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기도를 들어주는 창조주는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2. 27. 18:51


기도를 들어주는 창조주는 없다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 준다고?

 

재작년 전남 구례에 있는 유명기도처에 간적이 있습니다. 천장사스님과 신도들과 함께 한 남도순례지중의 하나입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 힘겹게 도착하니 절벽 바로 앞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한가지 소원이 꼭 이루어지는 약사여래 기도도량이라는 문구이었습니다.

 

약사여래기도도량에서는 기도공덕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약사여래불 기도를 하면 마음의 고통이 없어지고, 모든 재앙이 물러간다고 합니다. 또 설명문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원을 세워 OO암 약사여래 부처님께 기도하면 병든 사람, 생활이 어려운 사람 등 누구나 그 업장이 소멸하여, 마음이 편안해지고 건강이 회복되어 뜻한 바가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만큼 강렬한 문구는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물론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2010년 경남 창원시 옥외광고판이 한 파워블로거에 의해 포착되었습니다. 커다란화면의 옥외광고판에는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는 OO OO라 되어 있습니다. 이 문구에 대하여 파워블로거는 “아마도 이 절에 가서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꼭 이뤄준다는 말인 것 같은데요. 세상에 이보다 더 사람을 유혹하는, 강력한 광고카피가 있을 수 있을까요?”라는 멘트를 날렸습니다.

 




팔공산 갓바위에도 한가지 소원이야기가 있습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한가지 소원을 꼭 들어주시는 갓바위(冠峰) 약사여래불께 기도를 올려 보세요.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낫숫물이 바위를 뚫듯 당신의 소원은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라 되어 있습니다. 해동용궁사 입석에는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는 해동용궁사라 되어 있습니다. 해수관음도량으로 유명한 보리암의 설명문을 보면 “보리암은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는 영험스럽고 자비스런 기도 도량입니다. 사람들은 소원을 기원하기 위해 기도하러 보리암을 찾습니다.”라 되어 있습니다. 한가지 소원 들어 준다는 말은 사실상 어느 절이나 암자에서 볼 수 있는 전국적 현상입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험생이 있다면 합격기도를 하고, 입찰을 앞두고 있다면 낙찰기도를 합니다. 병든 자가 있다면 치유의 기도를 합니다. 건강, 시험, 사업, 치유 이와 같이 네 가지에 대하여 사대기도라 합니다. 절이나 암자, 또는 유명기도처에서 기도하면 사대기도가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절에서는 기도하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막다른 처지에 몰린 자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번 한번만 소원을 들어 주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만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부처님과 보살님을 원망해야 할까요?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는 양날의 검입니다. 잘 쓰면 한쪽 날로 상대를 벨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반대쪽 날에 자신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소원성취를 목적이라으로 하는 기도는 근본적으로 욕망이 개입된 것입니다. 욕망으로 이루고자 기도했지만,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실망도 클 것입니다.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기도 했지만 이루어진 것이 없을 때 미련없이 떠날지 모릅니다. 더 큰 기도의 대상을 찾아 갈지 모릅니다. 천지를 창조한 자만큼 전지전능한 자는 없을 것입니다. 법당에 앉아 있던 자가 교회나 성당에 앉아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육근을 청정하게 했을 때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특히 죽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Stn.588)라 했습니다. 죽은 자를 애도 해 보지만 살아서 돌아 오지 않습니다. 번뇌만 쌓여 갈 뿐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해 보지만 그것에 탐욕이 개입 되어 있다면 근심과 걱정만 더할 뿐입니다. 낙찰을 기대하며 기도 해보지만 집착하면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치유를 목적으로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매달려 보지만 번뇌만 쌓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위해 행복을 구하는 님이라면, 자신에게 있는 비탄과 애착과 근심과 자기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려야 합니다.”(Stn.592)라고 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에게 의존하여 소원을 들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 대신에 번뇌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입니다. 욕망이 개입된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안정과 평화입니다.

 

불교에서 기도는 육근을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이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모든 것이 술술 풀리고 이루어집니다. 마음의 안정과 평화야말로 최대의 기도효과입니다. 법당에서 앉아 있는 것으로도 기도는 성취됩니다. 보이는 것은 극락세계와 같은 장엄물이고, 들리는 것은 염불소리이고, 냄새 맡는 것은 향이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번뇌 없는 그 마음이 기도가 이루어진 마음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 밖에서 절대자를 찾으려 한다면

 

사람들은 우리 몸과 마음 밖에 따로 마음이 있는 줄 압니다. 우주 어느 공간에도 나의 기도를 들어 줄 수 있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 전지전능하고 초월적이고 영원불변하고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는 하느님 또는 하나님, 브라흐마, 바이로차나 등으로 불리우는 궁극적 실재 내지는 존재의 근원 역시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오온(五蘊)’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몸을 떠나 따로 공간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몸이 있으면 정신이 있고, 정신이 있으면 몸이 있듯이 상호의존하며 조건발생하는 연기적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예로부터 사람들은 우리 몸과 마음 밖에 다른 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 따르면 그러한 존재에 대하여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D1)라 했습니다. 오늘날 유일신 종교에서 보는 절대자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절대(絶對: absolute)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절대로 원인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재신(自在神)’은 없습니다. 절대신이 없다면 창조신도 없고 하느님 또는 하나님도 없고 알라신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의 근원 내지 궁극적 실재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것들은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 따르면 절대로 존재하는 것(絶對有: atthitā)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絶對無: natthitā)’, 즉 양극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존재()와 비존재()에 의존하지만 이는 갈애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말합니다.

 

누군가 절대신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영원주의자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 밖에 따로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허무주의자이기 쉽습니다. 우리는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마음도 없고 단멸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매순간 찰라생찰라멸하며 상속되어 갑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찰라생찰라멸하기 때문에 다음생으로 이어집니다.

 

누군가 오온 이외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기 쉽습니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말씀 하셨지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연기법으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이 무상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몸과 마음 밖에서 절대자를 찾으려 한다거나 우리 몸과 마음 깊은 곳에 영원불멸의 신성이나 불성이 있다고 본다면 연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느님(Brahma)도 윤회하는 중생

 

부처님 당시 고대 인도에서는 브라만교를 믿었습니다. 브라흐마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브라흐마가 창조주가 아니라 윤회하는 중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하느님 바까의 경(S6.4)’에서 만약 그대가 무상한 것을 실로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견고하지 않은 것을 실로 견고하다고 말한다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실로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실로 완전하다고 말한다면,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S6.4)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망상가형 하느님(Brahma) 바까(Baka)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바까는 영원주의를 대표합니다. 그는 사선정천에서부터 차츰 디그레이드(Degrade) 되어 수명이 고작 일겁인 초선정천에 태어났음에도 너무 오래 산다고 여겨서일까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렸습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경(M49)’에서 부처님이 그대는 여기서 오래 동안 살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잊혀져 버렸습니다.”(M49)라고 하느님 바까에게 말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망상가형 하느님 바까는 자신에 대하여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M49)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의 전생을 알려 주었습니다. 하느님 바까도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영원히 산다고 착각하는가 하면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창조주라는 망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연기적 관계속에서 명칭만이 주어져 있을 뿐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경(M49)’에 따르면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에게 다음과 같이 땅의 법문을 해 줍니다.

 

 

하느님이여, 나는 땅을 땅으로 곧바로 알고 땅이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 나는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땅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땅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땅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땅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

 



 

부처님의 땅에 대한 법문은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도 실려 있습니다. 생각이 왜곡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바까가 자신이 창조주라고 믿고 있는 것은 허황된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땅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경에서는 땅뿐만 아니라 물, , 바람 등이 등장합니다.

 

부처님이 땅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은 갈애와 자만과 견해에 의해서 땅을 파악하지 않는다.”(Pps.II.412)라 합니다. 그런데 붓다고사는 땅이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라는 구절에 대하여 열반(nibbana)’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지나친 것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주석과 논장을 중시하는 초불연에서는 붓다고사의 해석을 존중하여 열반이라 해석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땅이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에 대하여 열반의 뜻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방식은 뒤에 나오는 게송 특징이 없고 한계가 없는 모든 경우에 빛나는 의식이 있네.”(M49)에서, 윈냐나(viññāa)에 대하여 열반(nibbana)으로 보는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의식을 열반으로 묘사한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초불연에서는 붓다고사의 해석을 존중하여 게송에 대하여 열반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 빛나나니.”(M49)라 하여 전재성님과 전혀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붓다고사에 의지하지 않고 ‘Pps.II.412’에 근거하여 부처님의 땅에 대한 법문에 대하여 모든 것은 연기적 관계속에서 단지 명칭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지 실체는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창조주라 믿고 있는 망상가형 하느님 바까를 설득하기 위하여 땅뿐만 아니라 물, , 바람, 존재, 신들, 창조주, 하느님, 광음천, 변정천, 광과천, 승자천, 모든 것을 동원합니다. 모두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연기적 관계속에서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일뿐 실체는 경험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창조주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명칭들은 실체가 없는 것들입니다.

 

부처님은 땅은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M49)라 했습니다. 이 말은 땅은 땅의 실체가 없으므로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관계속에서만 경험된다.”(861번 각주)는 말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성을 말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난다는 연기의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창조주는 창조주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하느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M49)라는 구절 역시 연기적으로 파악 되어야 합니다. 창조주나 하느님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 관계속에서 명칭된 것일 뿐 실체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실체로서 참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불광미디어에 실린 홍창성 교수의 글(실체로서의 참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2017-12-27)에 따르면 우리 몸과 마음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 몸에 의지하지 않고 존재하는 독립적인 실체로서 마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창조주, 하느님, 참나와 같은 궁극적 실재 내지는 존재의 근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기반을 가지지 않는 마음, 즉 참나가 정말 있다면 어떻게 인과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냐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예로서 마음이 오른손을 들기를 원한다고 해도 공간속에 없는 마음이 어떻게 공간속으로 들어와 오른손이 올라가게 만들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하여 홍창성교수는 아뜨만과 같은 참마음은 그 속성상 공간속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코 공간속에 존재하는 이 물리세계에 들어올 수조차 없다.”라 합니다. 한마디로 참나 또는 창조주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명칭들은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하느님 또는 하느님, 창조주, 참나가 없어도 이 세상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온이라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오온을 벗어나 저편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존재세계에서 마음을 모두 제거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이 자연세계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철학자들은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떠나 밖에 참마음, 참나, 창조주, 하느님 등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땅뿐만 아니라 물, , 바람, 존재, 신들, 창조주, 하느님, 광음천, 변정천, 광과천, 승자천, 모든 것이라 했는데, 모두 연기적 관계속에서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들로서 실체로서 경험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욕망의 기도를 했을 때

 

사람들은 초월적이고 절대적 존재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대개 자신과 가족의 건강, 시험합격, 사업번창, 질병치유에 대한 기도입니다. 기도 그 자체는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그러나 욕망이 개입 되었을 때 갈애가 일어나고 번뇌로 치닫게 됩니다. 더구나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 하지도 않는 대상에 대하여 욕망의 기도를 했을 때 기도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절이나 암자, 유명기도처에 가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라 합니다.

 

축구경기를 할 때 종종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임에도 동그랗게 스크럼을 짜며 기도하는 모습이 매우 진지해 보입니다. 만일 상대편도 같은 신을 믿는 다면 신은 누구편을 들어 주어야 할까요? 만일 내 자식의 합격을 위해 기도한다면 다른 수 많은 부모도 동시에 기도한다고 했을 때 불보살은 누구를 선택할까요? 기도를 들어 주는 신도 불보살도 없습니다. 만일 기도를 들어 준다면 매우 불공평한 일이 될 것입니다. 기도를 해서 들어 주면 믿고,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믿지 않을지 모릅니다.

 

백만분의 이 기도 가능성

 

신림동에 성원정사가 있습니다. 송위지 교수가 법사로 있는 절입니다. 고시생들을 위한 절이기도 합니다. 송위지 교수는 고시생들이 시험을 보면 기도해 준다고 합니다. 시험이 시작 되는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그 사람을 위하여 계속 기도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효과를 백만분의 이로 봅니다.”라 했습니다. 기도해서 당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오십만분의 일입니다. 이를 퍼센티지로 따지면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송위지 교수는 시험기도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축원을 해 준다고 합니다. 대부분절에서 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송위지 교수는 대체 어떤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물론 발원기도를 합니다. 이른바 사대기도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절대자에게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축원카드대로 읽어 주기는 하지만 경전을 독송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서일까 수험생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백만의 이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백만분의 이 가능성이라면 거의 기도효과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적 효과는 지대할 것입니다. 이른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에 따르면 나비 한마리가 팔랑거리면 먼지역에서 폭풍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조건에 극히 민감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카오스(chaos theory: 混沌理論)’을 말합니다.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그대에게 임하소서

 

누군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준다는 것은 든든한 배경을 가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국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호경 자야망갈라가타(Jayamagala Gāthā)’에서는 각 게송마다 후렴구가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그대에게 임하소서. (Ta-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라 합니다.

 

테라와다불교에는 수호경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축복의 경, 보배의 경, 자애의 경 등을 말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수호경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독송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라가타에서는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 가르침이 잘 닦여지면, 공덕이 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Thag.303)라 했습니다. 담마는 담마를 따르는 자를 보호합니다.

 

항상 가르침과 함께 하는 것이 자신과 가족을 수호 하는 것입니다. 건강, 시험, 사업, 치유 등 이른바 사대기도는 경전을 독송하는 것으로 대신 할 수 있습니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기도는 욕망이 개입 되어 있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독송하는 것은 욕망을 내려 놓게 합니다. 다만 자야망갈라가타에서처럼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그대에게 임하소서라 하면 됩니다.

 

 

 

모든 뭇삶의 요익을 위하시는

크나큰 연민의 수호자께서

모든 초월의 길을 이루시고

위없는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했사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 1번 게송)

 

 

2017-12-27

진흙속의연꽃