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둥지를 벗어나 비상(飛上)했을 때
뻐꾸기 탁란을 보면 비정함을 느낍니다. 이전에 자연다큐에서 보았던 탁란 장면이 또다른 자연다큐에서 나왔습니다. 어미새 보다 덩치가 훨씬 더 큰 뻐꾸기 새끼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하는 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작은 알을 밀어내는가 하면 작은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것도 다를 바 없습니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서 번식하는 뻐꾸기 탁란 장면은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새는 때가 되면 짝을 지어 알을 낳습니다. 낳은 알은 일정기간 부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새끼가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 생존경쟁은 시작됩니다. 새로서 일생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어미새는 먹이를 부지런히 물어다 주고 새끼새는 먹이를 통째로 삼켜 버립니다. 새끼새는 거친 먹이를 먹고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마침내 둥지를 떠 나게 되었을 때, 창공을 향하여 날개짓을 했을 때 새끼새의 삶은 완성됩니다.
뻐꾸기가 탁란하는 과정을 보면 비정하긴 하지만 본능에 따른 것입니다. 결국 비상(飛上)하기 위한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새는 비상함으로써 삶이 완성됩니다, 만일 새가 날지 못한다면 더 이상 새로서 살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해야 할 일들을 나중에 하려고 한다면”
새가 새 다우려면 비상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비상해야 합니다. 걸림 없는 대자유의 삶입니다. 그래서 테라가타에서는 이렇게 노래 했습니다.
“실로 먼저 해야 할 일들을
나중에 하려고 한다면,
그는 행복한 상태를 빼앗기고
나중에 후회하는 자가 된다.” (Thag.225)
“해야 할 것만을 실로 말하고,
하지 않을 것은 말하지 말라.
현명한 님들이라면,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자를 알아챈다.”(Thag.226)
“지극히 안락한 것은 참으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가르친 열반이니,
슬픔을 여의고, 티끌을 여의고,
안온하여, 괴로움이 종식된 것이다.” (Thag.227)
테라가타 삼련시집에서 박꿀라존자가 읊은 것입니다. 똑같은 시가 하리따존자의 게송(Thig.261-263)에서도 병행합니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나중에 하려 한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 했습니다. 농사지을 때 시기를 놓치는 것과 같습니다. 새가 부화시기를 놓치는 것과 같습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파종시기를 알아 제때에 씨를 뿌립니다. 알에서 나온 새끼새는 어미새가 물어준 먹이를 받아 먹고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모두 해야 할 때를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해야 할 일을 미룬다든가 하지 않으려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주석에 따르면 “예전에 늙고 죽음 등에 정복되지 않았을 때에,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방일하기 때문에 하지 않고, 나중에 할 시기를 지나친다.”(Thag.II.89)라는 뜻입니다.
게으른 자는 해야 할 때 하지 않는 자입니다. 지금 건강하고 젊다고 하여 즐기기에 게으르지 않는다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자가 됩니다.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 번째 게송에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가르친 열반이니” (Thag.227)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괴로움의 종식과 윤회의 종식입니다. 열반을 실현함으로 인하여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젊다고 하여,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즐기기에만 바쁘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고 말한다면 악마의 속삭임일 것입니다.
도처에 악마의 속삭임이
도처에 악마의 속삭임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많은 수행승들의 경(S4.21)’에 따르면 악마 빠삐만이 늙고 병든 성직자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악마는 콜록콜록하면서 수행승들에게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라고 말합니다.
성직자로 변신한 악마는 젊은 수행자들에게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즐기라고 합니다. 젊었을 때 즐기는 삶을 살고 나이 들어 수행해도 늦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런 악마의 속삭임에 어느 수행승이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 하셨습니다. (S4.21)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악마는 시간은 널널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머리가 칠흑같이 검은 청춘에게는 시간이 무한정 남아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젊을 때 청춘을 마음껏 즐겨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승들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을 위해 출가한 수행자들에게는 남아 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정진해도 이번 생에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 했습니다.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최대의 효율을 높여 최대의 성과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옆도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오로지 학업에 집중해야 합니다. 수행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정진도 해야 하고 가르침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경전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일생동안 공부하고 정진해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에는 놀고 수행은 나이 들어 해도 늦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악마의 속삭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수행승을 유혹하는 기녀(妓女)
무엇이든지 시기가 있습니다. 시기를 놓쳐 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기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라 했습니다. 우리가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우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세월이 청춘도 버리고 중년도 버립니다. 마침내 노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노년출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준수하기 어렵다.” (A5.60)라 했습니다.
악마는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수행승들을 유혹합니다. 누군가 “수행승이여, 그대는 향락 없이 걸식하네.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지 않네. 수행승이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시오.” (S1.20)라고 말한다면 악마의 속삭임이라 봐도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 도처에 악마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테라가타 칠련시집을 보면 성자를 유혹하는 기녀가 있습니다. 기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 내가 불을 가져오겠소.” (Thag.461)
“우리가 늙어서 둘이서
지팡이에 의지하게 될 때,
둘이서 함께 출가하면,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Thag.462)
수행승과 기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갖 남자들을 다 겪어 본 기녀에게 수행승은 특별한 존재일 것입니다. 기녀는 수행승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재산으로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그것도 불 앞에서 ‘불의 맹세’를 하겠다고 합니다. 과연 기녀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요? 더구나 기녀는 수행이라는 것은 나이 들어서 해도 늦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때 가서 자신과 둘이서 함께 수행하자는 것입니다.
“창녀에게 탁발을 다니거나 과부에게..”
기녀는 지금 젊은 시절에는 마음껏 즐기는 삶을 살자고 합니다. 젊어서는 둘이서 즐겨서 좋고, 나이 들어서는 함께 수행해서 좋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라 했는데, 마치 우리 속담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또는 ‘꿩 먹고 알 먹고’라는 말을 연상케 합니다.
세상에 기녀의 말을 믿고 환속한다면 대단히 어리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갖 남자를 다 겪어 본 기녀의 입장에서는 삭발한 수행자는 또 다른 매력의 대상이 될지 모릅니다. 그것도 ‘청정한 삶을 사는 성자를 꺽었다’는 승리감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기녀는 유혹합니다. 악마가 유혹하는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의심을 받거나 의혹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탁발을 다니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창녀에게 탁발을 다니거나 과부에게 탁발을 다니거나 늙은 처녀에게 탁발을 다니거나 거세된 자에게 탁발하러 다니거나 수행녀에게 탁발을 다니는 것이다.”(A5.102)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청춘은 짧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이, 수행승이 기녀의 유혹에 넘어 갔다면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로지 향락으로 일관하는 삶을 살아 온 기녀에게 있어서 환속한 자는 양이 차지 않을지 모릅니다. 환속하면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 갈 것입니다. 그것은 탐욕으로, 분노로, 미혹으로 사는 낮은 지위의 삶이 될 것입니다.
수행승은 기녀의 유혹에 넘어 가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기녀가 있는 곳에 탁발하게 되어 기녀가 유혹했지만, 기녀가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서 “죽음의 왕의 그물이 펼쳐진 것 같았다.”(Thag.463)라고 했습니다. 수행승은 화려하게 치장한 기녀를 보고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재난을 감지한 것입니다.
욕심 한번 내는 것도 불선업(不善業)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욕계라 합니다. 단 한시도 욕망이 없이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욕망으로 살아 갑니다. 그런데 욕망은 반드시 분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거머쥐려는 갈애가 일어 났을 때 탐욕이라 하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밀쳐내려는 갈애가 일어 났을 때 성냄이라 합니다.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은 매 순간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에 그에 따라 탐욕과 성냄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탐욕과 성냄이 모두 불선업이라는 사실입니다. 욕심 한번 내는 것도 불선업(不善業)이 되는 것이고, 불만을 한번 표출하는 것도 불선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불선업이 쌓이고 쌓이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습니다. 불선과보를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dhammehi samannāgato yathābhataṃ)”(A5.145)라 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A5.145)라 했습니다.
오계를 어기는 것만이 악처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계는 기본적으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욕망으로 사는 모든 존재는 악처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같은 불선업이 쌓이고 쌓였을 때 악처에 나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여덟 가지 유형의 불선법(不善法)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대하여 ‘해로운 마음(akusala citta)’라 합니다. 이를 불선법(不善法)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불선법이 해로운 마음일까? 탐욕을 예로 든다면 욕계를 사는 중생들은 매일 매순간 불선업을 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군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서 “예쁘다”라 하며 계속 쳐다 보는 것도 불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선업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여덟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형1 :
어떤 사람이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즐겁게 음식과 음료들을 즐기고 있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①)
유형2 :
어떤 사람이 업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의 친구에게 설득을 받은 후에 영화를 즐겁게 본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②)
유형3 :
한 여자가 유쾌하게 새 옷을 입지만 그 옷에 대한 집착이 해로운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③)
유형4 :
한 소녀가 업과 업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친구들의 요청에 순응하여 현대적인 음악을 즐겁게 듣는다.
(기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④)
유형5 :
한 소년이 약간의 집착을 가지고 있지만 기쁨이 없이 업에 대한 지혜도 없이 소박한 밥을 소금과 함께 먹는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⑤)
유형6 :
한 소녀가 그녀의 새 옷이 아름답다는 설명을 어머니가 한 후에 그 옷에 대한 진가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중립적인 느낌을 갖고 있고 업에 대한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한, 자극 받은 마음 하나⑥)
유형7 :
업에 대해 생각하면서, 당신은 평온한 느낌을 가지고 커피를 마시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 맛을 감상하고 있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⑦)
유형8 :
한 여자가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여성 판매원에게서 많은 설득을 받은 후에 마지 못해 새 옷을 산다.
(평온이 함께 한,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자극 받은 마음 하나⑧)
(출처: 붓다아비담마, 60-61쪽)
여덟 가지 유형은 모두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입니다. 욕계에서 12가지 해로운 마음이 있는데 탐욕에 대한 것은 8가지, 성냄에 대한 것은 2가지, 어리석음에 대한 것은 2가지입니다. 모두 12가지의 욕계의 해로운 마음이 악처로 이끕니다.
12가지 유형을 보면 즐겁게 식사를 하고 음료수를 즐기는 것도 불선업이 됩니다. 음악을 즐기는 것도, 옷 입기를 즐기는 것도 모두 불선업입니다. 눈과 귀 등 오감으로 즐기는 것 모두가 불선업입니다. 누군가 ‘인생은 즐기는 것이다’라 하여 즐기는 삶을 이야기한다면 불선업을 조장하는 것이 되어 악마의 속삭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하철역 벽면에 붙어 있는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는 구호 역시 불선업을 조장하는 글입니다.
악마 빠삐만이 늙은 성직자로 변신해서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라고 말하는 것도 불선업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또 기녀가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Thag.461)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불선업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중에 하려 한다면 게으른 자라 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농사에 파종시기가 있듯이, 젊은 시절에는 학업을 해야 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어서 청춘을 즐기고 나중에 나이 들어 수행한다고 했을 때 과연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시간은 우리편이 아닙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말입니다.
테라가타에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하려 한다면 “그는 행복한 상태를 빼앗기고 나중에 또한 후회한다.”(Thag.225)라 했습니다. 지금 젊다고 하여 건강하다고 하여 감각적 쾌락을 즐긴다면 이는 오욕을 즐기는 거친 행복이 됩니다. 오욕을 즐기는 것은 모두 불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또는 건강할 때 수행 등으로 선업을 지어 놓았을 때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천상계나 열반이라 했습니다. 선정삼매에서 행복은 오욕으로 인한 일시적이고 거친 행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 (Dhp 204)라 하여 열반이야말로 궁극적 행복이라 했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선업을 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즐기는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눈과 귀 등 오감을 즐기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욕망으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중생들은 대부분 탐, 진, 치로 살아갑니다. 이 말은 매일 불선업을 짓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이 제 아무리 착하게 그리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산다고 하지만, 해로운 마음이 유익한 마음 보다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미혹과 탐욕 때문에 우리는 항상 즐기기를 원하고, 즐기고 있는 동안에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이 초당 수십억 번의 속도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즐겁게 옷을 입고 있을 때, 음식과 음료를 즐기고 있을 때, 음악을 듣고 TV를 보고 있을 때, 소설을 읽고 있을 때, 소득과 재산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들이 수십억 번씩 일어나고 있다.”(붓다아비담마, 64쪽)
아비담마에 따르면 우리 들 마음에서는 초당 수십억 번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이란 앞서 언급했던 여덟 가지 유형의 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즐기는 행위는 모두 불선업이 됩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등을 즐기려 한다면 불선업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해로운 마음이 불리한 과보와 불행한 운명이나 재생을 가져올 불건전한 업의 씨앗들을 남기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자유롭게 진행되도록 허용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붓다아비담마, 64쪽)라 했습니다.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불자들도 즐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스님들도 역시 즐기는 삶을 살아 갑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스님들은 음식만들기를 즐긴다든가,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긴다든가, 춤 추는 것을 즐깁니다. 중생교화를 위한 방편이라 볼 수 있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불선업을 짓고 있는 셈이 됩니다.
스님들 중에는 이번 생에서는 방편을 사용하지만 다음 생에서는 열심히 수행정진하겠다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불자들 중에서는 이번 생에서는 수행을 못하지만 다음 생에서는 스님으로 태어나서 수행자로 살겠다고 발원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런 소원은 이루어질까요?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인간으로 태어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다음 생을 기약하지만 누구도 다음 생에 인간으로 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에서는 “실로 먼저 해야 할 일들을 나중에 하려고 한다면, 그는 행복한 상태를 빼앗기고 나중에 후회하는 자가 된다.”(Thag.225)라 했습니다.
2017-12-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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