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법륜경에서 꼰당냐의 법안(法眼)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는데
페이스북에서 질문을 하나 받았습니다. 이번 동안거 기간 중에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중계하고 있는 P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질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가 이 문제가 중요하다 생각해서
고익진 교수가 엮은 [한글 아함경] 담마아카데미
101쪽, "불설중본기경" 상권,
'법의 바퀴를 굴리는 품(전법륜품)'을 살펴보니
초전법륜 상황을 쭈욱 말씀하시고 마지막에
"이 법을 말씀하시니, 콘단냐 등 다섯 사람은
번뇌가 다하고 마음을 깨달아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로 나와 있네요!!!^>^
물론, 이것은 한문본 불설중본기경을
한글로 번역한 경전이긴 합니다만,
이 경전 근거로 본다면,
초전법륜에서 콘단냐 등 다섯 사람은 다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 거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P님)
핵심은 오비구가 가르침의 수레바퀴의 경(초전법륜경)을 듣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P님은 ‘동안거 43일째, 백일법문 중계’ 에서 “부처님 이후 처음으로 깨친 교진여(콘단냐)는 첫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바로 깨달았음을 인가하시죠”라 했습니다. 또 블로그에서도 “부처님이 완전히 깨쳤다는 인가를 해 주셨습니다.”(동안거 43일째)라 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인가해 준 적이 없습니다.
꼰당냐의 이해에 의해 증명된 부처님의 깨달음
빠알리니까야 초전법륜경을 보면 부처님의 첫 설법을 듣고 꼰당냐가 법의 눈이 열린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Imasa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ṃ vītamalaṃ dhammacakkhuṃ udapādi: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S56.11)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생멸에 대한 것입니다. 연기법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법이기 때문에, 생멸을 말했다는 것은 연기법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꼰당냐는 가르침을 이해 했습니다. 처음으로 법의 바퀴가 굴러가는 순간입니다.이 순간에 대하여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우주적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전지의 땅의 신이 이를 알아 바로 위 사대천왕에게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S56.11)라고 전하고, 이를 전해 들은 사대천왕은 삼십삽천으로, 이렇게 해서 마침내 하느님(Brahma: 梵天)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자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주적 대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꼰당냐가 이해함으로 인하여 증명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법의 바퀴가 굴러 간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S56.11,전재성님역)라고 읊으셨습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안냐(añña)는 ‘highest knowledge’의 뜻으로 최상의 지식을 말합니다. 빠알리 봐따(vata)가 ‘surely; certainly’의 뜻이므로 “꼰당냐가 확실히 알았구나” “꽁당냐가 확실히 이해했구나”의 의미입니다.
견도(見道), 수행도(修行道), 무학도(無學道)
처음 설법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성취됩니다. 이는 우다나와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는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점차적으로 기울고 점차적으로 깊어지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 (Ud.51,A8.19)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꼰당냐는 부처님의 첫설법을 듣고 가르침을 이해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확실히 알았구나’ ‘확실히 이해했구나’라며 부처님 자신이 깨달은 법이 증명된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꼰당냐의 이해는 견도에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최상의 진리를 알았지만 남아 있는 번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 단계가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로서 수행도라 합니다.
꼰당냐는 수다원 단계였습니다. 꼰당냐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수다원 오도송’이라 합니다. 이제 법의 맛을 본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기경전에서 수다원 단계는 열 가지 족쇄에서 유신견, 회의적 의심, 개금취견이 풀린 단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 등 번뇌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후 단계는 번뇌를 소멸하는 단계입니다. 이를 수행도라 합니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말합니다.
사다함이 되면 탐욕과 성냄이 옅어집니다. 아나함이 되면 탐욕과 성냄이 완전 소멸됩니다. 그러나 색계에 대한 욕망, 무색계에 대한 욕망, 들뜸, 자만, 무명이라는 아주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습니다. 이를 오상분결이라 하여 아라한 단계가 되어야 소멸합니다.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소멸됩니다. 이를 무학도라 합니다. 견도의 수다원, 수행도의 사다함과 아나함, 그리고 최후로 무학도의 아라한이 됩니다. 이렇게 궁극적인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성취 됩니다.
수다원 단계에서도 궁극적인 진리의 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번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이 수행도입니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S7.8)라고 선언합니다. 이를 아라한선언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인가한 적이 없다
자신에게 번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자신이 잘 압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 역시 자신이 잘 압니다. 누가 알려 주는 것도 아니고 인가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수행을 하여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를 해탈지견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인가한 적이 없습니다. 초기경전 어디에도 부처님이 깨달음을 인가해 주었다는 곳이 없습니다. 초전법륜경에서 꼰당냐가 법의 눈이 열린 것을 확인 했을 때 인가라기 보다는 자신의 깨달음이 증명 되는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처음 이야기를 한 것에 대하여 누군가 이해가 이루어졌을 때,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깨달음이 틀림 없음을 확신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모든 번뇌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대표적으로 탐, 진, 치로 대표되는 번뇌입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욕심내고 화낸다면 그는 결코 깨달은 자가 아닙니다.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을 때 무학도, 아라한이라 합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 궁극적 깨달음입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일체지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얼마나 되는지, 또는 깨달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된 자는 부처님 주변 말고도 많았을 것입니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며 아라한 선언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이를 인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번뇌가 다 소멸된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지 누군가 알려 준다고나 인가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초기경전에서 볼 수 없습니다.
한역경전에서는
초전법륜경에서는 꼰당냐에게 법안이 열린 것 까지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역경전 ‘불설중본기경 전법륜품’에서는 이렇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법을 말씀하실 때, 구련 등 5명은 번뇌가 다하고 뜻이 풀려 모두 아라한이 되어 위의 여러 하늘들 8만이 법의 눈을 얻었으며, 삼천세계가 크게 진동하였다. 이것이 여래께서 처음 바라나국에서 위없는 법의 바퀴로써 아직 굴리지 못한 것을 굴리어 크게 일체를 제도하신 것이니, 즐거이 받지 아니함이 없었다.”
P님은 위 한역경전을 근거로 하여 초전법륜경에서 오비구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고익진 교수가 엮은 ‘[한글 아함경] 담마아카데미
101쪽’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성철스님도 백일법문에서
“원시경전의 초전법륜에서는 아라한이 여섯이 있다고 설하여 법을 바로 깨친 사람을 아라한(阿羅漢)이라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아라한이란 말은 중도를 깨친 사람을 의미합니다.”(제 5장 열반경 등의 사상, 백일법문, 성철스님)이라 하여, 마치 부처님의 처음 설법을 듣고 오비구가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초전법륜경에서 오비구 중에 꼰당냐만이 법안이 열렸습니다. 이제 진리의 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율장대품을 보면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이야기’라 하여 ‘누구에게 법을 설할까?’ 하는 장면부터 오비구가 아라한이 되는 장면까지가 모두 기록 되어 있습니다. 니까야에서는 ‘초전법륜경(S56.11)’과 ‘무아상경(S22.59)’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이 수다원이 되는 단계의 가르침이라면, 무아상경은 아라한이 되는 단계의 가르침입니다. 율장대품에서는 모두 다 포함되어 있어서 말미에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님(아라한)이 생겨났다.”(Vin.I.14)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니까야를 보면 번뇌가 소멸되는 완전한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성취됩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결박의 경(A10.13)’에서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과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이 있다.”(A10.13)라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계적입니다. 부처님은 사성제, 십이연기 등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등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부터 했습니다. 그리고 근기에 따라 설법했습니다. 오비구는 함께 수행했기 때문에 법의 이해가 빨랐을 것입니다. 설령 궁극적 진리를 알았다고 하여, 궁극적 진리를 체험 했다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번뇌가 있습니다. 탐, 진, 치 등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 시켜야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 됩니다.
오비구가 부처님 설법을 듣고 단번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견도, 수행도, 무학도 단계를 거쳐서 깨달음이 완성됩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법안만 열렸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초전법륜경을 듣고 단박에 깨달았고, 또 이를 부처님이 인가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오비구가 모두 수다원 단계, 즉 법안이 열린 것을 확인하고 다음 단계로 무아상경을 설했습니다. 율장대품에서는 이어져 있어서 단박에 깨달은 것으로 오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초전법륜경은 꼰당냐가 법안이 열린 것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법안이 열린 오비구에게 ‘무아상경(S22.59)’을 설했습니다. 이른바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S22.59)로 시작되는데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으로 오비구가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아라한선언, 완전한 깨달음의 오도송
깨달음은 누가 인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에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수없이 나옵니다.
“바라드와자 가문의 바라문은 세존의 앞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존자 바라드와자는 구족계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떨어져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다. 마침내 존자 바라드와자는 거룩한 분 가운데 한 분이 되었다.”(M7)
“그래서 그들에게 ‘우리들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이와 같은 앎과 봄이 생겨났다.”(M26)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한다. ‘이것이 괴로움이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번뇌이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번뇌의 발생이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았을 때, 그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앎이 일어나며,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M39)
2018-01-16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정도론에서 본 아공법공(我空法空) (0) | 2018.03.05 |
---|---|
청정도론을 읽어 나가면서 기쁨을 (0) | 2018.01.30 |
기도를 들어주는 창조주는 없다 (0) | 2017.12.27 |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인연 없는 중생의 대명사 우빠까 (0) | 2017.12.26 |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0) | 2017.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