 불선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말 것에 목숨 걸 필요 없습니다.
가치를 아는 자들에게는
전재성박사의 강연은 매우 밀도 있게 진행됩니다. 이는 준비된 강연임을 말합니다.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는데 실질적으로는 7시 반부터 9시까지입니다. 예경문을 독송하고 10분입정하다 보면 30분이 다 지나갑니다.
전재성박사는 강연하기 전에 명상한다고 했습니다. 외부 강연의 경우 약 두 시간 동안 깊은 명상을 한다고 했는데 이는 강연을 잘 하기 위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선정에서 지혜가 나온다고 하는데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깨끗한 상태라면 사부니까야 등 그 동안 번역 했던 것들이 잘 떠오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강독모임에서 받아 적기에 바쁩니다.
강독모임에서는 경을 함께 읽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후는 전재성박사가 준비한 것을 듣기만 하면 됩니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습니다. 니까야는 서로 연계 되어 있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진도 나가는 것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해당 경의 주제에 맞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질문을 했을 때 맥이 끊어집니다. 경의 주제에 맞는 질문을 하면 다행이지만, 주제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했을 때 속된 말로 ‘삼천포로 빠져 버리는’ 듯합니다. 더구나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에 대하여 또 질문하는 식으로 문답을 하다 보면 이삼십분이 훌쩍 지나가 버립니다.
한시간 반 동안 밀도 있게 진행되는 강연에서 주제와 관련 없는 질의응답으로 이삼십분을 보냈을 때 모두에게 손해입니다. 가급적 전재성박사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이 속된 말로 ‘남는 장사’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질문시간을 1분 이내로 제한하고 주제와 관련된 것으로 엄격하게 한정해야 합니다. 보충질문은 한번 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사람이 여러 번 질문하여, 그것도 경의 주제와 관련없는 이야기로 이삼십분을 허비 했을 때 사실 받아 적을 것이 없습니다.
전재성박사 강독회는 후원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번역에 바쁜 시간을 내서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후원자의 모임이기도 합니다. 각자 능력껏 후원합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강연하고 귀중한 시간 내서 참여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입니다. 특히 집이 모두 먼 것이 특징입니다. 서쪽으로는 인천, 동쪽으로는 남양주와 구리, 그리고 남쪽으로는 안양과 대전입니다. 특히 대전에서 KTX타고 오는 법우님은 그날 생업을 포기하고 올라 옵니다. 내려 갈 때는 서울역에서 예약된 KTX를 타고 내려갑니다. 강독이 9시에 끝나야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가급적 질문은 간단히 하고 주제에 관련된 것으로 한정해서 전재성박사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늦게 끝나지 않아야 귀가하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가르침에 대한 갈증과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자들의 모임이 10개월 되었습니다. 그 동안 한번도 빠짐 없이 개근했습니다. 그리고 전재성박사의 강연을 빠짐 없이 메모했습니다.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쓴 글이 이제 18편 됩니다. 그러나 말한 것을 다 쓴 것은 아닙니다. 거의 한시간 반동안 받아 적기에 바쁜데 그 모든 것을 다 표현하려다 보면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요합니다. 들은 것 중에서 핵심되는 내용에 대하여 경전의 문구를 들어 요약한 것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배움을 갈망하는 자들이 화려한 도시의 불빛을 멀리하고 먼 곳에 일부로 찾아 가서 배우고 있습니다. 숫따니빠따 ‘위대한 축복의 경’(Sn.2.4)’에서처럼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6)라 했습니다. 가치를 아는 자들에게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2017-12-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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