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아는 만큼 능력껏 알려 주는 것도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2. 14. 17:00


아는 만큼 능력껏 알려 주는 것도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자신과 타인의 이익 사이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를 이기주의자라 합니다. 반면 타인의 이익도 추구하는 자를 이타주의자라 합니다. 이기주의는 개인주의이어서 좋지 않은 것이고 이타주의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들은 자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아의 욕구충족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타주의자가 자아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그가 비록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욕망에 개입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아에 기반을 두 이기주의자와 이타주의자는 욕망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욕망이 내부로 향하면 이기주의자가 되고 욕망이 외부로 향하면 이타주의자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타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 보다 낫습니다.

 

불교인들은 가르침을 실천합니다. 도를 닦는다고도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무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무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 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것이 우선일까요? 아니면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 것이 우선일까요? 대승보살도의 정신이라면 후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정반대입니다.

 

타인을 구하려거든 먼저 자신을 구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한 삶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위한 삶이 우선함을 말합니다. 제 할일 도 못하는 자가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것은 맞지 않음을 말합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네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 하는데 있어서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화장용 장작의 경(A4.95)’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따르면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지 않는 사람,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eyyathāpi bhikkhave chavālāta ubhato paditta majjhe gūthagata neva gāme kaṭṭhattha pharati na araññe. Tathūpamāha bhikkhave ima puggala vadāmi yvāya puggalo nevattahitāya paipanno no parahitāya.

 

Tatra bhikkhave yvāya puggalo parahitāya paipanno no attahitāya, aya imesa dvinna puggalāna abhikkantataro ca paītataro ca.

 

Tatra bhikkhave yvāya puggalo attahitāya paipanno no parahitāya, aya imesa tiṇṇa puggalāna abhikkantataro ca paītataro ca.

 

Tatra bhikkhave yvāya puggalo attahitāya ca paipanno parahitāya ca, aya imesa catunna puggalāna aggo ca seṭṭho ca pāmokkho ca uttamo ca pavaro ca.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화장용 장작은 양끝이 불타고 중간은 악취가 나기 때문에 마을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고 한적한 곳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와 같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앞의 두 사람 가운데 보다 훌륭하고 훨씬 탁월하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만,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앞의 세 사람 가운데 보다 가장 훌륭하고 훨씬 탁월하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모든 사람 가운데 최상이고 수승하고 가장 훌륭하고 훨씬 탁월하다.”(A4.95)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지 않는 사람,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중에서 최악은 자타에 이익이 되지 않는 자이고, 최상은 자타에 모두 이익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타인 보다 자신의 이익을 실천 하는 자가 더 수승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상식을 깨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보다 먼저 자신의 이익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고 했을까요?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부터 먼저 구제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듯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는 자는 남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버리고 없애는 삶의 경(M8)’에서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M8)라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긴 장대나 밧줄 또는 나룻배로 건져 내어야 합니다. 아무리 수영실력이 좋아도 물에 빠진 자를 구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 들었다가는 함께 물귀신이 되기 쉽습니다. 물에 빠진 자는 살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붙잡으려 하기 때문에 물귀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수렁에 빠진 자가 수렁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빠진 자가 구하러 들어 간 자나 수렁에 빠져 나오기 힘듭니다. 밧줄 등을 던져서 건져 올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도 구제되지 않는 자가 남을 구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제어하지 않고 수련시키지 않고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M8)했습니다. 다만 자신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M8)라 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남도 사랑한다

 

니까야는 서로 연계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서는 다르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니까야에서나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가르침에 일관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타인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가르침에서도 드러납니다.

 

자애수행에 따르면 가장 먼저 자기자신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가까운 대상부터 먼 대상에 이르기까지 점차 확장해 나갑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말리까의 경(S3.8)’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빠세나디왕은 말리까왕비에게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사람이 있소?”(S3.8)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은근하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서 물어 본 것입니다. 이에 현명한 왕비는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습니까?”(S3.8)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말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이 사랑스런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이 사랑스런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행을 하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악행을 하는 자입니다. 악행을 하여 고통 받았을 때 자기가 자기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학대하는 자는 남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남도 사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대하는 것처럼 남도 사랑스럽게 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명한 왕비 말리까가 나보다 더 사랑스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이고, 곧 타인도 사랑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대왕을 사랑한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자기보다 더 사랑스런 남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되리.”(S3.8)라 했습니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남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은 먼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부터 시작됩니다.자신이 있고 나서 남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괴로움도 해결하지 못한 자가 남의 괴로움을 해결 해 줄 수 없습니다. 이는 숫따니빠따 나룻배의 경(Sn2.8)’에서 마치 사람이 물이 넘치고, 홍수가 져서, 물결이 거센 강에 빠지면, 그 물결에 휩쓸려 떠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Stn.319)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현명한 자가 튼튼한 나룻배에 올라서 노와 키를 장착하고, 그 도구에 대하여 잘 알고 잘 다룬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줄 수 있는 것과 같이”(Stn.321)라 했습니다. 어느 경에서든지 수영 잘 한다고 하여 물속으로 뛰어 들어 구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물 밖에서 또는 수렁 밖에서 구해 주는 것입니다. 여건을 갖춘 자가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혜에 통달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많은 것을 배워 동요하지 않는 성품을 가진 참사람”(Stn.32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한 자만이 미혹한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자

 

네 종류의 사람에서 최악과 최선이 있습니다. 최악은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 같은 사람이고, 최선은 버터크림 같은 사람이라 했습니다. 최악은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이고, 최선은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 사람입니다.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 이야기는 상윳따니까야 걸식의 경(S22.80)’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탁발하는 것에 대하여 삶의 끝이라 했습니다. 청정한 삶을 위해서 오염원을 소멸하기 위한 삶의 방식이 탁발입니다. 그럼에도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며 살아 간다면 수행자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치 쇠똥을 바르고, 양쪽 끝이 타다 남은 태워진 화장용 장작” (S22.80)으로 비유했습니다.

 

화장터에서 타다만 장작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습니다. 이득을 탐하는 수행승은 승가에 속하지도 않고 재가에 속하지도 않는 반승반속이어서 화장터 장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람은 재가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수행자의 목적도 성취할 수 없다.”(S22.80)고 했습니다.

 

화장터에서 타다만 장작은 혐오스런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입니다. 반승반속의 무리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은 물론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악취나는 화장용 장작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자입니다. 일반범부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청정한 삶은 최상의 제호(醍醐)

 

가장 수승한 자는 자신의 이익은 물론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자라 했습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단계적으로 실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소에서 우유가, 우유에서 크림이, 크림에서 신선한 버터가, 신선한 버터에서 버터기름이, 버터기름에서 버터크림 나오는데, 그것들 가운데 버터크림을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한다.”(A4.95)라 했습니다.

 

버터크림을 최상이라 합니다. 버터크림에 대하여 제호(醍醐)라고 합니다. 우유를 숙성시켜 만드는 유제품 중 최상의 품질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가장 숭고한 부처님의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 쓰입니다. 제호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sappimaṇḍa’입니다.

 

유제품 중에 최상은 ‘sappimaṇḍa’입니다. 이 말은 ‘sappi+maṇḍa’의 합성어입니다. 빠알리어 ‘sappi’‘clarified butter’의 뜻으로 정제된 버터를 의미하고, 빠알리어 ‘maṇḍa’‘the best part (of milk, etc.)’의 뜻으로 유제품 중에서 최상을 말합니다. ‘sappi’‘maṇḍa’가 합쳐져서 ‘sappimaṇḍa’라 하는데 최상의 유제품이라 하며 한자어로는 제호(醍醐)라 합니다. 그런데 종종 ‘maṇḍa’라는 말을 제호라고도 합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열 가지 힘의 경2(S12.22)’에서 수행승들이여, 이 청정한 삶은 최상의 제호이다. (maṇḍapeyyamida bhikkhave, brahmacariya)”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최상의 제호(maṇḍapeyya)’에 대하여 청정한 삶(brahmacariya)’과 동의어로 보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계적으로 성취됩니다. 우유에서 제호에 이르기까지 단계가 있듯이, 가르침 역시 과정이 있습니다. 유제품의 최상이 제호이듯이, 가르침은 청정한 삶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청정한 삶은 최상의 제호라 한 것입니다.

 

아는 만큼 능력껏 알려 주는 것도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하러 물속에 들어가면 똑같이 물귀신 되기 쉽습니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물 밖에서 밧줄이나 나무 막대, 나룻배 등을 이용하여 구해내야 합니다. 수렁에 빠진 자 역시 수렁 밖에서 구해내야 합니다. 수렁에 빠진 자가 수렁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오염원으로 가득한 자가 오염원으로 가득한 자를  제도할 수 없습니다. 오염원을 소멸한 자만이 오염원에 가득한 자를 제도할 수 있습니다.

 

남을 제도하려면 먼저 자신부터 제도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듯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한 자가 남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보살행이라는 것도 깨달은 중생이 하는 것입니다. 먼저 깨닫고 중생구제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역시 상구보리하화중생입니다.

 

상구보리하화중생이라 하여 깨닫기 전에는 중생구제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라면 깨달음에 관계 없이 언제나 중생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탁발나가는 것 자체가 하화중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법하고 청정한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감화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알려 주는 것도 하화중생에 해당될 것입니다.

 

입보리행론에서 샨티데바는 “이 세상이 남아있고 중생들이 남아 있는 한, 저도 계속남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몰아내게 하옵소서!”라고 서원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도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이 모두 성불할 때 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중생들이 모두 성불할 때 까지 자신의 성불을 유예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중생의 서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동시에 하화중생도 해야 함을 말합니다.

 

자신이 현재 알고 있는 것을 아는 만큼 능력껏 알려 주는 것도 상구보리하화중생에 해당됩니다. 깨닫고 나서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중생도 교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야말로 진정한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일 것입니다.

 

 

2017-12-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