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청정도론을 읽어 나가면서 기쁨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 30. 12:21


청정도론을 읽어 나가면서 기쁨을



 

청정도론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청정도론이 완역되었습니다. 출간을 앞두고 교정본을 읽어 보고 있습니다. 이번 봄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청정도론이 출간된다면 한국에서는 두 종류의 번역서를 갖게 됩니다.

 

두 종류의 청정도론

 

두 번역서를 비교하며 읽다가 차이가 나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본이 2548년에 나왔다고 발간사에 써 있는 곳을 보니 2004년의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의 일입니다.

 

논서를 중시하는 초불연에서 사부니까야 번역에 앞서서 가장 만저 발간한 것이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입니다. 초불연에서 두 논서를 번역함에 따라 초기불교 붐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의 청정도론은 수 만권이 팔리는 베스트셀러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14년이 흐른 현시점에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도 청정도론을 내 놓게 되었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청정도론은 사부니까야, 쿳다까니까야의 일부, 율장 등 번역을 완료한 후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니까야를 읽는 듯이 술술 넘어 가는 듯 합니다. 이는 논서가 난해하다는 상식을 깨뜨린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주석이 풍부합니다. 중요한 문구에는 반드시 주석이 있고 경의 근거가 밝혀져 있습니다. 게송의 경우 빠알리문구가 모두 각주처리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은 초불연 번역과 차별화 됩니다.

 




가나보자나(gaabhojana)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두타행이 있습니다. 두타행 중에 탁발음식만을 먹는 수행고리에 대한 논의(pidapāikagakathā)가 있는데 그 중에 별중(別衆)으로 식사하는 것과 연속식(連續食)으로 식사하는 것에 대한 실천의 학습계율을 위반하지 않는 것”(Vism.67)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이 항목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대중을 위한 음식(gaabhojana)과 다른 사람을 위한 공양초청에 대신 응하는 것(paramparāhojana) 과 바른 행동거지에 관한 학습계율을 위반하지 않게 되고라 되어 있습니다. 주석을 보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난해하여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불연의 책에서는 각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성전협 청정도론에는 별중(別衆)으로 식사하는 것과 연속식(連續食)으로 식사하는 것에 대한 실천의 학습계율을 위반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이 율장을 인용하여 각주로 되어 있습니다.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gaabhojana : 속죄법 제32(Pac.32; VN.IV.289)에 속한다. 별중(別衆)이란 네 명 이상의 수행승이 한 당파가 되어 행동하면, 참모임의 파괴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까티나옷을 만드는 경우에는 식후에 옷감의 보시가 있으므로 별중에 식사에 초대받는다.”(319번 각주, 성전협 청정도론)

 

 

별중(別衆)을 뜻하는 빠알리어 가나보자나(gaabhojana)에 대한 설명입니다. 율장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성전협에서는 빠알리율장을 우리말로 번역한 바가 있기 때문에 각주로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네 명의 비구가 몰려 다녀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네 명 이상이 되면 파당이 형성되어서 승가의 파괴로 연결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네 명이 한 장소에서 탁발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가나보자나에 대하여 대중을 위한 음식이라 했는데 별도로 설명도 없어서 난해한 용어입니다.

 

빠람빠라보자나(paramparāhojana)에 대하여

 

연속식(連續食)은 빠알리어 빠람빠라보자나(paramparāhojana)를 번역한 것입니다. 초불연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공양초청에 대신 응하는 것이라고 길게 번역했는데 이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율장에 따르면 빠람빠라보자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paramparāhojana: Vin.III.77에 따르면, 연속해서 식사하면, 속죄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루에 여러 번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고 있다. 수행승이 한 집에서 공양을 얻어먹고 거듭 다른 집에서 공양을 얻어 먹으면, 앞서 공양을 베푼 사람이 자신의 공양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다른 집에서 공양을 받을 것이라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므로 거듭 식사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까티나옷이 만들어질 때에는 여러 번 먹는 것이 허용된다.”(321번 각주, 성전협 청정도론)

 

 

연속식을 뜻하는 빠람빠라보자나(paramparāhojana)는 공양을 거듭해서 먹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이를 어기면 속죄죄라 합니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공양초청에 대신 응하는 것이라 하여 전혀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가나보자나(gaabhojana)와 빠람빠라보자나(paramparāhojana)에 대하여 냐나몰리의 영역판을 찾아 보았습니다. 찾아 보니 the training precepts about eating as a group, substituting one meal [invitation for another] (see Vinaya, Pácittiya 33 and Comy.), and good behaviour, are not contravened”라 되어 있습니다. 그룹을 이루어 식사는 것에 대한 학습교훈과 여러 번 식사를 금하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율장에서 ‘Pácittiya 33’을 참고하라고 본문에 괄호로 되어 있습니다. 별도의 각주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청정도론은 니까야(經藏)과 위나야(律藏)의 바탕 하에 쓰여진 것입니다. 근기에 맞추어 대기설법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해설서이기 때문에 니까야와 위나야와 함께 병행하여 보아야 효과가 클 것입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니까야를 번역하기 전에 청정도론 부터 먼저 번역했습니다. 더구나 율장은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 매우 난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니까야와 위나야를 완역하고 난 후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용어가 통일 되어 있고 더구나 풍부한 주석이 특징입니다. 이런 점이 14년전에 번역된 청정도론과 차별화 되는 듯합니다.

 

탁발 게송에서

 

두타행 세 번째는 탁발음식만을 먹는 수행고리에 대한 논의 (pidapāikagakathā)’입니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습니다. 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Piṇḍapātikassa bhikkhuno,

Attabharassa anaññaposino;

Devāpi pihayanti tādino,

No ce lābhasilokanissito

 

탁발하러 다니며 음식을 얻고

자신을 부양하되 타인을 부양하지 않고

칭찬과 칭송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신들은 그러한 수행승을 부러워한다.”(성전협역)

 

탁발음식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타인에 의해 부양되지 않는 비구가

만약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신들도 그를 부러워한다.”(초불연역)

 

“If a bhikkhu can support himself on alms

And live without another’s maintenance,

And pay no heed as well to gain and fame,

The very gods indeed might envy him”(냐나몰리역)

 

 

이 게송은 우다나에도 실려 있습니다. 붓다고사는 초기경전 이곳 저곳에서 훌륭한 문구를 가져와서 편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다나 탁발자의 경(Ud.29)’이 그것입니다. 이 게송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각주로 길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초불연역과 냐나몰리역에는 전혀 주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꿀벌이 꽃을 건드리지 않고 꿀만 따듯이

 

성전협의 주석을 보면 탁발하러 다니며 음식을 얻고에 대하여 탁발하는 것이 두타행임을 말합니다. 이는 마하 깟사빠존자의 두타행을 설명한 것이도 합니다. 우다나 주석에 따르면, 탁발할 때는 최상으로 욕심을 여의고 가정을 애민히 여기면서 탁발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벌이 꿀을 따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법구경 49번 게송을 보면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을 꿀벌이 건드리지 않고 오직 꿀만 따서 나르듯이, 성자는 마을에서 유행한다.”(Dhp.49)라 했습니다.

 

탁발은 꿀벌이 꽃을 해치지 않고 꿀만 취해 가듯이, 성자들은 마을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 밥만 얻어 감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탁발하러 다니며 음식을 얻고 (Piṇḍapātikassa)”라 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탁발음식으로 자신을 지탱하고라 했습니다. 냐나몰리는 “support himself on alms”라 하여 탁발로 자신을 지탱하고라 했습니다. 그러나 꿀벌이 꽃을 해치지 않고 꿀만 취한다는 취지로 본다면 성전협의 탁발하러 다니며 음식을 얻고라는 번역이 타당할 듯 합니다.

 

네 가지 하잘 것 없는 것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자신을 부양하되 타인을 부양하지 않고(Attabharassa anaññaposino)”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부양한다(Attabharassa)’라는 말은 우다나 주석에 따르면 자기자신 혼자만을 네 가지 하잘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 비난할 수 없는 것으로 부양하는 것을 뜻한다.”(UdA.201)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으로 앙굿따라니까야 만족의 경(A4.27)’을 들 수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만족의 경에 따르면, 네 가지 하잘 것 없는 것에 대하여 옷 중에는 넝마 옷이 하잘 곳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등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네 가지 하잘 것 없는 것에 대하여 이러한 하잘 것 없어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삶의 고리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A4.27)라 되어 있습니다. 소욕지족의 행복을 말합니다.

 

칭찬과 칭송에 대하여

 

세 번째 구절을 보면 칭찬과 칭송에 의존하지 않는다면(No ce lābhasilokanissito)”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lābha’‘gain; acquisition’의 뜻으로 이득을 뜻합니다. 성전협에서는 칭찬으로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이득으로 번역했습니다. 냐나몰리는 ‘gain’이라 하여 이득으로 번역했습니다.

 

성전협 각주를 보면 우다나의 주석을 인용하여 칭찬과 칭송에 의존하지 것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최상의 겸손한 것을 갖춘 것을 말한다. 칭찬은 상대가 있는 앞에서 말로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하고 칭송은 상대가 부재중에 하는 칭찬인 것이다.”(UdA.204)라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초불연과 냐나몰리역에는 각주와 주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청정도론을 읽어 나가면서 기쁨을

 

한국불교에 두 종류의 청정도론이 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행운입니다. 성전협에서 올 봄에 청정도론이 출간 되면 독자들의 선택의 폭은 넓어집니다. 취향에 따라 골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보다 성전협 번역을 보면 주석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각주가 거의 없는 앞선 번역본과 비교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부니까야, 율장 등 수 십년간 번역을 한 관록이 녹아 들어갔기 때문이라 봅니다.

 

청정도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 보고 있습니다. 주석까지 꼼꼼히 살펴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앞서 출간된 번역본까지 비교하며 읽어 보고 있습니다. 술술 잘 넘아 가는 느낌입니다. 이전에 청정도론 읽은 것이 큰 이유일 것입니다. 여기에 니까야를 읽은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니까야 읽는 것 없이, 율장을 접하는 것 없이 청정도론부터 먼저 읽는 다는 것은 거꾸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요약본 참고서로 공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부니까야는 완역되었습니다. 독자들은 두 종류의 번역본을 접할 수 있는 행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부니까야와 율장의 번역이 완성된 이 시점에서 교리와 교학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청정도론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니까야먼저 접하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청정도론을 읽어 나가면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2018-01-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